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ㆍ서양의 묵직한 철학 미학 역사 신화류가 나란히 본심에 올랐다. 역사의 이면을 고찰함으로써 근ㆍ현세사의 비의를 탐구하는, 비교적 근년의 노작들도 고전의 반열에 든 여러 작품들과 경합하게 됐다.
이들 책은 대부분 원전의 방대한 분량과 광범위한 영역, 난해한 내용 등으로 출판사나 역자들이 좀처럼 손을 댈 엄두를 내지 못하던 것들이었다는 평이다.
그만큼 해당 분야 전문가들이 길게는 10여년, 짧게는 수 년에 걸쳐 이뤄낸 노작들이다. 해서, 번역의 문장이며 정돈된 내용, 깊이 등 면에서 어느 책 하나 빠지는 것 없이 원전의 중량감을 너끈히 받히고 있다는 평이다. 출판대상의 여느 심사부문 못지않게 치열한 경합이 예상된다.
▲ 희망의 원리 / 에른스트 블로흐 지음
마르크시즘적 비판적 세계관과 메시아적 희망을 접목시킨 당대의 석학 에른스트 블로흐의 대작. 1949년에 완성된 그의 저술은 1만3,000매에 이르는 원고 분량 못지않게 신비롭고 난해한 내용 때문에 55년이 지난 최근까지 그 의미가 완전히 해석되지 않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저자의 평생의 사유가 집약된 이 책은 네오마르크시즘과 신학, 문학, 음악학 등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분야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으며, ‘탈근대 이후’를 사유하려는 철학자들에게도 새로운 가능성의 사상으로 중요시되고 있다. 소수의 몇몇 국가에서만 번역되었던 이 책이 우리 글로 번역돼 나온 것은 한신대 교수인 번역자의, 연구를 병행한 10여 년의 작업으로 가능했다. 박설호 옮김. 열린책들 발행.
▲ 빈 서판 / 스티븐 핑커 지음
하버드대의 저명 언어심리학자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저자는 이 책에서 인간 본성에 대한 아이디어와 그것의 도덕적 감정적 정치적 특성을 탐구하고 있다.
그는 많은 지식인들이 ‘빈 서판(마음은 타고난 특성이 없다)’ ‘고상한 야만인(인간은 선하게 태어나지만 사회 속에서 타락한다)’ ‘기계 속의 유령(우리 각자는 생물학적 제한과 상관없는 선택을 하는 영혼을 지니고 있다)’이라는 세 도그마를 옹호함으로써 인간 본성의 존재를 부정했는지 규명하고 있다.
재미있는 카툰을 삽입해 난해한 주제와 내용을 상식 수준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으며, 세계 명작동화나 시 영화 등을 다양하게 활용, 평이한 설명으로 독자들의 흥미와 이해를 돕고 있다. 김한영 옮김. 사이언스북스 발행.
▲ 만들어진 전통 / 에릭 홉스봄 등 지음
영국 엘리자베스2세가 고색창연한 마차를 타고 의회 개원을 위해 웨스트민스터로 향하는 모습을 두고 각종 매스컴은 ‘천년의 전통’을 선전하지만 실은 이 ‘전통’이 19세기 후반에야 ‘만들어진’ 것임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스코틀랜드를 상징하는 각양각색 격자무늬 천의 킬트 역시 실제로는 18~19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저자는 누구나 믿었던 것의 실체와, 역사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관점 및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은 오랜 전통의 허상을 까발림과 동시에 국가의식이나 민족주의가 근대의 산물임을 실증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책이 출간된 이래 ‘전통의 창조’와 ‘만들어진 전통’이라는 용어가 유행어가 될 정도로 이 책은 사회인류학과 문학 등 인접 학문분야 연구에 촉매 역할을 했다. 박지향 장문석 옮김. 휴머니스트 발행.
▲ 대한계년사 / 정교 지음
갑오개혁을 통해 스스로의 근대화를 이루려 했던 1894년부터 국권상실에 이른 1910년까지 대한제국 말기의 역사를 집중적으로 기록한 책이다. 저자인 정교는 수원판관 장연군수 중추원의관 등을 거쳐 독립협회 간부로 활동한 인물. 그는 당시 사회와 문화 전반에 걸쳐 일어난 시대의 격변을 관보와 각종 신문 등 자료를 인용하고 자신과 의견이 다른 상소나 주장을 함께 싣는 방식으로 성실히 기록했다.
책은 순 한문 강목체(주제별 분류)로 서술됐다. 각종 외교문서와 상소문 공문서 등 다양한 문체가 등장해 번역을 맡은 학자들이 4년여 동안 해독에 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 결과 방대한 책의 내용은 쉽고 정확한 우리말로 옮겨졌고, 용어나 인물 사건 등에 대한 상세한 주석도 활용할 수 있게 됐다. . 조광 변주승 이철성 김우철 이상식 옮김. 소명출판 발행.
▲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주지하듯 ‘왕오천축국전’은 현존 최고의 우리 책이자 8세기 인도와 중앙아시아에 대한 유일한 기록이다. 신라 승려 혜초가 인도를 포함,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다니며 보고 들은 이야기로 된 ‘왕오천축국전’은 한자 6,000자에 10쪽의 단출한 분량이지만 역주자는 이를 400쪽에 이르는 상세한 주석과 해제를 달아 일반인들이 읽고 이해하기 쉽게 배려했다.
책에는 죄를 지어도 돈으로 벌금만 내면 해결되던 천축국의 이야기 등 당시 중앙아시아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고 있고, 이역에서 쓸쓸한 밤을 보내는 혜초의 심정을 담은 그의 시도 실려있다.
