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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로 놀지 마 어른들아
구라치 준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5년 9월
평점 :
이 작가의 책은 처음 접하는데 첫 번째 단편 제목이 무려 '본격 오브 더 리빙 데드'. 좀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했지만 읽어보니 정말로 본격이었다. 그것도 좀비를 이용한 본격.
시작부터 예사롭지 않다고 여긴 것도 잠시, 수록작들을 차례차례 거치면서 이 생각은 확신으로 굳어졌다. '본격 오브 더 리빙 데드', '당황한 세 명의 범인 후보', '그것을 동반 자살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그리고 표제작 '시체로 놀지 마 어른들아'까지. 그야말로 "시체의, 시체에 의한, 시체를 위한" 작품집이다.
스티븐 킹은 자신의 책(<죽음의 무도> 황금가지, 2010)에 공포 영화에는 '좋은 죽음'과 '나쁜 죽음'이 있다고 썼다. 좋은 식사, 훌륭한 이탈리아 와인 한 병, 그리고 황홀한 섹스를 즐기며 지긋한 나이가 되어 침대 속에서 평화롭게 죽는 '좋은 죽음'과는 반대로 공포 영화가 '나쁜 죽음'이 주는 두려움을 이용해 최상의 결과를 획득한다고. 그렇다면 <시체로 놀지 마 어른들아>도 여기에 어느 정도 부합한다고 할 수 있겠으나 구라치 준은 공포보다는 미스터리 요소를 듬뿍 담아 으스스한 작품들을 써냈다.
특히 이게 정말 가능한 이야기일까 하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발상이 뛰어났던 '그것을 동반 자살이라고 불러야 하는가'는 책 제목처럼 '시체로 노는' 모습을 보여주고, '본격 오브 더 리빙 데드'에는 거기서 더 나아가 좀비가 등장한다. 시체를 넘어 좀비를 모델로 한 추리소설이라니, 기괴하기 짝이 없으면서도 유머러스하고 동시에 논리적이라서 재미없을 리가 없다고밖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사족이지만 '본격 오브 더 리빙 데드'야말로 발군의 아이디어가 빛을 발한 단편이라고 생각하는데, 시쳇말 — '시쳇말'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도 여기서는 좀 우스울 수 있지만, 시쳇말은 그 시대의 유행어라는 뜻으로 '시체(屍體)'와 다르게 '시체(時體)'라 쓴다 — 로 '사망 플래그'의 한 전형도 살짝 차용하고 있다. 참고로 세스 그레이엄 스미스의 <공포 영화 서바이벌 핸드북>에서는 공포 영화에서의 사망 플래그, 클리셰를 7가지로 정리한다. 의심, 남자다움, 독립심, 못생김, 호기심, 무책임, 카섹스. 하나같이 영화 속에서 죽음을 맞는 인물들의 특징이다)
옮긴이의 말마따나 '이 정도로 지적 유희가 담긴 놀이라면 시체로 논다기보다 시체로 마술을 부리는 셈'이지 않을까. 시체로 시작해서 시체로 끝나는 작품집은 보지도 들어보지도 못했다. 그리고 마지막 수록작이자 표제작인 '시체로 놀지 마 어른들아'는, 진상이 밝혀지는 것과 함께 안락의자 탐정이 줄곧 책을 읽는 우리와 같이 있었다는 뜻밖의 즐거움도 준다. 정말이지 단숨에 읽었다. 네 편의 시체 이야기… 라 하면 뜨악할 독자가 여럿이겠지만 <시체로 놀지 마 어른들아>는 추리/미스터리 소설집이지 호러에 속하지는 않는다. 그저 기이한 모습과 상황에서의 시체들이 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