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잔
김윤영 지음 / 실천문학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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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 소설집은 재미있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읽어 나가면서, "재밌네." 소리를 스스로 내며 읽었으니까. 그게 마치 나에겐 매콤한 양념통닭을 뜯어 먹으면서, "맛있네."란 말과 동격으로도 들린다.

왜 재미있어 했을까? 그리고 왜 생뚱맞게도 매콤한 양념통닭을 먹는 맛에 비유하는걸까? 그건 아무래도 작가가 이야기가 될만한 소재를 뽑아내는데 있어서 나름의 독특함이 있고, 이야기의 구성 방식에 있어 아이디어가 있어 보였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싶다.

 이야기는 '살인'과 '분열'('그가 사랑한 나이아가라' '집 없는 고양이는 어디로 갔을까' 등에서)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 현대인을 사로잡고 있는 정신적 상태를 잘 끄집어 내고 있다. 그리고 소설은 세련되고, 이미지가 뚜렷한 것으로 보아 작가는 역시 영상세대를 비껴가지 않는 것으로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뭔가의 아쉬움이 남는다. 살인과 분열이라고 하는 독특한 소재를 가지고 썼음에도 불구하고, 재미와 섬뜩함을 고루 겸비했음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써내려가는 이야기의 칼날은 왠지 그 끝이 무뎌 보인다. 즉 이렇게 재미있고 독특한 소재의 작품을 이야기의 결말 부분에 도달할수록 별거 아닌 것으로 뭉개버린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왜 일까?

작가는 이야기의 시작도 좋아야 하지만 정점에서 어떻게 독자의 알고 싶어하는 욕구를 자극하고 간질거리게 만들 것인가도 중요하다. 그리고 그 끝마무리도 깔끔해야  한다. 그런데 나의 기억 속에 작가의 작품은 끝마무리는 지극히 평범해 오히려 허탈하고 그 결말의 아쉬움 때문에 범작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그에 대한 대표적인 예가 '검사와 여선생'이란 작품이다. 1인칭소설 속의 '나는'는 요즘의 젊은 아이를 대표한다. 이 '내가' 쏟아 놓는 말들은 가히 촌철살인이다. 한마디로 나도 정상은 아니지만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똘아이고 정상이 아닌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그래도 그중 가장 심성이 바르고 똑똑하다고 할 수 있는 나의 이종사촌 언니에게서 자칫 형부가 될지도 모르는 남자가 '변태'였다는 걸 끝까지 말하지 않는 것에서 언니 또한 얼마나 사람을 놀라게 만들 수 있는 인물인가를 잘 보여준다.

하지만 자칫 형부가 될지도 모르는 남자가 변태라는 사실이 독자인 나에게도 전달되는 순간 화자는 놀랐겠지만, 나는 이야기의 긴장이 확 빠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로 돌아설 수 밖에 없는 것 때문이었다고나 할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방식은 여러갈래다. 그래도 해 아래 새것이 없다고 지극히 새로운 것을 기대한다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작가는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쓴다고 하는데, 솔직히 말하면 남 보다 깊이 보거나 앞서서 볼 수 있다는 것뿐이지 전혀 새로운 것을 보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본다.

'작가'를 흔히 이야기꾼에 비유하는 것은 그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힘을 가졌느냐 못 가졌느냐일 것인데, 뻔한 이야기도 어떤 사람은 지루하지만, 어떤 사람은 재미있게 한다는 것에 있다. 그것은 독특해서만도 아니다. 어떻게 디테일을 살리고  잘 풀어헤쳐 나갈 것이냐인데 그런 노련미가 작가 김윤영에게선 아직 발휘되지 않고 있다고 본다면 너무 건방진 소견일까?

