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대중문화 표류기
김봉석 지음 / 북극곰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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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한 개마다 책이나 영화를 추억하는 김봉석의 이야기ㅡ 무턱대고 쌈마이스럽거나(덜 유치하게 표현해 B급에 가깝거나) 순간순간의 소비적 오락에 취해 진득하니 표류하거나. 그는 사춘기 시절 강해지고 싶다는 이유와 함께 자연스레 접하게 된 이소룡, 성룡, 이연걸을 꼽는데, 미안하지만 난 그쪽보다 헤싱헤싱한 적룡이 등장하는 《영웅본색》을 더 좋아한다. 기억할 수 있는 한 그 영화를 열 번 이상 보았고,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 말하면 도합 서른 번 이상 본 셈이다. 죠스바 국물 뚝뚝 떨어지는 피 칠갑의 면상과 괜히 어깨에 힘주게 되는 멋진 대사들을 따라올 영화는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물론 이소룡 쪽을 평가 절하하는 것은 아니다. 무시무시한 갈고리와 맞짱을 뜨는 《용쟁호투》의 일명 '거울 신', 《사망유희》의 허위허위 잘도 싸웠던 꺽다리 흑인, 어느 것 하나 빼놓을 수 없으며, 명절만 되면 죽지도 않고 찾아오는 성룡도 싫지 않다. 그럼에도 나는 늘 주윤발의 성냥개비 속에 표류해있었다. ……아니, 그래서 어쩌라고? 이렇게 나온다면 할 말은 없겠지, 나나 김봉석이나. 하지만 『나의 대중문화 표류기』는 '그래서 이러이러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땐 그래서 그랬(을 거)다' 하고 말한다. 솔직히 말해 김봉석이 팀 버튼의 영화 중 《배트맨 2》를 가장 좋아하든 말든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나? 물론 나도 배트맨 시리즈 중에서 마이클 키튼과 대니 드비토의 그 영화를 가장 좋아하긴 하지만(왠지 조커보단 펭귄 쪽이 더 좋다). 그런가하면 학생운동 시절을 겪은 그가 하루키의 와타나베(『노르웨이의 숲』)를 떠올리는 것 또한 나와는 별상관이 없다. 그러나 세대는 다소 다를지라도 같은 8, 90년대를 보냈다는 점에서 심한 동질감을 느낀다(재미있는 부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곳도 있어서 책장을 훌쩍 건너뛸 수 있는 선택의 기회도 주고 있다). 그런데 대체 나는 그 당시에 뭘 하고 있었을까? 보물섬, 만화왕국, 점프를 읽고 다이 하드나 리썰 웨폰 유의 영화를 보고 맥스, 나우로 대변되는 팝 일반을 들었다. 아버지의 쌈짓돈으로부터 얻은 마이마이에 카세트테이프를 넣어 들으면서 오토리버스의 신통방통한 기능에 혀를 내둘렀고, 게임보이를 이용하거나 오락실에 가서 줄기차게 캐딜락(본래 이름은 '캐딜락 앤 다이너소어')을 해댔으며, 문방구에서 파는 농구대잔치 스티커를 종류별로 모으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가하면 인조인간 18호의 가족애에 감동하기도 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말대로 결코 시간은 멈춰지지 않을 거다ㅡ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저 옛날 기억을 끄집어내 떠벌리고픈 욕구는 더욱더 강해진다. 쓸모없는 것의 쓸모라고는 말하고 싶지 않고, 다만 그 시절 우리가 열광하고 마음을 주었던 것들에 대한 소박하고도 거창한 소회 정도라고 보면 될 듯싶다. 인간 김봉석이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말하고 있긴 하지만 동시에 내가 지내 온 것들에 대한 경이로운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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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卍).시게모토 소장의 어머니 (무선)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김춘미.이호철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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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로 다니자키의 작품을 접한 것은 대학을 다닐 때였다. 