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커홀릭 1 - 변호사 사만타, 가정부가 되다
소피 킨셀라 지음, 노은정 옮김 / 황금부엉이 / 2006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은 영화와 될거라고 예견하고 있다. 정말 이건 누가 봐도 영화화 될 것을 작심하고 쓴 티가 역력하다.  하기야  요즘엔 소설의 영상화가 보편적인 추세라 조금만 똑똑한 작가라면 아예 영화화될 것을 예상 내지는 꿈을 꾸고 쓸 것이다. 아마 내가 작가였어도 그랬을 것이다.

이 작품이 영화와 된다면 별을 몇 개나 받을 수 있을까? 잘하면 세 개는 너끈히 받지 않을까?(영화에서 별 세 개면 충분히 봐 줄만한 영화라고 한다.) 그만큼 이야기는 미끈하게 잘 빠졌다. 그러나 난 오늘 이 소설이 그리지 않고 있는 면들을 얘기해 볼까 한다. 어차피 나는 문제적 인간이라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남이 동의를 하던 않하든 내 식의 얘기는 꼭 하고야 마는 성미라 어쩔 수 없다. 물론 그것이 남이 보기에 별로 대단치 않은 것이라도 말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 서두에도 말했지만 이 책은 충분히 재밌고 미끈하고 군더더기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문제가 없는 것이 문제라고나 할까? 소설가 이승우 씨가 소설은 철저하게 '인공'이라고 했으니 그렇다면 굳이 이 소설에 죄(?)를 물을 수는 없을 것이다. 깍고 다듬어 예쁘게 포장까지 했으니 이런 거 선물을 받았다고 생각해 보라.(난 실제로 이걸 서평단에 뽑혀 읽게 됐으니 선물이라면 선물일 것이다.) 이걸 거절할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같은 다이아몬드라도 원석 보다 잘 깍고 다듬어진 게 더 마음이 끌리는 건 당연하지 않은가?

이 책을 읽으면서 사만타는 굉장한 행운아라고 여겨졌다. 하나의 이야기니까 가능하지, 사실 하루 아침에 잘 나가던 직장에서 짤렸을 때 회복되는 속도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그래도 소설처럼 빠르지가 않다.  소설에서나 볼 수 있는 '우연'이란 게 현실세계에서 있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그 우연도 언제 찾아 올런지 모른다. 운 좋으면 얼마 전까지 다녔던 직장만한 새로운 직장을 얻을 수 있을 수도 있지만 대개의 경우는 그 보다 못한 일자리를 얻게 된다. 물론 제 3의 선택을 하는 경우도 종종 접하곤 한다. 이를테면 전도유망한 재원이 도시에서의 생활이 영증난다고 귀농을 해서 천신만고의 고생 끝에 만족한 삶을 살고 있다는 어느 휴먼 다큐멘터리도 접하기도 하지 않는가.

직장에서 쫓겨난 날, 지하철을 타고 어디론가를 한없이 가다가 어느 시골 화려한 고급 전원주택의 문이 열리는 순간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게 된다는 건 현실에서는 좀체로 잘 일어나지 않지만 한번쯤 꿈 꿔보고 싶은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야기는 심리적 대리만족을 하게 한다.

그 세계는 사만타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다. 아니, 전혀 다르다기 보단 사만타가 살았던 세계와 오버랩되면서 새로운 국면과 발상이 일어난다. 조금은 여유롭고 넉넉한 세계. 이런 세계가 있었음을 왜 예전엔 몰랐을까?

중독은 중독된 그 당시로는 잘 모른다. 중독을 벗어나봐야 자기가 중독되어 있음을 알게된다. 그렇다면 중독은 왜 생기는가? 중독은 정말 나쁜일까? 많은 심리학자나 정신분석학자가 이것을 연구하기도 하지만 그들의 분석에 따르면 중독은 두려움 또는 심리적 공황상태의 반작용으로 생기기도 한다고 한다. 그래서 어디엔가 미쳐있지 않으면 나를 가눌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리는 것. 그것이 알콜에 고착이 될 수도 있고,  섹스일 수도 있으며, 사랑일수도 있고, 사만타처럼 일일 수도 있다.