작가의 작품들은 누군가가 단편영화로 만들어 보면 어떨까 하는 욕망을 갖게 만든다. 그만큼 독특하고 세련됐다. 작가가 이런 소설을 쓸 생각이었다면 히치콕의 작품들을 보면(수록작품 중 '집 없는 고양이는 어디로 갔을까') 더 좋지 않았을까를 생각해 보곤했는데 이건 어딨까지나 나의 바램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단편에 여러가지의 것들을 중첩시키는 것은 어찌보면 작가의 능력일수도 있고 욕심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 없는 고양이...'에선 혼혈의 자아정체와 아기를 갖고 싶은 것에 대한 자기분열적 행동을 중첩시키고, '산책하는 남자'에선 장편에서나 시도해 봄직한 남자의 시선에서 여자의 시선으로 크로스되다가 다시 남자의 이야기로 되돌아 오는 것등에서.

이런 일련의 것들을 봤을 때 분명 작가의 작품은 실험적이고 독자로 하여금 새로운 독서 경험을 갖도록 해 준다. 이 작품에 대해서는 독자들의 의견이 구구한데 역시 그것은 독자 스스로가 읽어보고 판단할 일이고, 작가의 다음 행보도 조용히 지켜볼만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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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를 대하는 4가지 방법

창원대 윤명희박사 분석
활동·은둔·파괴·대안형 개인글보다 스크랩이 많아

인터넷상의 1인 미디어인 블로그(Blog)가 한국에서는 ‘활동형’ ‘은둔형’ ‘파괴형’ ‘대안형’의 네 가지 유형으로 분열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창원대 윤명희 박사(사회학과 강사)는 최근 전북대에서 열린 2006년 한국사회학회 전기사회학대회 발표문 ‘1인 커뮤니티의 사회적 분열’을 통해 이와 같이 밝혔다.

◆활동형

“자신의 생각을 간편하게 표현하고 남들과 소통할 때의 즐거움이 대단한 것 같아요. 저 역시 하루에 한두 개씩은 글을 꼭 올리고 히트수와 리플수에 목매다는 걸 보면…”(A사용자)

이 사람들은 블로그를 ‘개인 매체’나 ‘출판도구’로 보고, 개인적인 네트워킹을 하면서도 문을 활짝 열어 놓는다. 대부분 자신의 신변잡기나 일상적 사건, 관심 주제 같은 내용으로 블로그를 만들면서 공개된 글에 대한 댓글과 트랙백(다른 곳에 댓글을 남기는 기능) 등을 통해 다른 이용자들과 활발하게 상호 작용하고 있지만 사회적 영향력엔 한계가 있다.

◆은둔형

“세상은 그렇게 어지럽도록 돌아나가면서 조롱하듯 나를 바라보며 스치고… 가슴속에 있던 상처들이 피를 내보이며 갈라지기 시작했다.”(C사용자) 검색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비공개 블로그’가 이런 유형. 한마디로 ‘자신만의 세계’ 속으로 숨어버린 폐쇄적 블로그다.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공간에서 활동하거나 그런 사람들끼리만 교류하는 ‘고립된 관계망’의 특징이 있다. 댓글과 트랙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지만, 독서·음악·영화 같은 취미에선 높은 수준을 보여주기도 한다. 때론 자기파괴와 무력감으로 이어지는데 이는 사회적 위기의 반영이다.


◆파괴형

“꼴페미 반대 편에 있는 또라이들 많군. 여자도 군대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인간들 보면 꼴페미들 지× 떠는 것 보는 것 같아서 씁쓸하외다.”(Y사용자) 인터넷에서 하루에도 여러 번 눈에 띄는 유형이다. 사회적 현안에 대한 일방적인 주장이나 극단화된 집단적 행동이 잘 나타난다. 이런 모습은 언젠가 정상적 상태에 도달할 과도기의 혼란으로 볼 수 없다. ‘적나라한 선동’이 공식적 문화가 된 시대적 상황을 보여줄 뿐이다. 이런 블로그의 방문자는 ‘지지자 아니면 반대자’로 칼같이 나눠져 타협점을 찾기가 쉽지 않다.

◆대안형

“그렇게 일상의 나락으로만 떨어진다면 그저 바보 같은 직장인이 될 따름이라는 자각에, ‘정치적인 올바름’을 지켜가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습니다.”(B사용자) 공적·사회적 이슈에 대해 집단적으로 연대해서 실제로 원하는 바를 ‘실천’하려 한다. 특히 거대 포털의 상업화 전략에 따른 블로그 서비스는 이들의 단골 비판 대상. 연못처럼 고여있는 블로그가 아니라 사회적인 주제가 끊임없이 소통·토론되는 강물 같은 블로그다. 이미지나 ‘펌질’보다 글 중심 콘텐츠의 비중이 많으며 작은 규모지만 유대감이 높은 커뮤니티를 만들어가고 있다.