역주자는 혜초가 언급한 나라들의 왕조사와 문명사, 그리고 현재 그 곳이 어떤 지역인지까지 확인하는 성과를 이 책에 담고 있다. 정수일 역주. 학고재 발행.
▲ 에다
‘에다’는 북유럽 게르만 민족의 신화집이다. 이 책에 담긴 창세신화와 신들의 이야기는 게르만족 공통의 신화를 대변하는 것으로 인정된다.
‘에다’에는 800~1200년 사이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운문체의 고(古)에다와 이를 토대로 1220년경 저술된 산문본 ‘신(新)에다’가 있으며 현존 필사본 ‘고 에다’는 1270년경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은 기존의 ‘신 에다’본 번역서와 달리 ‘고 에다(카를 짐록 번역본(1882)’를 원전으로 채택해 번역됐다.
‘고 에다’는 ‘신들의 노래’와 ‘영웅들의 노래’로 구성돼 있으며 두 부분은 주제면에서 밀접하게 연관돼 일체를 이룬다. 후반부 영웅시가의 핵심을 이루는 ‘지크프리트’ 전설이 독일 중세 영웅서사시의 금자탑인 ‘니벨룽겐의 노래’의 소재로 쓰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임한순 최윤영 김길웅 옮김. 서울대출판부 발행.
▲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 / 수잔 벅 모스 지음
‘파사젠베르크’로도 알려진 이 책은 벤야민이 13년간 준비했으나 비극적으로 자살함으로써 완성하지 못한 미완의 메모를 토대로 프랑크푸르트학파 연구가인 저자가 창조적으로 재구성한 역작. 1948년 이들 자료를 검토한 아도르노가 “파사젠베르크의 재구성은 만약 그것이 도대체 가능한 것이라면 오직 벤야민만이 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말을 할 정도로 난해하고 방대하다. 총 7권짜리 벤야민 ‘전집’중 미완성 유고를 묶은 5,6권 가운데 5권이 이 책이다.
그가 남긴 메모 묶음과 개요를 정리한 책은 22개 대항목의 어마어마한 메모와 논평 묶음, 두 편의 보들레르 연구서 등으로 구성됐다. 파사젠르크란 19세기 프랑스 파리에 처음 생겨난 회랑식 상가(파사주)에 어원을 두고 있다. 김정아 옮김. 문학동네 발행.
▲ 근사록집해 / 주희ㆍ여조겸 편저, 엽채 집해
‘근사록’은 중국 송(宋) 효종 2년 두 편저자가 송대 성리학의 선도자인 주돈이 정호 정이 장재의 저술을 읽고 그 가운데 학문적이면서 일상생활에 절실한 글들을 채록, 초학자들을 위해 11776년 편한 입문서. 이를 주희가 죽은 지 48년째 되던 해인 1248년, 주희의 제자인 진순에게서 배운 엽채가 주석을 단 것이 ‘근사록집해’다.
여러 주해서들이 있으나 국내 학자들이 가장 중요시하는 책이기도 하다. 성리학을 공허한 고담준론이 아닌 일상적 삶의 도리로 익힐 수 있는 학문으로 자리잡게 한 이 책은 총 14장으로 이뤄졌으며, 성리학의 근본, 학문의 자세, 수양의 방법, 정치와 교육 등 일상의 바른 생활법을 가르치고 있다. 역주자는 거기에 상세한 해제와 주석을 달고 용어를 풀어 정리했다. 이광호 역주. 아카넷 발행.
▲ 그리스 로마 신화 사전 / 피에르 그리말 지음
1951년 프랑스에서 출간된 이래 그리스ㆍ로마 신화의 표준적인 신화학 사전으로 평가 받으며, 지금까지 50년 넘게 여러 언어로 번역돼 온 책.
1,800여 개 항목에 200자 원고지 7,000매가 넘는 방대한 분량으로 신화 전체를 망라한 것으로 인정 받고 있다. 고전학자인 저자는 호메로스의 시에서부터 12세기 비잔틴 학자의 주석에 이르기까지 고전 신화의 모든 1차 문헌을 섭렵했고, 논쟁적 사항 들에 대해서는 원자료를 철저히 고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00페이지가 넘는 찾아보기를 실어 표제를 포함해 약 3,000여 개 사항에 대한 세밀한 검색이 가능하도록 했다. 번역에는 2년 여의 기간이 걸렸으며 전공자의 감수를 받았다. 감수를 맡은 강대진 박사는 원저의 오류 부분을 감수자 주(註)를 통해 바로잡았다. 최애리 등 옮김. 열린책들 발행.
▲ 역사 속의 매춘부들 / 니키 로버츠 지음
매춘의 역사를 여성의 입장에서 재구성, 매춘에 대한 남성 중심적인 지배담론을 전복시키는 책이다. 즉, 이 책은 매춘의 기원을 기존 역사서와 마찬가지로 고대 문명의 사원 매춘에서 찾지만 이를 단순히 ‘다산의식’으로서가 아니라 여성 사제의 힘을 빌려 왕의 통치를 정당화하려는 정치적 의례였다고 주장한다.
특히 저자 자신이 매춘부 출신이었다는 점에서, 이 책은 단순히 도덕주의적 차원에 머물러 온 매춘 관련 담론을 뛰어넘는다. 그는 대개의 페미니스트들마저도 매춘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지 못한 채 매춘부를 폄하하거나 매춘을 근절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하는 데 대해 불만을 표시하며 매춘 문제를 성 상품화나 타락한 여성 구제 차원에서 접근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지혜 옮김. 책세상 발행.
/최윤필기자 walde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