현대인의 병리는 대오이탈을 경험하지 않기위해 아둥바둥거린다는 것이다.(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거기엔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계가 있음을 볼려고도 하지 않고  자기 세계안에 갖혀서 산다. 가끔은 파도타기도 해 줘야하는 것인데 말이다. 그런 점에서 사만타는 심한 중증의 워커홀릭은 아닌 것 같다. 파도타기를 시작했으니 말이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에 과감히 도전장을 던지고 모험을 감행한다.  비록 가정부는 그녀가 결코 원했던 건 아니지만 그냥 질러버리고 보는 거다.

사람은 익숙한 것과 결별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존재인가? 새로운 것을 배우고 익힌다는 건 쉽지 않다. 하지만 그 새로운 것을 배우는 과정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보게되고 시야가 한층 넓어지기도 한다. 이건 정말 바람직한 과정이 아닌가.

사만타는 주말에 쉬는 건 지난 7년 동안 한번도 누려보지 못한 호사였다. 그래서 주말 계획을 세워본다.  남을 위해 음식도 만들어 보고, 사랑도 하게되며, 그 사랑 때문에 갈등도 해 본다. 싫은 사람을 위해 일도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온전히 받아 들이고 느껴본다. 중독에서 벗어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은 삶에 있어서 중요한 포인트다. 중독이란 내가 지금 무엇을 위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질주해 가는 것이기에 위험한 것이다. 이 작품에선 중독에서 벗어나는 과정은 이 작품에서는 예쁘게 그리고 있긴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직업에 대해서 다시한번 생각해 보게 됐다. 변호사가 반드시 비난 받아야 할 직업은 아닐 것이다. 이야기를 전개하다 보니 상대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그렇다면 가정부가 됐다고 다 만족하며 사는가? 그렇지도 않을 것이다. 사회 통념상 가정부가 변호사 보다 못한 건 영국이나 우리나라나 오십보 백보란 생각이 든다. 요컨대 자기 일에 자부심을 갖느냐 안 갖느냐의 차이일 것이다. 변호사라고 다 좋은 일만하며 사는 것도 아니고, 가정부라고 해서 무조건 폄하해서도 안될 일이다.

소설적 공간도 마찬가지다. 자기를 찾는 여행이 반드시 도시에서 시골로 공간이동을 해야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설정은 도시에서 도시로 해도 좋고, 역으로 시골에서 도시로 해도 이야기는 나올 것이다. 중요한 건 변화를 이끌어내는 계기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일 것이다. 그랬을 때 도시에서 시골로의 공간 이동은 무리는 없어 보이지만 좀 진부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이야기 말미는 우여곡절 끝에 사만타가 변호사를 회복하지만 결국 사랑을 위해 그것을 포기하고 애인의 품에 안기는 것으로 결론을 맺는데, 역시 이런 이야기는 해피 엔딩이 좋다. 하지만 '...그래서 둘은 행복하게 잘 살았더래요.' 하는 것 역시 진부하다. 왜냐하면 그 이후의 삶은 어찌보면 그 이전의 삶 보다 몇 배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더 잘 살지 않으면 이전보다 못한 삶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런데 그걸 독자로선 알 수가 없다. 그냥 상상으로나 알뿐.

어째거나 이래저래 생각해 보면 인간의 삶은 아주 잘 살 필요가 있는 것 같다. 행복해야 하고 보람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사랑해야 한다. 하지만 그러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그 모든 것들이 귀하고 빛나 보이기도 할 것이다. 저자의 말이 무척 인상 깊다.

인생을 망치는 일이라는 건 없다. 알고 보면 인생은 회복력이 무척 뛰어나다.(211p) 저자는 꽤 긍정적인 인생관을 가진 것 같다.

마지막으로 웬만해서 중독되지 않는 나의 삶을 생각해 보았다. 난 정말 웬만해서 그 무엇에도 미쳐버리지 못한다. 금방 싫증내고 미쳐버리지 않을려고 용을 쓴다. 이런 것 또한 중독일까? 그러면 나 같은 인간은 무엇인가에 조금은 중독되도 좋지 않을까 싶다. 과연 무엇에 중독되면 잘 중독됐다고 소문이 날까?