◆한국 블로그, ‘개인’은 어디에?

윤 박사는 “이와 같은 블로그 유형의 분열 현상은 전통과 현대, 탈(脫)현대의 양상이 뒤섞여 있는 한국 사회를 반추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개인 중심 사회에서 출발한 서구의 블로그와 달리 ‘개인’이 주도적인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도 한국 블로그의 또다른 특징. 블로거 자신이 콘텐츠를 직접 생산하기보다는 일종의 스크랩북 기능이, 대안적 개인 미디어라기보다는 커뮤니티의 속성이 좀 더 강하다는 것이다.

유석재기자 karma@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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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잘코군 2006-06-20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과거 은둔형에서 활동형과 대안형으로 옮긴 단계네요. ^^
이거 퍼갈게요.

아영엄마 2006-06-20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음~ 저는 활동형에서 은둔형으로 흘러 가고 있는 듯...^^;;

stella.K 2006-06-20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활동형에서 은둔형으로 옮겨 가는 것 같아요. 흐흑~

Koni 2006-06-20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어느쪽인지 잘 모르겠어요. 활동형과 은둔형의 중간쯤?

stella.K 2006-06-21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주 은둔할 수는 없을 것 같으니, 남 읽있어 주는 서평이나 간간이 올리며 활동적 은둔형으로 모드를 전환할까 생각 중입니다. 흐흐

가시장미 2006-06-23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느쪽인지 잘 모르겠네요. ㅋㅋ 활동적 은둔형이라. 그건 뭐죠? :)

stella.K 2006-06-23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같은 인간 보면 모르겠니? 흐흐.
 
주몽 - 전2권 세트
박혁문 지음 / 늘봄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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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원래 드라마를 그다지 꼼꼼히 챙겨보는 스타일이 못되는데, 그래도 어떠한 것들은 챙겨 보기도 한다. 그것은 원작이 있는 경우다.

그렇게 하는데는 이유가 있는데, 우리나라 극작가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어떤 작가는  뒤로 갈수록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감을 잃어버리고 마는데 그러면 여지없이 불쾌감이 느껴진다. 처음에 안 좋다가도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것처럼 느껴지는 게 사람의 마음인데, 반대로 처음이 좋다가 뒤로 갈수록 안 좋으면 속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내가 이 책의 서평을 쓰면서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주몽>이라고 하는 드라마에 대한 갈증 때문이었다. 매주 두 편씩 보자니 감질이나 어떻게된 내용인지 스토리나 알고 았자라는 심산이었다. 그리고 책을 펼쳐 든 순간, 나는 몇장 읽지도 않고 당황스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뭐야? 내가 봐왔던 그 주몽이 아니잖아?" 그런데 이 책엔 조그맣게 부제처럼 '정설'이라고 씌여 있다.

그것은 어느 특정 음식을 파는 식당에서,  자기네 식당이 진짜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간판에 '원조'라는 것을 써서 붙이고, 그러자 같은 류의 음식을 파는 그 옆 식당이 그에 뒤질세라 '진짜 원조'임을 강조하다 결국 그렇고 그런 아류가 판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고 하는, 어느 문화평론가의 쓴소리가 생각이 난 것이다.

어쨌거나 난, 그래 좋다. 책은 책이고, 드라마는 드라마다 생각하고  일단 책에 몰입하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그러기엔 드라마 <주몽>이 주는 이미지가  강력하여(적어도 아직까지는) 책에 올인하기는 쉽지 않았다. 도대체 책과 드라마, 어떤 게 진짜 정설에 가까운 것이냐? 의문스러운 것이다. 물론 말대로 박혁문의 버전이 진짜 정설에 가까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러기엔 이야기의 구조가 그리 탄탄해 보이지 않는다.

