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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미주의 선언 - 좋은 삶은 어떻게 가능한가?
문광훈 지음 / 김영사 / 2015년 2월
평점 :
프롤로그엔 총 네 개의 자화상이 등장한다. 죠르죠네의 삐딱한 고개, 뒤러의 정면 응시, 로사의 앙다문 입술, 앙소르의 괴물들. 특히 마지막 앙소르의 자화상에는 다종다양한 '것'들이 나오는데 그 기괴한 괴물, 좀비, 해골, 시체, 인간들은 '멀쩡한 앙소르'를 겁먹게 하지 못하며, 멋진 붉은 모자를 쓴 그는 종국엔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과 동일시된다. 살아있는 인간의 피로 연명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자화상의 주인공은 죽어서도 죽지 않는 좀비나 흡혈귀와도 같다. 나ㅡ앙소르ㅡ그들은 거울, 성수(聖水), 십자가나 마늘 같은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저들의 두려움은 승진, 실패, 잔고 액수, 자동차, 실직(失職), 안락한 집에 있다. 때문에 문광훈에 의하면 인간은 똥파리처럼 죽는다. 스스로의 생활을 만들지 못하고 자신의 색채를 찾지 못한다면, 이라는 전제가 붙어있긴 하나, 그의 말대로 끝내 영원히 이 세계에서 똥파리처럼 죽어갈 공산이 클 것이다. 공공의 미덕이라는 측면에서 인간의 예술 체험이 자발적 발의와 사유를 촉발하지 못한다면 더욱 그렇다. 예술의 진정성이라. 글쎄. 아름다움이 내가 보고 만질 수 있게끔 경험적 산물로써 작용해야 하건만 그 고유하고 일관된(현대사회에서) 방식이 아름다움 자체로 현현되기까지의 시간과 간극을 어떻게 메운다는 건가? 항거의 발현이라는 것이 규범 일탈로 정의되지 않고 예술생산 본연의 가치를 드러내는 경우가 얼마나 가능할 것인가? 결국 나ㅡ앙소르ㅡ우리가 주체를 이해하고 연마해, 자신과 예술 발현의 관계를 개선해나갈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관건이 될 것이다. 더군다나 규범의 틀 속에서가 아닌 나 스스로 즐겁고 기꺼워하는 상태에서 말이다.
자유롭다는 건 쾌락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자신의 충동과 욕망에 봉사하지 않는다는 의미인가? 그것도 욕망 자체를 없애려 해서도 안 되고 욕망에 충실하지 않으려는 자세도 아닌 유의미한 가능성 속에서? 당연히 자발적 절제와 분별은 우리 정신의 격려와 고취를 가능케 한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가 다소 답답할 수도 있는 것은, 저자의 아내가 토로했던 점과도 일견 맞닿아 있는데, 그것은 미덕이라 부를 수 있는 아름다움이 곧 행복이며 그 아름다움이란 선하고 올바른 것이어야 한다는 추론이 가능한 상태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까닭이다. 이 대목에서 살짝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왜냐. 바로 문광훈 자신도 당당히 털어놓지 않았던가? 인간은 똥파리처럼 죽는다고 말이다. 물론 이 문장으로 하여금 똥파리처럼 죽지 않기 위해 이러이러한 논의를 하고 체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라고는 해도, 이것을 공론장 한가운데로 들이밀기엔 얼마간의 어려움이 보인다. 그것은 인식 전환과 실천의 문제이며 변화의 핵심이어야 할 나 자신조차도 지독히 사회화되었기 때문에 더욱 어려운 일이다. 나ㅡ앙소르ㅡ우리는 이러한 '사회화된 존재'로부터 교정될 수 없을 것만 같아서, 때때로 심미적 소통은커녕 심미적 고통마저 느껴지기도 한다. 아이리시의 젊은 헨더슨이 아무리 그 여성을 찾아 헤맨다손 치더라도 끝끝내 환상에 불과했던 것처럼. 그럼 대체 뭐가 문제인가? 바로 현실에서 일정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느냐다. 동시에 이 명제는 참으로 얄궂은 것이어서, 현실의 나ㅡ예술ㅡ심미의 경험ㅡ아름다움이 반드시 현실적인 것이어야만 하는가, 하는 명제와도 상충하게 된다. 성공하기 전부터 이미 실패한 상태이고, 실패하기 전에 미리 성공의 달큼함을 맛본 정말이지 우스꽝스러운 상황이다. 그러나 독자 된 입장인 내가 이 대결 구도에서 갈팡질팡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실은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인데(그럴 마음도 들지 않는다), 엄숙한 고담준론의 보편성을 압도할 재간이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인정과 부정 사이에서 멀거니 고민하기에 앞서 저자가 먼저 나서서 고민해주고 있으므로 그렇다. 그러니 일단 귀 기울여 들어보자. 심미주의를 선언하는 일이 가능한 것인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