피에쓰: 나는 이 책에 별 4개를 줬다. 반 개도 표기할 수 있다면 난 3개 반을 줬을 것이다. 나의 경우 영화는 별 세 개 이상 이래여 볼 마음이 난다. 그러나 책의 경우 3개면 그다지 읽고 싶다는 느낌은 나지 않는다. 이 책은 문학성을 따지는 보수적인 독자라면 꼭 안 봐도 될 것 같긴하다.  하지만 보수라고 해도 트랜드를 알 필요는 있다. 이 소설은 웬지 안 보면 허전할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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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06-05-23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오~~ 이미 쓰셨군요. 근데 리뷰가 느무느무 길어요. 단편소설 같애. ^^

stella.K 2006-05-23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이제야 보셨단 말입니까? 제가 그러지 않았습니까? 작심하고 쓴다고...길이는 단편소설, 내용은 어설픈 평론 아닌가용? 암튼 고맙습니다. 이 책 꼭 야클님 드려야겠군요.^^

사이 2006-05-26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화를 염두에 두고 작품 자체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영화로 보면 재미있을 것 같기는 하지요. 실제로 판권도 팔렸고, 영화화 예정이라네요. 영화로 보면 또 다른 맛이 있을 듯.

stella.K 2006-05-26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영화를 염두했거나 이젠 글쓰기 방식이 아예 그렇게 변하고 있거나 둘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출처 : 바람구두 > 저 같으면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고...

황해문화 여름호 편집 막바지입니다.

믿었던 필자가 연이어 두 사람이나 믿음에 배반하여 여러모로 고통스러운 마감 중입니다. 당신이 남긴 하소연 아닌 하소연을 읽으며 두 가지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한 가지는 당신이 가지고 있는 고민 중 상당수는 올해 상반기 나를 계속해서 번민케하고 있는 고민이란 겁니다. 불행히도 그 고민은 현재진행형이라 저로서도 명쾌하게 정리하긴 어렵습니다. 다만 현재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유행 담론들의 출처가 실은 소비자본주의의 마케팅 이론(아마도 현존하는 모든 학문 중에서 가장 유능하고, 유효하며 급진적이고, 심지어 너무나 반혁명적이라 혁명적이기까지 한)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고, 이에 저항하는 담론(좌파 담론부터 포스트모던 담론에 이르기까지)의 대부분들도 이에 심각하게 오염되어 있거나 혹은 이런 문제들에 대해 효과적인 대처(어찌 이것이 가능할지도 의문스러운 지경에 처한)가 불가능해 보일 지경이란 사실을 부분적으로라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불행히도 현재의 이 오염 상황은 자기계발이란 표제어를 갖지만 실은 Onanie이고, 安心立命(spiritual peace and enlightment)을 꿈꾸지만 주화입마하고 만 상황 같아 보입니다.

혹자는 그나마 우리의 양심에 결계 노릇을 해주던 이념의 시대가 가버린 뒤 남은 것은 몰염치한 욕망의 무한질주만이 있을 뿐이며, 이것이 현재 우리 사회가 보여주는 브레이크 없이 폭주하는 욕망의 기관차와 같은 면모의 진실이라고 말합니다. 게다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보면 결론은 이상하게 원론이라 불리우는 삶에 대한 태도(입장)만 남기는 앙상함을 드러내곤 합니다. 예를 들어 변혁이란 것도 결국 "삶을 바꾸라."라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탈정치화된 입장 혹은 "세상을 바꾸라."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선택을 요구하는 두 가지 방책만 남는 것처럼 생각되곤 합니다. 세상의 모든 정치적인 언술들도 생사입멸(生死入滅)의 과정을 거치는지 한 때 포지티브했던 말들도, 세상의 변모와 더불어 더이상 그 이전의 저항적 언술로서의 생명력을 다해버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과거 한동안 절대적으로 거부할 수 없었던 아름다운 말들, 혁명, 인권, 민족, 민중, 시민, 자유, 평등, 평화, 연대, 노동 등의 단어들이 현재에도 과거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마치 한 동안 소비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을 담아 주변부 청년들이 외쳐대던 'Cool'의 정신이 이제는 가장 유능한 소비자본주의의 슬로건이 된 것과 마찬가지로 위에서 언급했던 말들도 이제는 그 힘을 잃었거나 훼손된 의미만을 만들어낼 뿐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친구에게 제가 했던 말, 자본주의는 젤리 같아서 다 먹어치우기 전에는 그 어떤 반동도 튕겨내거나 흡수해버린다고 했었는데 그 말의 의미는 여전히 유효한 듯 해서 마음이 아픕니다.