그럴 경우 아무리 드라마가 주는 극적 효과 때문에 허구가 더 많이 들어간 TV <주몽>이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더구나 영상은 더 없이 화려하고 스펙타클 하다. 게다가 마케팅에 걸맞게 TV<주몽>을 쓴 극작가가 소설로도 써 한달에 한권씩 낼 모양인가 보다. 그렇다면 박혁문의 버전은 승산이 없어 보인다. 아무리 '정설'이라는 것을 강조해도 말이다.

어차피 신화도 이미지고 TV 드라마도 이미지다. 물론 둘은 같지 않지만 사람들은 어쨌거나 이미지를 쫓는 것마는 사실이다. 물론 조금만 더 똑똑한 독자라면 TV 드라마가 주는 이미지가 사람에게 100% 만족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다. 드라마의 만들어진 이미지는 사람의 상상력을 제한 하지만, 활자가 주는 이미지는 사람의 상상력을 무한대로 끌어 올려 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 둘은 상보적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원작이 있는 드라마를 좋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물론 둘은 같지 않지만, 그 둘을 비교하는 재미가 있다. 하지만  박혁문의 버전은 불운해 보인다. 그의 버전은 드라마 <주몽>과 현격이 차이를 보이며 비교불가다. 비교를 한다면  최완규가 쓴 소설책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두 사람의 작업은 어떻게 비교가 될까? 이 책의 저자 박혁문은 이미 10년 전부터 고증작업을 했다고 한다. 극작가 최완규는 어느 호텔방에 박혀서 외부와 차단된 채  텔레비젼과 노트북과 담배만을 가지고 산다고 한다(얼마 전 모 신문의 인터뷰에 나온 그의 얼굴은 수염도 깍지 않고 초췌하기 이를데 없었다). 박혁문 씨도 고생을 했을텐데 누구는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누구는 이제 잊혀질 날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왜 그래야만 하는 것일까?    

한간에 말을 들으니 <주몽>에 관한 책만 해도 20종에 가깝다라고 한다. 뭐든 이게 문제다. 넘치는 것은 모자라느니만 못하다. 뭐가 좀 뜬다 싶으면 너도 나도 그것에 목숨을 건다. 그리고 그것이 사그라들면 또 다른 것에 달라붙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가 10년 전부터 작업을 했다고 하면 그때로서는 꽤 선견지명이 있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 역사 연구 또는 역사 드라마가 주로 조선시대를 다뤘던 것만큼 이때 이미 고구려를  다룰 생각을 했다면 전망있어 보였으리라. 그런데 작금에 와서 별달리 주목을 받지 못하는 건 출판사의 마케팅 부재였을까?

저자의 노역은 둘째 치고라도 책 자체를 보라. 이미 많은 사람이 지적했듯이 오자가 너무 많고, 디자인 역시 조악하다. 그리고 만약 이 책을 언제 세상에 내놓느냐로 고심했다면  너무 뜸들인 건 아닌지...? 모든 마케팅이 그렇겠지만 출판 마케팅에 있어서도 어떻게 무조건 많이 팔 것인가만을 생각하지 말고, 시대조류를 먼저 읽어내는 안목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데 여기까지 쓰고 보니 드라마 <주몽>도 그렇게 강렬한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신뢰를 얻지 못하게 생겼다. 드라마 <주몽>이 어디까지 정설을 바탕으로 썼을까를 생각할 때 그것을 믿을 사람은 없어 보인다. 하기사 드라마가 아닌가? 그러나 드라마 역시 허구라고는 해도 이건 특별히 역사 드라마다. 어느만치는 정설을 내포하고 있어야 하지 않는가? 적어도 어디까지가 정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에 대한 경계가 있어야 한다. 무조건 영상의 화려함 때문에 믿게끔 만드는 효과를 준다면 시청자를 우민화 시키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버전을 여러 개를 만들어서 독자들로 하여금 혼란을 주는 것도 고려는 해 봐야할 것 같다. 아무리 팩션이라고 하는 장르가 뜬다고는 하나 정확한 역사적 사실을 알 필요는 있어 보인다. 

