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프 2
캐서린 스토켓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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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좀 당혹스럽다. 이게 다인가 싶어서. 도대체 뭘 말하려고 하는지 잘 모르겠다. 뭔가를 보여줄 것 같은데 뭐가 수줍은 것인지, 아니면 뭔가의 진실을 은폐하고 있는 것인지 보여주다가 말고 자꾸 지엽적인 것에 이야기를 돌려 원점을 흐리고 만다. 이야기가 쭉 진행될 것 같으면서도 그 다음 장에선 또 다른 사람의 새로운 싯점을 보여주고 있어 서서히 짜증도 나고 한숨도 나왔다. 그렇다고 스키터와 아이빌린과 미니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냐면 그렇지도 않다. 각각의 장은 이들 세 사람의 싯점을 서로 교차하며 보여주기는 하는데, 이 셋의 특별한 차이를 모르겠다. 이를테면 한 사람안에 여러 자아가 있어 그냥 혼자 이 사람도  됐다, 저 사람도 됐다, 혼자 독백놀이라도 하는 것 같다. 마치 다중인격인 것처럼.  

게다가 문체 또한 어쩌면 그리도 작위적인 것인지? 도대체 이런 문체는 원작자가 원래 설정한 문체를 그대로 옮긴 것인지, 아니면 번역하는 과정에서 번역자가 의도한 문체인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이런 문체 또한 책 읽기에 방해가 되서 독서의 지루함을 가중시켰다. 예를들면 이런 것이다. 이 작품은 세 여인의 이야기를 번갈아가며 보여주는데, 이야기는 일인칭 화자의 싯점에서 풀어간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시도야 이 작품이 처음은 아니다. 그전에도 다른 작가들도 필요에 따라 그렇게 한다. 그런데 이런 작품은 화자인 '나'가 주관적인 화법으로 풀어 나가는데 이 작품은 특이하게도 객관적 싯점에서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일종의 현재진행형조로. 이를테면 TV 드라마에서 가끔 보는 소재이기도 한데, 등장인물이 대사를 할 때 "나는 ...를 무척 좋아해" 이렇해도 될 대사를, 일부러 어리고 유치해 보이려고 극중 자신의 이름을 넣어서 그걸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과도 맥락을 같이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내가 보는 그것. 내가 대하는 그 사람이 전부인데 이것을 보는 또 다른 내가 그런 나를 또 주시하고 있는데 이런  지문들이 수두룩하다는 거다. 현재진행형적 문체다 보니 마치 모든 것이 의도된 양 보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예 전지적 싯점으로 쓸 일이지 뭐 때문에 이런 상투적이고 작위적인 문체를 쓰는 것일까?  

그런데 솔직히 고백을 하자면, 나는 요즘에 쏟아져 나오는 소설을 선듯 골라 읽기가 겁이 난다. 그것도 잘 썼다는 작품일수록 그것에 대한 두려움이 더하다. 도무지 나에겐 이해도 안 되고, 뭐 이런 게 다 있나 싶은 작품들에 거의 열광하는 요즘 독자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 도대체 뭘 보고 그러는 걸까? 과연 이것이 슬프게도 구세대와 신세대를 나누는 척도가 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아니면 내가 요즘 작품에 불감증인 건지, 아니면 그 작품을 읽은 다른 독자들이 조그만 감동에도 쾌감을 느끼는 감정체계가 발달이 되있는 것인지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뭐 남이 어떻게 느끼든 그건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작가다. 현대 소설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영화적 글쓰기다. 어떤 소설들은 정말 영화의 시퀀스를 보는 것 같이 그 분할을 기술적으로 잘 나눠놨다. 그리고 이들 대부분은 무슨 믿음인지 아예 영화화 될 것을 의식하고 쓰는 작가도 많이 있다. 하지만 난 이런 작가들이 참 우습다. 한마디로 요즘 작가들은(남의 나라 작가들이나, 내 나라 작가들이나) 미안하지만 하나 같이 형식주의에 빠져있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이 무엇이냐는 정의도 없이, 무조건 재미만 있으면 다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게 형식만을 추구할뿐 어떠한 주제도, 교훈도 뚜렷하지가 않다. 그러다보니 독자들은 어느 때부턴가 감동과 재미를 혼동하는 것 같다. 이 작품은 누구에겐 재미를 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나 같은 경우는 재미도 없었지만). 그러나 어떠한 주제도, 교훈도 찾아 볼 수 없다. 이를테면 난 그런 책을 원한다. 우리가 고기를 먹을 때 살코기만 먹는 것은 그 고기 맛을 충분히 즐기는 것이 아니다. 단단한 뼈야 씹기가 어렵겠지만 가끔 "오도독, 오도독" 하고 뼈 씹히는 맛이 있어야 그 고기의 맛을 충분히 느끼는 거다. 소위 소설도 그런 맛이 있어야 한다. 이책을 보라. 거창하게도 두 권으로 나와 뭔가 굉장한 것을 줄 것  같지만 "오도독"하며 건질 뼈과 살코기가 있는지? 