파스빈더가 말했던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말이 이 시대보다 더 잘 어울리는 시대는 아마 없었을 겁니다. 알랭 드 보통은 "가장 견디기 힘든 성공은 가까운 친구들의 성공"이라고 말했는데, 우리 시대를 주유하는 가장 큰 정서는 아마도 이 불안일 겁니다. 민주주의(체제)란 말을 능력주의와 동일한 말로 규정하고 있는 사람(신보수주의 & 신자유주의자 담론의 가장 뛰어난 전도사들은 바로 마케팅 이론가들)들에게 사회적 위계는 곧 그 사람의 자질입니다. 그네들이 포장하고 있는 현대 소비자본주의 사회에서 학력은 서태지가 보여준 것처럼 중졸 출신도 열정만 가지면, 스스로를 어떻게 계발하고, 성장시키고, 노력하느냐의 여부에 따라 성공할 수 있는 사회라고 그들은 침이 마르도록 전도합니다. 열심히 노력한 사람들은 훌륭한 사람들이고, 훌륭한 사람들은 부단한 자기계발이란 노력 끝에 계속 직장을 옮겨다니는데 성공한 사람들입니다. 이제 글로벌화된 세상, 민주주의와 시장 자유주의로 대통합을 이룬 사회에서 열심히 노력한 사람이 성공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실패하는 것은 당연한 현상입니다.

이와 같은 체제에서 가난은 단순한 고통이 아니라 수치이기도 합니다.

모든 저항을 즐겨 소비하며 무럭무럭 성장한 자본주의 체제는 혁명이 가장 잘 나가던 시대에 자본주의도  전성기를 이루었다는 묘한 공통점을 지닙니다. 이런 때 믿을 것은 자기자신밖에 없습니다. 성과급, 연봉제는 블루컬러 노동자와 화이트컬러 노동자의 분리에 더해져 이젠 노동자들 자신을 토막토막 내버립니다. 마치 드 보통의 말대로 가까운 친구들의 성공은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이 되어 우리들 자신을 짓누릅니다. 이제 젊은이들은 자신의 월급 명세서를 친구들과 공유하지 않으며, 단지 자신이 얼마나 멋지게 일하고 있는지, 자신이 얼마마 쿨한지 만을 설명합니다. 노동의 연대는 이제 학력고사 당일까지 우리를 주눅들게 했던 연봉경쟁의식 앞에서 우리를 뿔뿔이 조각내 버리고 맙니다. 어떻게 연대하란 말인가! 모두가 나의 경쟁상대인데, 어떻게 저항하란 말인가? 저항이 곧 자본주의를 살찌우는데, 그러다보니 결론은 너나할 것 없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기 자신으로의 후퇴만 남습니다.

사람들은 더없이 치열한 경쟁으로 나서거나 아니면 한 발 물러나 마치 보헤미안인 양, 철학과 예술을 음미하거나 종교적인 순수함으로 이를 초월하려 합니다. 실은 도피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만이 자본주의의 상류계급 부르주아로 승격되는 것을 거부하고, 자발적인 복종으로부터 스스로를 온존시키는 것으로 생각하려 듭니다. 성공한 자는 성공한 자대로 성공의 꼭대기로부터 추락할까봐 두려워하면서 발버둥치고, 실패한 자는 실패한 대로 더이상의 도전은 꿈도 꾸지 못한 채 애시당초 달랐던 출발점을 한탄합니다. 이 시대 평전이 유행하는 까닭 중 하나는 더이상 믿을 사람이 없다는 반증 혹은 사회 이론이나 구조, 정치로부터는 그 어떤 해결책도 찾을 수 없을 것이란 비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악순환의 연속이니 이를 초월해버리고 싶은 유혹이 듭니다. 그러나 그것은 곧 다른 의미에서 우리들을 하류사회로 직행하게  만드는 직선코스인 셈인 것이지요.

