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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판박이
아베 코보 지음, 곽형덕 옮김 / 현대문학 / 2026년 9월
평점 :
_아베 코보 <인간 판박이>(현대문학, 2026)
"내가 걱정하는 것은 미지에 도전해 그것에 이름을 붙이는 쪽이었을 SF가 거꾸로 이름 붙여지는 쪽으로 돌아선 것이 아닌가 하는 (...) 탐험가에게만 갖춰져 있었을 그 정의하기 어려운 매력이 왠지 서커스의 사자처럼 돼버린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아베 코보)
아베 코보 하면 흔히 '가설(仮説)의 문학'이란 표현이 늘 따라다니는데— 비록 거짓의 논리라도 그 거짓만의 재미를 극한까지 파고들 것— SF보다 소위 '근대문학'이 더 특수한 것이 아닌가, SF적 발상은 그리스 이래의, 문학의 원류라고도 할 수 있다— 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모래의 여자>에서는 남의 사적 공간에 들어가고, <인간 판박이>에선 자신의 집에 이상한 남자를 들이고. 일단 비일상적 상황과 대상을 조우하면서, 동시에 '판박이'라는 것부터가 '인간이다'와 '인간은 아니지만 그와 비슷하다'를 가름하는 표현인 만큼 부조리한 코미디가 예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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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보통의 인간이 아닙니다. 화성인입니다 (...) 아무래도 지구는 화성보다 꽤 인력이 세서 우리 화성인은 바로 피곤해지니까요. 방에 가서 이야기해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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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코보의 작품을 읽다 보면 선견지명이라 해야 할까, 뭐 그런 부분들이 종종 눈에 띈다. 전화를 이용한 것도 영화 <매트릭스>에서 처음 보고 재미있는 아이디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인간 판박이>를 읽으면서 깜짝 놀랐다(지금으로부터 50년도 더 된 작품임).
사변소설이라든가 6, 70년대의 뉴웨이브를 들먹일 필요도 없이 아베 코보의 작품들— 특히 이 <인간 판박이>는 그 어느 시대에 올려 놓는다 한들 독자가 이리저리 내둘릴 수밖에 없는, 그러면서 묘하게 설득되면서도 딱히 SF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이 특징.
작품에서 토폴로지, 위상수학 이러쿵저러쿵하고 있지만 단순히 말해 전혀 다른 것들이 같은 성질, 같은 개념, 그러니까 결국 동일해진다는 것— 도넛과 손잡이 달린 컵은 동일한 것이다, 라는 논리를 통해 '우화(寓話) = 실화(實話)', '지구인 = 화성인', 고로 '인간 = 인간'이라는 걸 말하고 있다.
어느 날 자신이 화성인이라 주장하는 사람이 집으로 들이닥쳐 그의 말을 주의 깊게 듣던 화자가 점차 기묘한 논리에 설득당하고 만다는 것이 얼개인데, 이 길고 긴 대화가 그야말로 압권이다. 작품 전체가 시종일관 이 둘의 대화로만 이루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어서 머리가 띵할 정도.
결국 작가가 말한 가설, 이것으로 인해 일상성과 비일상성이 양립하고 겹쳐지게 되며 종국에는 동일한 것이 되어서 증명 따위는 필요 없어져 버린다. 부등호가 등호로, 이윽고 등호조차 없어지고 마는 것인데, 책을 읽어보면 위에서 언급한 이 부조리의 코미디가 처음부터 끝까지 빛을 발한다.
난해하면서도 뚜렷하고 SF적이면서도 그렇지 않은— <인간 판박이>가 지향하는, 그리고 아베 코보가 줄곧 표명했던 문학관과 인간관을 가벼운 필치로 그려냈지만 내용만큼은 가벼이 보아 넘길 수 없는 이 기이한 작품을 다 읽고 나니 후련하기가 그지없다. 모쪼록 일독을 권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