어쨌거나 그래도 난 저자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쳐 주고 싶다. 이 책을 쓰기 위해 10년 동안 고증작업을 했다니 가히 그 고생이 얼마만한 것이었을까 생각하니 위로의 박수를 쳐 주고 싶은 것이다. 다음에 그의 행보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좋은 성가가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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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미 2006-06-21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년동안의 고증작업, 작가의 땀이 밴 작품에 박수를 보내는 그 마음에 박수를 보냅니다.

stella.K 2006-06-21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출처 : 바람구두 > 차붐@월드컵 <7> 나에게 축구는 `전투`였는데 아들 두리는 `행복한 생활`인듯

차붐@월드컵 <7> 나에게 축구는 `전투`였는데 아들 두리는 `행복한 생활`인듯

한국에서 우리 부자의 얘기가 화제라고 한다. 도대체 뭐가 재밌다는 건지 나로서는 이해가 잘 안 갈 뿐이다.

젊은 세대, 그들의 생각과 감각을 이렇게 이해하지 못하면서 내가 그들과 함께 몸을 섞고 일을 하고 있는 게 맞는 일인지 걱정스러울 정도다.

요즘 TV에 나와 정신없이 떠드는 녀석이 하나 있다. 노홍철이라고. 몇 년 전, 우리 가족의 크리스마스 파티에 이 친구가 왔다. 큰딸(하나) 대학 동기의 남자친구라고 하면서. 쓸데없는 얘기지만, 딸의 대학 동기는 유로 상공회의소를 거쳐 G그룹의 경영전략실에 근무하는 멀쩡한 재원이다.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이 남자친구를 보자 기가 막혔다. 그런데 아이들은 재미있어 좋다고 했다. 같은 시대를 살면서도 이해하기 힘든 세대차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의 상황이 노홍철이를 처음 봤을 때만큼이나 곤혹스럽고 불편하다.

나는 10년간의 독일 분데스리가 생활 중 선발로 못 나온 게 딱 두 번 있었고, 중간에 교체돼 나온 게 한 번 있었다. 그땐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줄 알았다. 내가 얼마나 심하게 낙담을 했으면 감독이 그 다음 경기 전에 나를 불러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다음부터 너를 빼려면 미리 말해줄 테니까 아무 걱정하지 말고 뛰어라!"

그 당시 나에게 축구는 생활이 아니라 '밀리면 끝나는 전투'였던 것 같다. 그런데 아들 두리는 확실히 다르다. 축구는 '자신을 행복하게 해 주는 생활'인 것 같다. 축구를 하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좋은.

그러니 TV 해설을 하면서 이놈은 "전 그때 후보라서 잘 몰라요"라고 멀쩡하게 얘기하는데 옆에 있는 내가 진땀이 났다.

내가 두리에게 배우는 게 하나 있다. 언젠가 자전적인 글에도 썼던 적이 있지만 '남의 행복이 커진다고 내 행복이 줄어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선지 이 녀석은 항상 여유가 있다. 늘 최고여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남을 인정하는 여유가 없는 나에 비해 두리는 동료를 인정하는 여유가 있다. 그래서 두리의 삶이 나보다 더 즐거운 모양이다.

'행복이'.

두리의 e-메일 닉네임이다. 굳이 그런 이름을 쓰는 걸 보면 천성이라기보다는 행복하고 싶어 스스로 하는 노력인지도 모르겠다.

마치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연예인들을 얘기하듯, 외국 축구선수들의 사생활까지 줄줄 꿰는 두리가 옆에 있으니 든든하다. 스페인의 황태자비가 화면에 잡히자 '예쁘죠?'하는 말이 하고 싶어서 혼났다며, 중계를 마치자마자 황태자비의 전력에서부터 사생활까지 쫙 얘기해 준다.