모든 저항은 무의미하다. 아니, 도리어 그들을 즐겁게 강화시키는 것이니 초월해버리자는 것...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명령은 나로부터 시작된 "생을 즐겨라!"는 절대 명령입니다. 도처에서 넘쳐나는 자유는 비아그라를 삼키고, 아무리 사정해도, 사정해도 흐물거리지 않는 약발 죽이는, 꼿꼿한 욕구의 대가리를 쳐들고 빳빳하게 고개 들고 다니라고 명령합니다. 규율사회에서 지시는 외부로부터 왔으나 이제 모든 명령과 지시는 내부로부터 옵니다. "일해라!", "공부해라."란 명령은 "일을 즐겨라!", "열정으로 살아라.", "스스로를 계발해라."라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직하게 그러나 강한 공포와 불안을 담아 엄습합니다. 멈추면 도태되므로 이제 아침형 인간은 한밤중이 되어서까지 스스로를 계발해야만 합니다. 불안이 세상을 좀 먹고, 나를 좀 먹지만 어디에도 함께 할 인간이 없습니다. 집에 가면 가족이, 회사에선 동료가, 간만에 만난 친구는 주식형 해외펀드에 투자해서 종잣돈을 모으고, 10년만에 10억 벌기 프로젝트가 도처에서 진행됩니다. 우리는 웰빙과 함께 ‘이태백, 삼팔선, 사오정, 오륙도’와 동거하는 지식 기반 정보 사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 시대의 노동은 사라졌는가?
아니, 노동은 사라지지 않았으나 노동을 재현하는 권력의 방식이 달라졌을 뿐입니다. ‘한 명의 인재가 십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담론은 모든 노동하는 주체를 자본가와 같은 방식으로 스스로를 경영하여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우리 사회의 거의 전분야에서 진행되고 있는 민영화는 단순히 공기업을 민영화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사회에 불어닥쳤던 구조조정은 단순히 기업만의 구조조정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의식 구조 자체를 민영화하고, 우리들 개개인을 구조조정시켰습니다. 내 안에 기업구조조정본부를 설치하게 만듭니다. 자신을 향상시키려는 의지는 자기 삶의 리더가 된다는 말이고, 자기 삶의 리더가 된다는 것은 또한 자신을 지배하고 지배받는 주체로 만들어내는 권력을 작용시킨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나를 지배하는 것은 나인데, 나를 이토록 학대하며 지배하는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당신은 이제 당신의 능력 여하에 따라 거액의 연봉과 파격적인 근무조건, 일에서의 무한한 기쁨과 자신을 실현하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일터를 찾아 자유롭게 이동하는 유목민입니다. 서동진은 "우리 시대의 노동하는 주체를 둘러싼 담론 속에서 주변 역시 모든 주체의 자리에 있다. 자신을 향상시키고 변화시키는데 주저한 사람, 평생에 걸친 직업 생애 동안 요구되는 학습과 변신을 게을리 한 사람, 타인과 소통하고 그를 자신의 편으로 삼기 위한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발전시키지 못하는 사람, 그 모두는 낙오자이며 패배자이고 또한 주변의 존재이다. 탈근대 자본주의 사회에는 중심과 주변이 아니라 안과 바깥이 존재할 뿐이므로 결국 모두가 불안하며 모두가 기괴한 흥분에 사로잡혀 자신을 표현하고 제시하려는 충동에 시달린다. 따라서 우리 시대의 기분인 불안은 우리 모두를 끊임없는 무한경쟁에서 낙오될 수 있으며, 언제나 실패를 두려워하는, 조울증에 사로잡힌 (노동하는)주체로 만들어버린다."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징기스칸에게서 열정을 빼면 그는 한낮 양치는 목동에 불과했을 터이니..."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글쎄요. 그 정답을 저도 알지는 못합니다. 다만 이번 특집 원고들을 읽고, 교정하면서 몇몇의 고민들에 대해서는 나름의 출구를 찾고 있는 듯 합니다. 이번 특집에는 좌담 원고가 하나있습니다. 일본의 현재를 고민하고 있는 "전야"라는 계간지의 편집위원 두 사람(다카하시 데츠야, 나카니시 신타로)과 "황해문화" 쪽 두 사람(김명인, 정근식)이 모여앉아 한국과 일본의 현재를 함께 고민하며 이야기를 나눈 것들입니다. 일본의 일억총중류 환상으로부터 '후리터', 600만엔이 없으면 결혼할 수 없는 그네들의 속사정과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도리어 후퇴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문제들을 양국의 비판적 지식인들이 둘러앉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 나눈 내용입니다. 결국 문제는 일정하게 상상력의 문제와 결부됩니다. 우리가 해방을 상상할 수 있는가? 우리가 해방의 주체를 상상할 수 있는가? 발견할 수 있는가? 혹은 발명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겠지요. 그리고 이번호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 중 하나는 동국대 철학과의 홍윤기 교수가 천규석 선생의 책에 대해 이정우 대표가 날린 서평에 대한 진지한 문제제기일 것 같습니다.