무엇보다 이 작품은 '블론드'하다. 즉 '백인 취향의 백치미'란 말이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과연 이 작품에 열광할 필요가 있을까? 이야기의 발상부터가 허무맹랑하지 않은가? 1960년대 아직도 흑백인종차별이 팽배한 시절, 기자 아니면 작가가 되길 소망하는 스키터가 뭘 가지고 회사의 상사와 독자의 눈을 사로잡을 이야기를 써 볼까 고민하다, 두 유색인 여인(미니와 아이빌린)의 이야기를 써서 세상에 꼼수를 던진다는 말 아닌가? 그걸 두고 용기라고 할 수 있을까? 그걸 정의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이 진짜 용기가 돼고, 진짜 정의가 되려면 스키터는 그 보다 오래 전부터 유색인들에 대한 사랑과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저 관계의 친밀함이나 호기심 정도만 가지고는 안된다. 그래서 백인들이 유색인을 멸시하고 차별할 때마다 그 마음에 저항의 마음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끌어 올릴 수 있어야 했다. 하지만 고작 화장실을 따로 쓰는 것에 대한 문제 의식 정도만으로 유색인에 대한 글을 쓰겠다는 의지는 솔직히 철부지의 모험이지, 의식있는 사람이 세상을 바꾸겠다는 의지로는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스키터가 그 두 유색인 여자들에 대해 무엇을 어떻게 썼는지가 구체적으로 나와있지가 않다. 그런 상황에서 어쨌든 책이 나오고 독자들의 반응을 예의주시하다 이야기는 어처구니 없게도 끝나 버린다. 도대체 뭐하자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그런 문체의 악재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뭔가가 나와줄 줄 것을 기대하고  끝까지 완독을 결행했지만, 결과는 완전 참패다. 결국 이야기는 처음부터 그렇게 모험(그것도 반쪽짜리)에 대한 어설픈 해프닝 정도만 보여줄 작정이었나 보다. 그리고 시대가 시대이니만치 마르틴 루터 킹과 존 케네디의 암살을 양념으로 넣어 구색 맞추기를 했다.  

한마디로 난 이런 식의 백인우월주의가 마뜩치 않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오래 전 보았던 <파워 오브 원>이란 영화를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물론 그 작품은 영화적으로 봤을 때 흠잡을 때 없는 작품이긴 하다. 그러나 조금만 눈을 새롭게 떠보면 그 영화는 백인우월주의의 또는 영웅주의의 또 다른 작품이다.  왜 백인만이 유색인종을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더구나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1960년이고, 그 보다 100여년 전에는 링컨의 노예해방을 위한 선언과 전쟁이 있었던 즈음이기도 하다. 링컨의 정신은 높이 살만하지만, 과연 노예해방은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이 맞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노예해방의 남북전쟁은 사실 알고보면 흑인 노예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저 그들을 사이에 둔 힘과 힘의 전쟁이었단 생각밖에는 들지 않는다. 그렇지 않고서야 100년이 흐른 상황에서도 유색인들은 신분은 자유로워졌을지 몰라도 사회적 제약은 전보다 더 심해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가정부가 고작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남편은 술주정뱅이고, 화장실도 마음대로 쓸 수 없다. 그것은 그들에겐 또 다른 구속이 있었다. 그것은 신분 또한 자유하지 못하다는 걸 반증하기도 한다. 