주제에 일문학을 전공했던 터라 이것저것 주워서도 읽고 강의를 들으면서도 나름대로 접한 것들이 몇몇 있었는데, 그의 단편 「문신」을 처음 원서로 읽었을 땐 단박에 '무언가에 홀린 자'의 글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내용은 별것 없다. 그것은 미녀의 몸에 문신을 새겨 넣는 것을 꿈꾸는 문신사의 이야기였고, 분량도 매우 짧아 순식간에 읽기를 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외려 문신을 해 받는 입장보다는 바늘을 쥐고 있는 문신 도안가들이야말로 그 순간 일종의 황홀경에 들어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자 작품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벌떡벌떡 뛰는 심장을 가지고 살아있는 사람 거죽에 마음껏 손을 노리는 자들, 그들이야말로 환상적인 직업군에 속하는 전능한 실력자라고 말이다. 보라, 저 유명한 곰브리치가 쓴 유익한 미술책의 서론도 이런 두 문장으로 시작하고 있다. 「미술[art]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러한 미술가들이 공공의 미(美)라는 틀 속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니자키가 공공의 미나 선(善)을 지향했을지 어땠을지는 나로서는 상관없는 일이지만, 엄중히 선발된 도안을 대동하고 나타나는 실무자, 유희의 통솔인, 수요자에게 은밀함을 꾸며주는 판타지의 생활인이라는 측면에서라면 그 역시 문신사 세이키치(「문신」에 등장한다)와 다를 바가 없을 것만 같다. 평생 여자에 심취해 '우러러볼 만한 존재가 아니면 여자로 보지 않는다'고 했던 다니자키 작품의 일관성은 세간에서 악마나 탐미 등의 단어를 붙여 부르기는 하나, 그럼에도(무엇보다) 그의 소설들은 하나같이 높은 수준의 재미가 있다. 때로는 통속적이라는 둥 저속하다는 둥 다니자키(와 그의 작품들)를 낮추어 보려는 자들도 있긴 한데, 엄밀히 말하자면 '재미'라는 단어조차도 종종 그것을 비하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사용하기도 하니 어찌 보면 다니자키는 그저 그렇게 살 팔자였나 보다. 하지만 나는 본격적으로 인간의 본질이 어쩌고저쩌고, 내면세계가 이러쿵저러쿵, 사람 하나를 잡아가지곤 신랄하게 까뒤집으면서, 이를테면 조무래기 사기꾼들이 등장하고 쓰레기 같은 자들이 나와서 더러운 짓을 하는데, 아니면 비쩍 마른 주인공이 날이면 날마다 삶이 이렇고 인생이 저렇고 떠들어대는 소설, 이런 소설들만을 자랑스러워하며 떠벌릴 계제는 아니라고 본다. 모든 사물과 사건에 귀천과 경중이 없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다소 편애의 감정을 실어 말하자면) 에로티시즘과 같은 특정 방식을 통해 다니자키와 다른 작가들을 구분 짓는 것에는 도통 손을 들어줄 수가 없다ㅡ 그의 사생활을 찬양하고 싶지는 않으나 작품 일반에 관해서만큼은 그런 생각이다. 여자라는 존재에 미쳐 자신의 눈을 찌르고, 발가락을 물고 빨고, 제 아내를 타인에게 내주는 이야기(실제 작가 본인도 그랬다)는 무분별한 환상이 아닐는지도 모르며, 작품 이력 전체를 통틀어 하나의 주제만을 좇아 악마가 될 수 있는 자는 흔하지 않다. 아니, 거의 없다. 지금 문득 손에 잡히지 않는 세상과 죽음이라는 것에 눈을 돌렸던 다자이 오사무가 떠오르는데, 최근 그의 국내 번역 전집이 완간된 참이다, 하여 이 미친 듯한 자의 미칠 듯한 작품들도 한데 모아 정리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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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기다리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 / 민음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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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이 늘어난 용수철 같다. 아니면 황당할 정도로 무뎌져 쓸모없게 돼버린 날붙이이거나. 