책 나오는 대로 한 권 보내드리도록 하지요. 이것이 제가 당신에게 보내는 든든한 연대의 표시라고 여겨주기 바랍니다.

* 참, 혁명이 가장 잘 나가던 시절, 자본주의도 가장 잘 나갔다고 했던 제 말의 참뜻은 자본주의가 잘 나갈 때 혁명이 잘 나가야 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 아닌가 하는 제 인식을 역으로 표현해본 겁니다. 이 점 오해없으시길... 그리고 이 글들은 이미 읽은 것들도 있겠지만 함께 읽어도 좋을 책들입니다. 물론 시간이 되고, 돈이 된다면 톰 피터스를 읽어보는 것도 좋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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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가르친다, 逆轉의 리더십

전략의 본질
노나카 이쿠지로 외 5인 지음 | 임해성 옮김 | 비즈니스맵 | 493쪽 | 1만9500원

“전쟁의 세계에는 단 두 마디 어휘만 존재한다. 즉 ‘이기느냐, 지느냐’이다.”

백전노장(百戰老將)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의 말이다. 국가 간의 전쟁은 첨단기술력의 싸움이자 동시에 국가 지도자 리더십의 시험대다. 또한 군사 엘리트들의 피 튀기는 전략 대결의 장이기도 하다.

일본의 군사 전문가 6인이 공동 저술한 이 책은 리더십의 본질을 드러내는 가장 적합한 경우를 군사 조직과 전쟁으로 본다. 특히 불리한 상황에서 극적으로 이를 뒤집는 역전(逆轉)을 가능케 하는, 전략적 안목을 가진 리더의 ‘실천적’ 자질에 관심이 많다. 이 책은 그걸 세세한 역사적 사실을 들어 제시하고 있다. 이억수 전 공군참모총장의 말대로 “불리한 상황 아래서 정확한 현실 인식에 근거하여 마침내 승리를 쟁취한 역사 속의 리더십을 재조명한 책”이다.

가령,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과의 일대 결전을 앞두고 처칠은 자신의 비서관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활로는 히틀러에게 영국을 공격토록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가 가진 하늘의 무기를 꺾어버리는 것이다.” 처칠은 절정기에 있는 독일의 기세를 역이용하여 오히려 ‘방공전(防空戰)’이라는 방어전을 도모해 궁극적인 승리를 얻고자 했다. 영국은 공격 측이 보유한 주도권, 즉 스피디한 작전에 따른 적의 시간적 유리함을 레이더로 상쇄시켰다. 다른 한편 항속 거리의 한계에서 발생하는 적의 시간적 불리함, 즉 체공 시간의 불리함을 철저하게 이용했다. 또 런던 같은 도시보다 레이더기지, 비행장 등의 지상시설을 우선적으로 적의 폭격으로부터 보호했다. 흥미롭게 따라 읽다 보면 처칠이 왜 그렇게 유명한 지를 알게 된다.

2차 대전 당시 히틀러는 카프카스 유전지대를 제압한다는 목표 아래 스탈린그라드 진격을 명령했다. 소련군은 최고사령관 스탈린, 최고사령관 대행 주코프 및 참모총장 바실레프스키 등 3인이 지도했다. 특히 주코프는 소련군이 극히 불리한 상황에서 오히려 대반격을 제안했고 관철시켰다. 수적으로 열세인 병력을 감안, 끊임없이 적의 지근 거리에 우리 군대를 배치하는 전법을 개발했고 이를 위해 3개 반 구성의 소부대 편성을 도입했다.

이런 식으로 1930년대 중국의 국민당군(軍)에 의한 토벌전에 대항했던 모택동의 반(反)포위토벌전, 북한군에 의한 한국 침략에 대항하여 미군이 인천상륙으로 전세를 전환시킨 한국전쟁, 불리한 중동 정세를 유동화하기 위해 열세의 이집트가 이스라엘에 과감히 도전한 제4차 중동전쟁, ‘소국(小國)’ 북베트남이 민족해방의 기치를 내걸고 강대국 미국을 무릎 꿇게 한 베트남 전쟁, 그리고 독일 공군의 영국 본토 공격을 다룬 영국 전투 등 6개 전투를 꼼꼼하게 분석하고 있다.