사실 진정한 노예해방이 일어나야 한다면 그들의 정신과 복지 또한 해방이 일어났어야 한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링컨은 무턱대고(?) 무력으로 노예들을 해방시켜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가르치고, 일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고, 군사 훈련도 시킨 후 그때야 비로소 전쟁을 하든 해방을하든 했어야 한다고 본다. 물론 돌이킬 수 없는 먼 과거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 결과 신분의 해방만 주었을뿐 유색인들은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 약탈을 일삼거나 새로운 노예계약에 참여하는 꼴을 면치 못했던 것 아닌가?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건, 지금까지 유색인에 대한 백인의 인종차별을 그린 작품이 이전에도 있을진데 같은 백인이 쓴 작품과 흑인이 쓴 작품이 다를 것이라는 것이다. 예를들면 알렉스 헤일리의 <뿌리> 같은 경우, 원작이나  영화나 그 리얼리티가 선명하게 살아있다. 그런데비해 백인이 아무리 이 문제를 다루더라도 그건 늘상 앞서 말했던대로 백인우월주의나, 영웅주의 형식에서 벗어나질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블론드 하고, 정말 묘한 조합이다. 

그런데 진짜 모르겠는 건, 이 50년전 이야기가 오늘 날 2011년과 무슨 연관이 있어 보인다는 건지 모르겠다. 인종차별은 그때나 지금이나 늘 있어 온 거고, 문체의 현대성을 들어 굳이 이 작품의 위대성을 강조하는가 본데, 이런 주례사도 알고 보면 다 백인들이 쓴 거 아닌가? 과연 작가가 등장시킨 유색인들도 이 주례사에 동의했을지 의문이다.   

자, 이만하면 난 이 작품에 대해 감동할 수 없는 이유를 다 밝혔다고 생각한다. 그러고도 이 작품을 사서 읽고 감동할 독자가 있다면 그건 온전히 그 사람의 몫이긴 할 것이다. 난들 어쩌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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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12 12: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12 13: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예전엔 새로운 책에 대한 정보를 신문에서 얻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웬만한 메이져급 신문사는 북섹션을 따로 제작할 정도로 정성을 쏟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명사들의 책에 대한 주례사가 도마위에 오르기도 하고, 독자들이 그렇게 한정된 매체를 통해 책 정보를 얻는다는 건 그만큼 제한적이라는 말도 된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인터넷이 활성화되면서 여기 저기서 얻는 정보들이 많아지다 보니 꼭 북섹션을 보지 않아도 되고, 그러다 보니 그것의 활용도는 축소가 되었다. 그리고 대신 일반 블로거들에게서 얻는 독후감식 리뷰가 더 신뢰를 얻는 경우가 많아졌다.  

난 기본적으로 이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책은 언제나 소위 말하는 지식인의 전위물은 아니다. 왜 꼭 작가나 교수나 기자 같은 특정인에 의해 그것이 소개되어지고 전파되어져야 하는가. 일반인의 눈높이로 소개되어지고 알려지는 책. 거기에 삶의 애환과 감상이 더해지는 리뷰가 더 좋은 게 아닌가. 하지만 뭐 나 같은 경우엔 꼭 그런 식으로 책을 사 보는 것은 아니다. 거의 동물적 감각에 의존해 책을 읽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물론 이 동물적 감각이란 게 순전히 주관적이긴 하다. 아무리 좋은 책이어도 나에게 맞는 책이 있고, 맞지 않는 책이 있다. 그건 곧 내 취향을 반영하는 책이 될 것이다. 그래야 독서에 대한 실패율을 낮추는 것이 될테니까. 

그런데 지금은 이게 많이 불균형해졌다. 예전에 매체가 다양해지기 전엔 내가 볼 책만 몇 권 그것도 서점에 가서 직접 사 들고 나오면 됐다. 다행히도 그책을 재밌게 읽으면 좋고, 재미가 없거나 기대치에 못 미칠 땐 몇마디 궁시렁거리고 구석에 쳐박아두면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하지만 매체가 여럿이다 보니 책 한 권을 두고도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들을 수도 있고, 아니면 내가 생각하는 바를 올려 그 의견을 보태기도 한다. 좋게 말하면 다양해진거고 나쁘게 말하면 시끄러워졌다. 게다가 출판사를 비롯해 온라인 여기 저기서 책을 준다는 곳이 얼마나 많아졌는지 현금 들이지 않고 책을 읽을 수 있어 좋아지긴 했는데 그에 못지 않게 상처 또는 불만도 많아지는 것 같다.  