두리와 함께 해설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정한 이유가 여러 가지 있지만 한때 '기자'를 꿈꿀 정도로 다방면에 관심이 많은 두리에게 도움을 받고 싶었던 것도 그중 하나였다. 나는 지난 몇 년 동안 이전처럼 유럽축구에 많은 관심을 가질 수 없었다. 축구의 흐름을 읽는 거야 자신이 있지만, 선수들의 현재 상황을 팬들에게 현실감 있게 설명해 줄 경험과 정보가 부족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두리는 훨씬 더 많이 알고 있었다. 또 나와 다른 요즘 아이들의 생각도 들을 수 있었다. 물론 친구들의 얘기를 하는 것이니 내가 하는 것보다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본인도 분데스리가에서 뛰는 축구선수이면서 베컴의 자서전을 머리맡에 놓고 잠들거나 지단에게 가서 공에 사인을 받고는 즐거워하는 것은 여전히 이해하기 힘들다. 나는 그러지 않았다. 상대가 아무리 대단한 선수였어도 나에게는 한번 붙어 보고 싶은 경쟁자일 뿐이었다.

우리 시대의 삶은 '성공'에 모든 것을 두었다. 그러나 두리가 살고 있는 지금은 '행복과 즐거움'이 그들의 중심에 있는 것 같다.

부럽다. 그리고 이런 세상을 그들에게 물려준 우리 세대가 자랑스럽다.

차범근 <수원 삼성 감독, 중앙일보 해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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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DNA를 가지고 대체 뭘 하려는 거지? - 너무나 도발적인, 그러나 너무나 인간적인 천재 과학자 7인의 이야기
데이비드 E. 던컨 지음, 김소정 옮김 / 황금부엉이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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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나는 작년 말부터부터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 생명윤리 세미나에 참여하고 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윤리' 라는 과목이 그리 신나고 재미있는 공부는 아니기에, 이 세미나가 과연 얼마나 나에게 즐거움과 재미를 줄 것인지 의문인채로 그곳에 발을 내딛게 됐다.

그러나 즐거움이나 재미만을 생각했다면 내가 그것을 왜 듣고 있었던 것일까? 마침 그 무렵이 '황우석 파동'이 있었던 때였고 그전부터 황우석 박사가 집중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었을 때, 나는 뭔가 모를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원래 과학 분야을 좋아했던 것도 아니면서 왜 의문을 가졌던 걸까? 결국 이런 의문이 재미와 상관없이 나를 그곳으로 인도했던 것 같다.

그러고 내가 이 책을 다 읽을 때 즈음 번역자의 말에서 캘리포니아 공과대학 굿스타인 박사의 인용구를 발견했다. 그는,  왜 과학자들이 거짓으로 연구 결과를 발표하는가에 대해 크게 세 가지로 설명했다고 한다.  

첫째는, 성과에 대한 압박이 심하기 때문이고 둘째로, 스스로 올바른 결과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마지막으로 개별 실험들이 다른 곳에서 정밀하게 재현되기 힘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가지 도전이 생긴다. 그렇다면 우리가 과학이란 분야에 대해서 잘 알던 모르던 무작정 그들의 연구를 지지하던가, 내 전공 분야가 아니니까 알아서 잘하고 있겠지 하며 방관해도 된단 말인가?

우린 과학이 인류를 위해 공헌만 하고 있다고 착각 속에 빠져 사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당장의 눈 앞의 이익만을 보다가 나중에 더 큰 것을 잃을 위험에 처할지도 모르는데도? 실제로 우린 그런 재앙들을 보고 있지 않다. 그런데도 누군가가 과학 분야에서 새로운 연구를 하면 일단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 볼 수 밖엔 없는 것이다.

이 책은 유명한 과학자들의 삶과 연구 분야를 소개하면서 특별히 그것이 사회, 윤리적 관점에서 어떠한 의의를 갖게 될런지를 조명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솔직히 과학 분야에 대해선 문외한이라고 할 수 있는 내가 읽기엔 다소 버겁고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책 자체도 그다지 쉽게 씌여지지 못한 데다가, 워낙에 생명윤리라고 하는 분야가 광범위 하고 아직 체계를 갖추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이 분야에 대한 논의와 성과는 좀 더 시간이 흘러봐야 알 일이라고 감히 조심스럽게 말하고 싶다. 그것은 이제 (기독교적 관점에서) 생명윤리를 8개월 여 접해 본 나의 좁은 소신이기에 이렇게 얘기 하는 것 뿐이다.

