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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어보지 말 것 - 미니어처 왕국 훔쳐보기
쓰네카와 고타로 지음 / 그늘 / 2025년 6월
평점 :
원제는 '모형 정원의 순례자들'. 내용은 한국어 번역 제목처럼 공포나 호러 분위기를 띠진 않는다. 상자 속 미니어처 정원을 들여다보며 관찰하는 것으로 첫 번째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이는 판타지 세계로의 진입이라 봐야하겠다.
수록작들에는 일종의 '도구' — 도라에몽의 도구처럼 — 가 등장한다. 영화 <맨 인 블랙>의 캐비닛 속 세상 같은 미니어처 세계가 펼쳐지는 상자, 시간을 이동하는 은시계, 일정 시간만 지속되는 접착제, AI 로봇 머리의 프로펠러…… 이런 도구들을 이용해 소설 속 세계가 비틀린다(단 이 방식이 모든 단편에 뚜렷이 적용되지는 않는다. 작가 본인이 이 소재를 포기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꽤 매력적인 것이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밀어붙였다면 보다 더 유기적인 재미가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각 이야기들은 현실에서 다른 세계를 경험하거나, 현실적이지 않은 인물이 살아가는 세계를 그리거나, 혹은 아예 본격적으로 판타지를 표방한다(한국판 제목처럼 첫 번째 단편의 주인공이 상자를 열지 않았더라면 이 모든 이야기는 없다).
그러면서 단편 사이마다 '이야기의 조각'이라는 이름의 브릿지(라는 표현이 어떨는지)랄까, 막간에 삽입된 짧은 이야기가 윤활유 역할을 하며 소설의 전체상을 그리는 데 도움을 준다. 그리고 그것들끼리도 서로 이어져 끝에 가서는 대단원의 막을 멋지게 닫을 수 있도록 소설 전체를 조율한다.
첫 이야기 '상자 속 왕국'에서 시작된, 상자 속 미니어처 세계로 들어간 어린 소녀로부터 촉발된 이후의 세월들, 은시계를 이용해 마음대로 시간을 이동하지만 그에 따른 대가가 있다는 듯 정체 모를 것들에 쫓기는 남매, 첫 번째 단편에 등장했던 인물의 자손이 발명한 기이한 물건, 이상하리만치 직감이 좋은 소년, 메모리만 이동하며 겉모습을 갈아치우는 AI 로봇…… 그리고 그 끝에 선 인류의 실패와 도전, 바로잡음, 다시 또 공존.
이 유구한 시간의 흐름은 결국 끊임없이 구르는 수레바퀴마냥 윤회의 그것을 표현하려는 것일까. 소설 말미의 맺음말로 보건대 작가의 또 다른 이야기가 준비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그러나) 그렇지 않아도 좋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환상적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