특히 사람은 편견의 존재라고 한번 안 좋게 인식이 되면 그 인식이 바뀌기가 쉽지가 않다. 예를들면, 김애란의 <두근두근 내 인생> 같은 경우.  모든 독자가 좋아할 것은 아니지 않는가? 나 같은 경우 이 작품에 대한 과찬이 터무니없어 나름 반박하는 리뷰를 썼다. 그러다 보니 신경이 예민해졌다. 그렇다고 작가가 항상 그런 작품을 쓸거라고는 보지 않는데, 좋다고 하면 오히려 반발심이 생겨 그러다보면 편견은 더 두텁게 쌓여만 가게되는 것이다.

얼마 전엔, 모처에서 백가흠의 최신작을 이벤트 한다고 했는데 응모했다 떨어졌다. 뭐 내가 요즘 소설에 그다지 관심이 가는 건 아닌데 그렇다고 이벤트 한다는데 넋놓고 있으면 손해 아닌가? 내가 그런 기회 아니면 언제 또 요즘 소설의 경향을 알아보겠는가? 나름 그 행운이 나에게 떨어지길 바라며 열심히 손짓을 했는데 떨어지고 보니 이번엔 이상하게 쿨해지지가 않는다. 물론 읽고나서 김애란처럼 예민하게 비난을 퍼부을지도 모른다. 그럴 때 그럴지라도 한번쯤 읽어보고 싶었는데 안 되고 보니 마음이 복잡해 진것이다. 물론 항상 이벤트에 성공하라는 법은 없다. 떨어지면 그냥 나와는 인연이 없는 책이려니 하고 손을 털면 그만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데 떨어지고, 또 내가 그쪽을 평소 많이 애용(?)하고 있었는데, 이벤트 동기가 다른 때와는 달라 담당자에게 한마디 건의를 한다는 게 거미줄에 걸려 넘어진듯 묘한 분위기가 되었다. 그런 중에 속속들이 이 작품에 대한 리뷰들이 올라오고 내용은 거의 칭찬 일색이다.  이 묘한 기분은 언제쯤 떨쳐버릴 수 있을런지 모르겠다. 찬바람이 불면 좀 나아지려나?

또 어디 그뿐인가? 순수한 마음으로 리뷰를 쓰지 못하게 만드는 건 출판사에서 하는 각종 리뷰대회나 매주 또는 매월 리뷰 쓰기를 장려하는 온라인 서점의 장려금 정책이다. 이건 정말 거의 필요악이란 생각도 해 본다. 이런 거라도 있어 안 읽던 책을 읽고, 책값이라도 벌면 그도 어딘가? 그런데 리뷰대회는 나같은 안전주의자는 내 리뷰가 한참 미달인 글인데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들이밀게 된다. 그러다 보면 되는 경우도 몇번 있어 다음에 응모하면서 요행수를 기대해 보게 만든다. 더구나 매월 10일은 묘하게도 신경이 곤두서게 된다. 지금은 그것에 마음을 두지 않으려고 하는데, 누가 이달의 당선작을 내고, 나는 되는가 안되는가에 왜 그처럼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지 모르겠다. 몇개의 분야에서 동시다발로 되는 사람있으면 배 아파 죽을 것 같고. 내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다고,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다. 그러니 책에 대한 상처라고 어찌말하지 않을 수 있으랴? 사랑이 깊으면 상처도 깊다는 말로 이해될 수 있는 건가?  

그런 점에서 옛날이 그리워진다. 매체가 많지 않고, 딱 내 돈 내고 읽을 책만 골라보고 하던 때가. 지금은 그것에 더해져서 할인가에 목매달아 당장 안 볼 책도 언젠간 읽게될 것을 믿고 사지 않는가? 그리고 그런 식으로 천장에 닿을만큼 높이 쌓여진 책들은 다 어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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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1-08-11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금 맥거핀님 서재에 남겼던 댓글 내용을 옮겨 조금 변형하여 남겨봅니다.
(너그러이 이해해주세요^^;;)

저도 작년에 처음 블로그할 때
서재지수, 추천에 좀 민감하게 반응한 적도 있었어요. 그런데 차츰 변하는 저의 모습을
보면서 조금씩 겁이 나면서도 어리석다는 것을 알았어요. 맹점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면
오히려 독서를 하면서 경험을 흔적에 남기는 글쓰기의 목적 자체가 전도되어버리거든요.
그리고 저 이외에도 서재 이웃분들도 그런 마음을 한번쯤은 가졌을 것이라고 생각이 들어서
작년부턴가 아예 서재지수랑 즐겨찾기 수를 확인할 수 있는 거를 비공개로 해버렸어요.
이게 최선의 방안이지는 모르겠지만,, ^^;; 저나 이웃분들이나 서로간에 수치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을 방지하는 차원에서 그렇게 했었답니다.