보이지 않는 거센 공기는 가까이 오는 자를 멀리 보내고 멀리 있는 자를 이쪽으로 떠밀며 그런 식으로 이리저리 찢기다간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는데, 베케트가 무슨 술수를 부렸든 간에 바둑판 위 인간들은 제 발이 잘못됐는데도 구두 탓만 하게 된다(블라디미르의 대사). 처음부터 얻어맞은 채 등장하는 에스트라공은 누군가에게 당했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블라디미르는 모자를 만지고 두드리는 데 혈안이 되어 있으며, 럭키의 목줄을 쥔 포조는 2막 이후 왜인지 장님이 되어 이번엔 럭키에게 이끌려 다니는 신세가 되는데다가, 단 두 번의 대사밖엔 없지만 '생각해!'라는 명령에 따라 무자비한 일장연설을 늘어놓는 럭키 그리고 대뜸 등장해 변죽만 울리는 소년은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것인지 아닌지도 모를 괴상한 소리만 하고 사라진다. 인물들은 왜 어쩔 수 없이 당하는 것처럼 스스로의 정신상태를 혼란스레 가져가는가? 그들은 왜 맷집을 뽐내며 떠들썩하게 연좌시위를 하고 있는가? 끝내는 험상궂은 몰매를 맞고 비틀린 미소를 짓게 될 뿐인데도 말이다. 원인은 베케트가 (고도로 하여금) 문제만 내놓은 채 해결책 없이 사라진 탓으로, 같은 대사와 같은 상황이 반복되어 더치고 더칠수록 이 희곡은 점점 비극적으로 보이기만 한다. 더욱이 작품의 맨 마지막은 '그럼 갈까' 하고 블라디미르가 묻고 '가자' 하며 에스트라공이 대답하는 것으로 끝난다. 여기에는 지문이 하나 붙어 있는데 바로 <둘은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다>이다. 가려 하지만 실제로는 움직이지 않는 거다. 그런가하면 1막에서 생각하라는 포조의 명령에 맞추어 말을 쏟아내기 시작한 럭키는 쉬지 않고 단어들을 나열하기 시작하는데, 포조는 그의 모자를 빼앗아 바닥에 내던지고 짓밟은 뒤 '이래야 다시는 생각을 못하지!'라며 분통을 터뜨린다ㅡ[생각해! vs 생각하지 마!] 도대체가 이쪽에 귀를 대면서도 저쪽을 바라보고, 저쪽의 것에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정작 이편에 있는 것엔 무관심한 작자들이다. 하지만 그들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 바로 인간이 그렇기 때문이며, 그런 까닭에서라도 저질스러운 정답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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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럼 다이어리
에마 치체스터 클락 지음, 이정지 옮김 / 비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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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결심. 하나, 용감해지기. 둘, 고양이 잡기. 셋, 여우 쫓기. 넷, 새로 산 장난감 망가뜨리지 않기. 다섯, 매일 밤 그들의 침대에서 함께 자기. 한 해가 지날 때쯤이면 이중 몇 가지나 이루어졌을까 하고 생각하기에 앞서, 대체 이런 계획을 세운 자가 누구일까 하는 것이 궁금해진다. 이 황당무계하고 재미있는 결심을 한 주인공은 플럼이라는 이름의 개로, 『플럼 다이어리』는 시작부터 끝까지 플럼의 이야기로 진행된다. 「지난 일 년 동안 꾸준히 일기를 썼어요. 에마가 그림으로 살짝 도와주기는 했는데, 글은 전부 제가 쓴 거예요.」 책은 이런 말로 시작해 플럼의 소소한 생활을 그려낸다. 일전에 『콩고양이』라는 책에서 고양이를 보았는데 이번엔 개라니, 어지간히 개를 싫어하는 나로서도(뚜렷한 이유는 없는데 왜 그런지는 나도 모르겠다) 이렇게 그림으로 그려놓으니 거듭 개를 들여놓고 싶다는 생각이 엄청나게 밀려온다(사실 『콩고양이』 때도 그랬지……). 어쨌든 개의 시선으로 그린 작품이긴 하나, 어느 책이든 안 그러겠는가, 시작은 인간으로부터 시작된다. <동물의 왕국>에 더빙되는 어울리지도 않는 사람의 음성처럼 말이다. 그러니까 사람의 시선으로 본 개의 시선으로 본 사람의 모습…… 무슨 말인지 나도 모르겠지만 하여간 『플럼 다이어리』는 동물의 이야기이자 사람의 이야기다. 