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난민 - 꿈을 이룰 수 없는 시대에 꿈을 강요당하는 젊은이들
후루이치 노리토시 지음, 혼다 유키 해설, 이언숙 옮김 / 민음사 / 2016년 3월
평점 :
절판


  "어서 오세요. 희망 찾기 유령선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책을 중간쯤 읽었을 때 나도 모르게 내 귀에 이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참 무서운 말이다. 처음 이 책을 구입했을 때 희망 난민이라는 제목을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힘겨운 생호라 여건 속에서 난민처럼 떠도는 사람"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책을 다 읽고 난 다음에 저자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니 그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사회는 우리에게 희망을 말하고, 희망을 품으라고 말하고, 많은 젊은이들이 희망을 찾아 이리저리 떠돌고 있다는, 그래서 차라리 희망을 포기하도록 단념시켜야 한다는 말이다. 내 생각과는 정반대의 이야기였다.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의 저자답게 저자는 희망을 단념하고 현실에 안주하며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젊은이들에 대해서 생동감 있게 보여주고 있다.


  세계 평화라는 거창한 주제로 출항하는 피스보트! 이 여행을 통하여 무엇인가 삶에 변화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젊은이들! 100일이 넘는 여행기간 내내 가장 적극적으로 헌법9조와 난민 문제, 평화 헌법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던 젊은이들! 여행이 끝난 후 무엇인가를 얻었다고 생각했던 젊은이들조차도 시간이 지나면서 평화, 난민과 같은 문제들은 그들의 머리 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다만 그들의 삶을 채운 것은 피스 보트를 통해 맺게 된 인간관계!


  무엇인가 비틀린 것 같은 기묘한 현실을 저자는 공동체성과 목적성을 가지고 설명한다. 세계 평화라는 목적성이 휘발되어 버리고 피스 보트 참가자라는 공동체성에 천착하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공동체성이라는 것도 서서히 사라져 버릴 것이지만 그래도 이들이 현실에 그런대로 만족하고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자신들의 존재를 받아들여주는 승인 공동체가 아니겠는가? 차라리 어설픈 희망을 주지 말고 이렇게 공동체성이라는 것으로 살아간다면 젊은이들에게 이 또한 행복을 줄 수 있지 않겠는가? 사회 변화라는 것은 가끔 나타나는 깨시민 엘리트들에게 맡겨두고 말이다. 나는 저자의 이 말을 역설로 받아들여야할 지 아니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냥 내가 오해한 것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책을 덮으며 문득 그런 생각을 해본다. 한국이라는 나라 전체가 피스보트와 같다는 생각말이다. 희망을 찾기 위해 시작했지만, 몇번의 냉각기를 거쳐서 목적은 읽어버리고 그저 공동체성에 천착하면서 안심하는 그런...광화문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박근혜 대통령 하야를 외친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몇년 전에는 광우병 때문에 이명박 하야를 외쳤다. 명박 산성이 등장했고, 대통령은 청와대 뒷산에 올라서 반성을 하면서 아침이슬을 불렀단다.(내가 보기엔 아침이슬을 드신 것 같지만. 물론 장로님이라 그렇지는 않았겠지...) 세월호 사건 때에도 광화문에, 시청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릴레이 단식도 했다. 그런데...뭐가 달라졌지? 많은 사람들이 나오지만 실제로 달라지는 것은 없다. 왜? 궁금했다. 물론 집회에 참여하지 않고 그저 관찰만하고 있는 나를 비겁하다고, 그런말 할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왜 달라지지 않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이 책에서 찾았다. 목적성의 휘발과 느슨한 공동체성이 그 이유이다. 지금 광화문에는 박근혜 하야라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광화문에 모인다. 그들은 연대 의식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우리는 동지이다. 몇번 이러한 일이 반복된다. 그러면 묘하게 연대 의식만 남고 박근혜 하야라는 목적성은 휘발되어 버린다. 부글부글하던 마음이 냉각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몇번 반복되면 이젠 냉각되지 않는 이들을 향하여 외친다. "단념해. 희망은 없어. 파랑새는 죽었어." 세월호가 지겹다는 사람들이 대표적이다.


  그렇다면 저자말대로 세상을 바꿀 엘리트, 깨시민들은? 없다. 정치 지도자라는 사람들, 그들은 아예 뜨거워지지도 않는다. 그들의 목적은 다른데 있다. 같은 공동체성도 없고,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기에 아예 다른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박근혜 하야를 외치면서도 총리 임명권 줄께라는 말에 신중을 기하는 야당 정치인들을 보면 무슨 말인지 알 것이다.


  희망은 없다. 그런데도 사회는 희망이 있다는 환상을 준다. 이런 희망고문을 멈추라고 한다. 파랑새는 죽었다. 그런데 이대로 끝내도 되는가? 희망이 없다고 단념하고, 느슨한 공동체성에 천착하면 되는가? 나는 혼자가 아니야, 누군가 나와 비슷한 사람들, 나를 용인시켜줄 사람들이 있다는 안도감에 위안을 느끼면 되는가? 나는 이것이 더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저자의 의도가 무엇인기 알겠지만 그래도 난 해설과 반론의 혼다 유키의 입장, 그래도 목적성을 포기할 수 없다는 말에 더 깊은 인상을 받았다.


  책을 읽은 후의 상념이 사라지기 전에 두서 없이 적어봤다. 나중에 이 책을 다시 곱씹어보면 생각이 좀더 정리가 되겠지만, 내 성격상 지금 적지 않으면 언제 적을지 모르기에 급하게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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