이 책이 좀 어렵긴 하지만 흥미로운 것도 없진 않았다. 예를들면 이 책의 두번째 장에 나오는 <이브: 신시아 케년> 같은 경우 '예쁜꼬마선충'을 소개하면서 이것이 노화의 비밀을 풀어 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늙지 않고 400살까지 살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거기에 대해 회의적인 견해도 없진 않지만, 오늘 날의 눈부신 과학의 발전을 볼 때 불가능 하지는 않아 보인다.

그러나 내 개인적인 의견을 피력하건데, 난 늙지만 안는다면 그리고 죽을 때 고통없이 자연사 할 수만 있다면 현재의 인간 수명에 만족한다. 그러므로 신시아 케년이 400살 까지 살 수 있다는 것에 그냥 미소만 지었을 뿐이다.

왜냐하면 앞으로의 인간의 삶은 어떻게 하면 오래 살 것이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잘 살고 복된 죽음을 맞이할 것이냐에 초점이 맞혀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니 내가 그녀를 보면서 미소를 지은 건 그냥 치기 어린 과학자다운 면모를 보는 것 같아서 였다. 물론 그녀가 알면 화낼지도 모르는 일이겠지만 말이다. 

다음으로는 3장에 나오는 <바울: 프랜시스 콜린스>와 4장에 나오는 <파우스트: 크레이그 벤터>다. 이 둘은 명확히 대비된다. 콜린스는 기독교인이고, 벤터는 무신론자이다.  기독교가 과학의 발전에 있어서 늘 반대적 입장에 서 왔느냐 아니냐는 이 책에서 처음 다루어진 것도 아니고, 어제 오늘의 일은 더욱 아니다.

그런데도 기독교는 과학의 발전에 발목을 붙잡는다고 보는 견해는 만만치 않아 보인다. 불행한 것은 나는 기독교인이지만 과학자는 아니기에 이 문제에 대해 기독교인과 무신론자가 충돌하고 불화하는 것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하지만 과학자들 중엔 기독교인이 있고, 그들은 오늘 날의 과학 분야의 발전에 발목을 잡는 사람마는 아님을 알아줬으면 한다. 무신론 과학자들은 기독교인들이 고리타분인 교리에 매여 사람이 그냥 죽어가는 것을 지켜만 보고 있다고 반박 할지 모르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인만큼 혹시 이것이 하나님의 계율에 위배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을 갖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러기에 과학의 발전에 민감하다고도 볼 수 있고 그 발전 이면에 올지도 모르는 인간 사회의 윤리적 문제와 인류의 재앙에 대해 대처 하려는 자세가 더 많다는 것을 알아 줬으면 한다. 

물론 기독교 진영에서건 무신론적 관점이건 딜레마는 어느 관점에서 건 존재할 것이다. 그러므로 콜린스에 대한 벤터의 반박은 깊이 들어가 보면 그럴 수 밖에 없는 뭔가가 있겠지만, 결국 신념의 문제임에는 틀림이 없어 보인다.

 어쨌거나 이 책은 과학자들이 연구실에만 붙박혀 연구만 하는 기계가 아니라 때로는 인간적인 면모와 함께 과학이 윤리나 정치에 어떻게 관계 맺고 있는가도 그들의 입술을 통해 들을 수 있어 나름대로 유익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이 쓰여진 성과적인 측면에선 앞에서 말했던대로 윤리적 측면을 다뤘다고 보기엔 초보적 단계란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래도 이 분야에 대한 저작물은 앞으로 좀 더 많이 나와야 하고, 좀 더 대중적이어야 한다고 본다. 굿스타인 박사의 말을 상기시켜 본다면 말이다.

저자는 특별히 미국의 과학자들 7명을 다뤘는데도 이 정도의 성과라면, 전세계에 흩어진 석학들을 다뤘다고 볼 때 그 작업은 또 얼마나 방대하고 산만해질 것인가를 생각해서 미국 과학자들만을 다뤘다는 것에 관대해져 보기로 했다.  윤리에 대한 범세계적인 보편적 가치가 있을 수 있겠지만, 윤리에 대한 잣대가 나라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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