풍부한 자료를 이용하며 압축적 문장으로 당시 상황의 긴박성을 잘 묘사하고 있는 이 책에 대해, 전시도 아닌 평시에 반상(盤上)의 전투를 치르고 있는 프로 바둑기사 이창호는 이렇게 썼다. “전쟁사의 흐름에 대한 흥미 위주의 단순 파악을 뛰어 넘고 있다. 전략이 책상머리에서 짜는 작전계획이 아니라, ‘적(敵)과의 상호작용’임을 박력 있게 서술했다. 작전의 실체와 리더에게 요구되는 능력도 덩달아 체득하게 된다.”

신용관기자 qq@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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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문학을 통해 본 2000년대 우리들의 삶

창비·문학동네 ‘21세기 시대적 징후’ 선보여
“南과北, 男과女, 인종주의 경계 무너져
IMF이후 현실극복 환상성에 많이 기대”

지금도 문학은 시대의 거울이다. 2000년대 한국문학이 중간결산표처럼 내밀고 있는 ‘우리네 삶의 변화’와 ‘시대적 징후’는 무엇일까. 경계 허물기, 여성성의 강화, 혹은 분열증(스키조)과 무정부주의(아나키)…. 계간 창작과비평, 문학동네 여름호는 각각 21세기의 시사적 중요도를 가진 특집을 선보인다.

◆경계를 없애라

창작과비평은 기획 ‘2000년대 한국 문학이 읽은 시대적 징후’를 실었다. 평론가 한기홍씨는 “1990년대와 2000년대를 가르는 결정적인 사건으로 IMF사태와 6·15 공동선언을 꼽을 수 있을 것”이라며 남북한 경계 해체의 징후를 지적했다. 그는 “이주노동자가 늘어나면서 생겨나는 인종주의적 경계, 남녀 차별을 지속시키고 은폐하는 가부장제, 주류 문화와 하류 문화를 가르는 문화적 경계를 넘는 일” 또한 2000년대 문학의 특징이라고 평가했다.

이주노동자 문제를 다룬 박범신의 ‘나마스테’, 김재영의 ‘코끼리’, 한국 남자와 결혼한 조선족 여인의 비극을 그린 천운영의 ‘잘 가라, 서커스’ 등은 소재 면에서 새로운 지평을 연 작품들로 꼽힌다.

◆남성의 언어는 끝났다

황광수씨는 ‘분단과 통일’을 다룬 소설 중에서 ‘북한 사람과의 만남’을 다룬 작품이 양적으로 늘어났다며 “북한의 현실은 아직 파편적·표피적인 데 비해 체제에 대한 비판은 전보다 뚜렷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윤후명의 소설 ‘삼국유사 읽는 밤’이 대표적이다. “북한 방문단의 일원인 ‘나’는 북한주민의 삶의 모습이나 행위에서 낯섦과 이질감을 느끼거나 간간이 사회주의적 이상을 회의하는 상념에 빠져든다. ‘나’는 결국 북한을 ‘이상한 나라’로, 호텔을 ‘수용소’처럼 느끼며 ‘삼국유사’ 읽기에 빠져듦으로써 그곳의 현실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버린다.

또 2000년대 여성 시인들은 “남성의 언어로 자신이 말해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평론가 김형중씨는 지적했다. ‘내 꿈은 지상 모든 꽃 모종에 껌을 씹어 붙이는 일/ 내 꿈은 세상 모든 인큐베이터에 사제폭판을 장착하는 일/ 설사 내 자궁에서 근종 덩어리 하나 자라고 있다한들…’이라는 김민정의 시는 지금까지 남성 언어가 미화했던 여성의 임신에 거부감을 나타낸다. “시적 화자는 잉태에 대해 이물감 이외에 어떠한 자부심도 느끼지 않는다”는 것.

◆비루한 현실을 환상성으로 극복

또 2000년대 우리네 삶은 사이언스픽션을 닮은 이야기 전개와 환상성에 더 많이 끌리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열차라기보다는, 공포스러울 정도의 거대한 동물이 파아, 하아, 플랫폼에 기어와 마치 구토물을 쏟아내듯 옆구리를 찢고 사람들을 토해냈다’(‘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라는 박민규의 문장을 예로 들 수 있다. 평론가 차미령씨는 이 작품이 실린 박민규의 소설집 ‘카스테라’에 대해 “IMF 이후 평균적인 한국인의 비루한 현실을 가장 자각적으로 소화해내고 있다”고 평가했다.