그래서 좀 편안하게 글쓰게 될 줄 알았는데,, 어제도 느꼈지만,, 과연
내가 쓴 글이 되려 책을 선택하는 분들에게 잘못된 정보와 판단을 주지 않을까
쓸데없는 고민도 해보기도 했었고요,, 그리고 리뷰 대회 이벤트에도
열을 올리게 되니 저도 모르게 책의 장점만 부각시켰는지 아닐까 생각도 들었어요.

그래서 이왕에 한 번에 글을 쓰려면 잘못된 점도 언급도 하고 왠만하면
좀 성실하게 쓴 티가 나도록 쓰려고 해요. 지금으로서는 이게 제가 생각하는
최선의 방안이고요,, 에코의 표현을 비유하자면 누군가가 제 글의 의도성에 대해서
반박한다면 그냥 겸허하게 받아들이려고 해요. 견물생심이라는 말이 있듯이
저 역시 이벤트 상품이나 적립금을 보면 어떻게든 적극적으로 쓰려고 하는 심리,
이것은 당연하다고 봐요.

제 댓글이 스텔라님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에 부합되어 있는지 모르겠지만
살짝 벗어났다면 저의 부족한 이해라고 생각하세요. ^^




2011-08-12 13: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11 2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12 13: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분노하라
스테판 에셀 지음, 임희근 옮김 / 돌베개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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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의 제목은 분노하라가 맞는가? 

왜 이책이 이토록이나 들끊는지 모르겠다.  객관적으로 분노가 건강에 얼마나 안 좋은지는 누구든지 다 아는 사실이다. 분노하는 당사자도 당사자지만, 그것을 지켜보거나 받아줘야 하는 사람 또 무슨 죄란 말인가?  그도 그럴 것이 우리의 분노라는 것이 동대문에서 뺨맞고 남대문에서 화풀이 하는 식이 많지 않은가? 그것은 어찌보면 흡연자보다 비흡연자가 더 위험한 것처럼, 그 사람의 분노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제3자가 더 위험할 것이다. 더구나 한 개인의 분노가 불특정다수에게 행해지는 파급력은 또 얼마나 위험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노하라니! 이책은 단순히 제목만 읽으면 위험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지 않아도 나는 이책을 읽은지 몇주가 지났지만 확실히 뭔가 자극을 받는 것 같고, 선동적이 되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이 얇고 조그만 책이 뭐라고...   

실제로 이책을 읽어보니 과연 제목 그대로가 맞는가 싶기도 했다. 이책에서 저자 스테판 에셀은  말한다. "...... 나는 남들보다 훨씬 오래 살다 보니 분노할 이유들이 끊임없이 생겨났다."고.  우리에겐 낯설긴 하지만, 저자가 독일의 나치 시절 레지스탕스의 일원으로 활동을 한적이 있다. 그때문에 그는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 사형선고까지 받았으나 극적으로 탈출을 하고, 그 이후 그 근거지를 프랑스로 옮겨 계속 저항적인 삶과 행보를 이어갔던 사람이다. 그가 1917년 생이니 그맘도 90이 훨씬 넘었다. 이 노인에게 오래 살다보니 분노할 이유가 끊임없이 생겼다니? 분노도 젊은 때 한때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나이쯤되면 분노를 다스리는 법에 대해 강의를 해야하지 않을까? 사람 저마다 그릇이 있고, 탈란트가 있다는데 아마도 저자는 이 분노하는 일이 맞는가 보다. 그러니 그렇게 분노하고도 저토록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 그렇다고 해서 분노하면 저자처럼 오래 산다. 뭐 이런 식으로 곡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는 않다. 어떤 경우 차라리 분노하는 것이 분노 안 하느니만 못한 사람도 있을 테니.      