개가 인간을 어떻게 바라볼까 하는 생각은 작가의 그것과 더불어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방식 그리고 개의 습성과 행동에서 유추한 상상력의 산물로 이어지는데, 도대체가 우리 곁에 있는 동물들이 과연 실제로 이런 식의 사고방식 속에서 살고 있을까 ㅡ 자신과 동거하는 사람의 감정을 어느 정도는 읽을 수 있으리란 생각은 들지만 ㅡ 하는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곤 한다. 「리피(플럼의 여동생, 역시 개다)와 함꼐 다닐 때면 사람들이 이렇게 묻곤 한다. "어떻게 둘을 구별해요?" 그러면 에마는 대답한다. "음…… 리피가 조금 더 작고, 털에 윤기가 더 돌고……." 하지만 내 생각에 우리 둘의 차이는 그런 게 아니다. 리피는 시키는 대로 하는 착한 개이고, 나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개다. 그게 우리 둘의 차이다.」 자신을 가리켜 말을 잘 듣지 않는 개라니, 나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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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춤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1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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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된 일인지 온다 리쿠의 작품을 제대로 읽은 적이 별로 없다. 국내에 번역된 작품이 꽤 되는데도 지금껏 장편소설 두어 편 정도만 읽었을 뿐이다. 이런 와중에 단편집 『나와 춤을』은 그간 그녀의 작품 세계가 어떤 식으로 발현되었는지를 다소나마 요약, 압축해준다(실은 더 확장성을 띠고 있을는지도 모르겠지만). 「산책 중이던 고양이가 낮잠을 자는 내 머리를 밟고 지나가려다가 내 왼쪽 귓구멍 속에 빠졌다.」(이유) 「조그만 분홍 별을 살며시 입에 넣었다. 은은한 단맛과 함께 하나의 우주가 입안에서 팡 터졌다.」(도쿄의 일기) 독특한 판타지 풍 문장이 뒤섞인 이야기들은 때론 어처구니없게 때로는 교묘한 감수성을 드러낸다. 특히 책 뒤쪽으로 갈수록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는 더욱더 희미해지는데,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엉뚱함과 한데 뒹굴며 멋진 환상세계를 구축한다(하루키 식 단편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 사라진 동료를 구하기 위해 운명의 변심을 막으려 고군분투하는가 싶다가도 양자택일과 주사위를 엮은 이상야릇한 이야기가 펼쳐지는가하면 강아지는 주인을 위해 떠듬떠듬 편지를 쓰고 사람의 귓속엔 고양이가 빠진다. 단편집에 실린 작품들은 하나같이 묘한 비현실에서 착안한 있음직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차라리 그 건너편에 서 있다. 환상을 현실로 가져오는가 싶었는데 곧바로 현실이 환상으로 변모해버리는 식이다. 개인적으론 이야기에 힘이 있다기보다 그 힘을 물렁물렁하게 반죽해 죽죽 펴낸 느낌이라고 말하고 싶다(비아냥대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칭찬에 가까운 것이, 『나와 춤을』을 통해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그녀의 장편을 읽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넓게 펴진 반죽을 조각내 썰어 빚은 것이 바로 이 단편집이라고 말이다. 개중에는 도대체 어째서 이 부분을 마무리 짓지 않고 끝내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드는 작품도 있었다. 이제 막 흥미진진해지려는데 왜 그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는 거지, 하고. 그리고 단편집 전체를 다 읽고 나니 모든 작품에서 그런 기분을 느꼈다는 것을 알았다. 왜일까. 지금 나는 완결이지만 미완의, 미완성의 현실이지만 완성된 판타지의 택일할 수 없는 교차점에 서 있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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