계간 문학동네도 특집 ‘우리 시대 새로운 인간학’에서 소설, 시, 영화, 만화 등을 통해 나타난 새로운 21세기 인간형을 규정해볼 계획이다. 장르별로 필자들이 원고를 마무리 중이다. 계간 문학과사회의 동인(同人)인 평론가 이광호씨는 “2000년대 문학은 무중력의 상상력을 보여준다. 젊은 작가들은 더 이상 국적과 영토에 집착하지 않으면서 자유롭게 헤엄친다”고 말했다.

박해현기자 hhpark@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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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5-20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3000년전 한반도 청동기시대 겨울난방 빵빵했다

중앙 화덕 2곳에 야외서 만든 숯 쓴 듯
가옥 복원후 실험… 실내온도 24도이상

3000년 전 한반도에 살던 사람들의 실내 온도는 몇 도였을까? 발굴 결과를 바탕으로 청동기인들처럼 집을 지은 뒤 난방 온도를 실험했다.〈복원도〉 사상 첫 실험이었다. 겨울철 실내 온도는 섭씨 24도 이상이었다. 에너지관리공단 권장 겨울철 실내 적정온도(18~20도)보다 높은 수치다.

충청문화재연구원(원장 박순발)은 19일 “지난 겨울부터 충남 아산의 한 발굴현장에서 초기 청동기시대(서기전 10세기 무렵) 집을 짓고 고고학 실험을 하고 있다”며 난방 실험 결과를 발표했다. 이 실험의 목적은 첫째 주거지 내부의 사계절 온·습도 변화 파악. 둘째, 곡물이나 과일 따위를 오래 저장하기 위해 집 안에 땅을 파서 마련한 ‘청동기판(版) 냉장고’인 저장구덩이가 실제로 내용물의 싱싱도를 얼마나 유지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다. ‘실험고고학’(Experimental Archaeology)의 한 모습.

정확도를 최대한 높이기 위해 3000년 전과 똑같이 집을 지었다. 평면도는 가로 2.5m, 세로 10m(약 8평)로, 한쪽 변이 길다(세장방형·細長方形). 단면으로 볼 때는 땅을 1.5m 파서 지은 ‘반(半)지하집’. 바닥은 진흙으로 10㎝ 정도 다졌다. 또 청동기인들처럼 벽체·지붕은 나무로 기둥(혹은 뼈대)을 만들었고 갈대 등으로 엮고 이었다.

불 때는 곳(화덕자리)은 집 바닥에 가로 세로 30~40㎝ 사각형 모양으로 10㎝ 정도 파서 두 군데 만들었다. 온도계는 집 가운데와 바깥에 하나씩 설치, 실내외 온도를 비교했다. 땔감은 먼저 숯을 사용한 뒤, 숯불이 약해질 때쯤 지름 10㎝ 이상 마른나무를 서너 개 올려 지속시켰다.

허의행 연구원은 “집을 다 지은 3월 중순부터 보름 정도 불을 땠다”며 “4월에는 불을 때지 않은 상태에서 실내외 온도 차를 살폈다”고 말했다.

▲ 복원된 3000년 전 청동기시대 집. 반(半)지하식인데, 통풍 효과가 뛰어나고 비가 새는 일도 없었다고 충청문화재연구원은 밝혔다. 충청문화재연구원 제공
허 연구원은 “불을 때면서 실내 연기가 어떻게 될까 궁금했는데 모두 천장으로 빠져나갔다”며 “실험 기간 동안 비도 여러 차례 내렸지만 지붕이 새지 않았다”고 밝혔다. 갈대 등으로 잘 이은 천장은 통풍은 물론, 방수 효과도 높다는 사실이 증명된 것이다.

오규진 발굴조사과장은 “마른 나무를 몇 개만 올려도 지붕을 태울 듯 불길이 높았다”며 “청동기인들은 야외에서 만든 숯을 실내 난방에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연구원측은 3월보다 온도가 낮은 한겨울에도 땔감을 조금 더 사용하면 실내 온도를 25도 이상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이건무 국립중앙박물관장(청동기)은 “고대인들이 벌거벗은 채 대충 살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편견”이라며 “충남 부여 송국리 유적(2500여년 전)은 마을 터 마련을 위해 대형 토목공사를 벌일 정도”라고 했다.

신형준기자 hjshi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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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6-05-20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자료네요 담아갑니다

stella.K 2006-05-21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옛날에 주거환경이 어땠을까 궁금했걸랑요. 나름대로 한가지 답은 없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