'두 사람이 비밀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한 사람이 죽어 사라지는 것뿐이다.'미스터리와 서스펜스의 작법을 충실히 따르고 미친 듯한 몰입도가 압권인 작품. 과거와 현재의 시점이 교차되며 진행되는 이야기는 어느 하나 허투루 된 것이 없다.과거와 현재의 마주침, 인물 A와 인물 B의 시점 엇갈림…… 이런 타입의 구조가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폭설로 고립된 아름답고 순수한 성당 같은 저택이 악의 소굴로 변하고, 새출발의 결심이 생존 게임으로 옮아가면서 이 익숙한 이야기의 얼개가 비로소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매물로 나온 실종된 정신과 의사의 집에 방문한 부부와, 의사가 남겨놓은 환자와의 상담 녹음 테이프. 그 테이프 필름이 조금씩 풀어져 비밀을 아는 자, 비밀을 캐내려는 자, 그리고 비밀을 숨기려는 자들을 옥죄는, 서바이벌 게임과도 같은 할리우드 스타일의 매력적인 작품.
과격하고, 돈키호테스럽고, 기이하고, 우스꽝스럽고, 아름답고, 호전적인 SF.소설에서 기존의 인간은 '살점 인간', 신체의 훼손이자 개축을 한 인간은 '신금속 인간'이라 불린다. 몸의 9할 이상을 금속으로 대체한 것은 본래의 자신일까 아닐까.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설명해대며 '10번 성채'로 불리는 그자는 테세우스 본래의 배일까 아닐까.플라스틱 땅에서 직조된 가짜 꽃들이 피는 거짓의 땅에서 살점은 금속, 뼈는 경첩과 강철판, 내장은 풀무와 같은 엔진이 된 자(들)의 반복적으로 재생산되는 무훈시 혹은 우화로 채워진 장대한 이야기. 이것은 거대한 시(詩)라고 할밖에.
일견 두 명의 탐정과 미스터리 요소를 넣었다는 것에서 과거 대히트했던 일본의 드라마 '트릭'을 떠올리게 하는_특히 양쪽 모두에 사이비 종교라는 키워드가 있다_독특한 맛의 작품. (물론 이쪽은 안락의자 탐정과 발로 뛰는 탐정의 콤비 플레이지만)건축가는 지휘자라는 표현이 있다. 그렇다면 악보와 연주는 도면과 건립으로 대체할 수 있을 거다. 집에는 보통 거주자를 보호할 의무가 주어지는 동시에 그 구조 또한 마땅히 원활한 기능을 해야할 텐데, 그렇지 못한 경우는 두 가지뿐이다. 건축가의 지휘 실력이 없거나, 아니면 의도성이 있거나.축적 혹은 요약. 집은 일단 만들어지면 쉬 바꿀 수 없으므로 주거자는 그곳에 신체와 물건들을 축적하고 요약해 집어넣는다. 소설에는 '의도된' 갖가지 도면의 어긋난 공간과 뒤틀린 구조를 활용한 '자기만의 집'이 구축되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집에는 누가 살고 있는가? 바로 '가족'이다.소설 속 집들은 아늑한 공간이 아니며 비바람으로부터 사람을 보호하는 기능 따위 저버린 지 오래로, 이 '이상한 집'들은 잔혹하고 징그러운 공간임에 틀림없다. 또한 우리는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과는 상대하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가족은 다르다. 같은 공간에서 삶을 공유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필부필부였을 이들의 악행. 곤혹스러울 만큼 감정을 건드리는 가족이라는 존재의 잔혹성. 집은 더 이상 안전한 곳이 아니고 가족은 화해할 수 없는 대상이 된다……. (파란만장한 생애의 여인도 있으니 소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또한 생각난다)11가지의 이야기를 만들고 그걸 다시 하나로 엮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순서가 바뀌어도 매한가지). 페이크 다큐멘터리(모큐멘터리)의 형태로_그게 아니더라도_이렇게까지 수준급의 소설을 썼다는 건, 우케쓰는 언젠간 튀어나올 송곳이었다는 얘기가 아닐까.출간순으로 <이상한 집>에 이어 <이상한 그림>이 나왔을 때 작가의 가파른 성장이 회자되곤 했다. 지금 <이상한 집 2>를 읽은 시점에서는, 그야말로 백공기예(百工技藝)의 집약이라는 표현밖에 떠오르지 않는다.추리/미스터리 소설의 밀실 살인 등에 이따금 삽입되곤 했던 건축물 평면도의 적극적 활용, 집과 가족이라는 평범한 요소. 이들을 섞어 작품으로 만든 작가도 대단하지만, 최초 그를 발굴해낸 눈 밝은 편집자 또한 수완가다. 그리고 감 좋은 독자는 이 책을 지나치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이 작품을 말하자니 호접지몽이 무색할 만큼 내가 뜬구름을 잡고 있는 것 같아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다. 솔직히 말해 도망치고 싶기도 한 것이 뜬구름을 잡는 건 내가 아니라 소설 쪽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인데, 더 정확히 말하자면 소설 속 인물들이 그렇다.최초, 무너진 종교 세력의 교주가 남긴 수첩이 있다. 그리고 이 기이한 힘을 지닌 수첩을 손에 쥔 인간은 본래의 자신이 아니게 되며, 이때부터 꿈을 꾸고, 타인의 꿈을 빼앗고, 본디 꿈이란 것이 있었는지조차 구분할 수 없는 삶을 살게 된다.만유인력은 / 끌어당기는 고독의 힘이다 / 우주는 일그러져 있다 / 그래서 모두가 서로를 찾는다…… 다니카와 슌타로의 시 '이십억 광년의 고독'의 일부로, '우주 속의 나'에 천착한 끈질김은 <드리머>에서도 그려진다. 꼭 소설이 저 교주의 수첩 위에 쓰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 만큼.
먼저, 허버트 조지 웰스가 있었다. <투명인간>과 <타임머신> 등을 쓴 그의 <모로 박사의 섬>도. 동물 생체실험의 고발과 서구의 제국주의를 비판했던 소설은 120여년 만에 <모로 박사의 딸>로 재탄생했는데, 여기에는 박사의 조수 몽고메리와 웰스의 작품에는 없었던 모로의 딸이 등장한다.자연은 도약하지 않는다고 했으나, 작중 모로 박사는 소위 다위니즘에서 '도약해' 프랑켄슈타인의 크리처 같은 동물인간들을 만들어낸다. 물론 말미에 가서는 그의 딸 카를로타의 표현대로 비참함과 고통만이 유산으로 남았지만. 그러나 이것이 끝인가. 고전의 변주라기엔 다소 맨송맨송하지 않나?여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쇠망치가 튀어나와 뒤통수를 가격한다. 망할, 이 정도라면 웰스도 만족하지 않을는지. 표면적으로 좋은 일이 일어나게 하기 위해 나쁜 짓을 하는 모로 박사처럼, 작가도 <모로 박사의 딸>에 나쁜 짓(!)을 잔뜩 해놓은 셈이다…….웰스의 소설을 먼저 읽은 뒤 펼쳐도 좋지만 그러지 않아도 별문제는 없다. 웰스는 배가 좌초되어 섬에 도착한 화자를 내세웠고, 이쪽은 박사의 딸 카를로타의 시선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일그러진 존재들'은 양쪽 모두 존재한다. 실험 대상인 동물인간? 아니, 그들과 정반대에 선 '인간 동물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