그런데 이 할아버지의 책을 가만히 읽어보면 단순히 그냥 분노하라고마는 하지 않는 것 같다. 더 정확히는  저항하라. 즉 저항으로서의 분노를 하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애매한 사람에게 하지말고 우리가 속한 사회에 하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에게도 분노의 시절, 저항의 시절이 있었다  

이책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떠올리는 우리나라 현대사의 한 장면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386세대를 대표로 한 민주화항쟁이다. 그 시절은 독재와 싸워야 하던 시절이었고,  개인 보다는 국가 또는 공동체를 더 많이 생각해야 하는 어찌보면 거대담론의 시대이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의 386 세대를 키워냈던 부모들은 무엇이 두려웠던 건지, 모난돌이 정을 맞는다며 남의 자식 시위 현장에 뛰어드는 걸 막지 못할지라도 내 자식만큼은 쥐 죽은 듯 살아주길 바래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이 대학생들의 시위를 아니꼬운 눈초리로 바라봤던가? 배에 기름이 끼어 저런다며, 말리는 전경을 더 측은한 눈으로 봐라봤던 때도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온탕안의 개구리라고, 시민의 주권을 독재권력에게 담보한 현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무엇인지도 잘 모른 채 시끄러운 것이라면 당췌 못마땅한 우리의 착한 부모님들이 계셨다.  

오죽했으면 박정희나 전두환의 독재시절이 다시 돌아와야 한다고 말하겠는가?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그분들은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만큼 순진하셨다는 말일 것이다. 역사는 독재를 허락한 적이 없다. 독재가 무너진다는 것은 나라를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것과 맘먹는 것이 됨으로, 독재는 그만큼 위험한 것이고  그것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하는 것이었다. 민주화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은,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에 의해 애굽을 나왔을 때 자신에게 어떤 신분의 변화가 있는 것인지 모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더 이상 애굽의 노예 신분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신분의 변화를 알지 못하고, 말할 수 없는 노역에 시달렸는데도 어느 덧 그 시절을 그리워 하는 것이다. 그 시절 먹었던 음식과 비록 몸은 고되더라도 마음마는 편했다고 생각하며 현재의 행군을 불평하는 것이다. 이것이 막상 항쟁을 하고 민주화가 이루어졌을 때 불행 끝. 행복 시작 일줄만 알았던 우리의 부모님이나 우리의 세대가 느끼는 박탈감과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시절을 그리워 하는 거나, 다시 독재가 와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비슷해 보이는 며,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위험해 보이는 것인지 알지 못하는 것 같다.

"희망은 어찌 이리 격렬한가!" 

독재도 일종의 신앙이었을까? 그래서 신앙은 마약이라고 했던 것일까? 독재가 무너졌을 때 행복은 시작되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들끊음으로 조용할 날이 없었다. 무엇이든 하나가 무너지고 새로운 것을 세우려 할 때 그것을 세우기까지 심리적 공허와 비판과 들끊음은 당연히 거쳐야할 과정이다. 그래서 아폴리네르는 <미라보의 다리>란 시에서, "희망은 어찌 이리 격렬한가!"라고 읊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언제나 원했던 건 독재가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합리적이며, 힘있는 정부를 원했다. 그것은 나의 삶과 내 가정의 안위를 보장해 주길 바라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오늘 날의 정부는 예전의 정부와는 다르다.  독재가 무너지고 민주화가 되고보니 여기 저기서 다양한 요구들이 분출되기 시작했다. 이전 세대에 비해 가난하지도 않다. 지난 세기는 하나의 정부를 원했지만, 지금의 정부는 국민들의 다양한 요구들을 들어줘야 하는 멀티플레이가 되어야 한다. 그만큼 변화에 민감하게 대처하는 정부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정부는 그렇지가 못하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확률은 더 높아 보인다. 섣부른 판단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어떤 정권이 들어서도 결과는 마찬가지일거라고 본다. 그럴 때마다 우린 아폴리네르의 저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희망은 어찌 이리 격렬한가!" 

왜 분노해야 하는가?  

책을 읽다보니 현재 프랑스가 안고 있는 문제나,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가 비슷해 보인다. 날로 심해지는 빈부의 격차, 인권의 문제는 정말 우리나라도 심각하다. 특히 인간으로서 살 권리는 심각하게 침해받고 있는 느낌이다. 대학 등록금 문제 때문에 강의실에 있어야 할 대학생들이 이 뜨거운 여름 날 거리에 나와 시위를 해야 한다. 그것을 보면서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 돈에서 한 시도 자유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실감하지 않을 수가 없다. 국민 소득 1만불의 시대가 된지가 벌써 언젠가? 그런데도 우리나라의 최저 임금은 조금도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자살률 역시 높다. 그리고 자살의 동기가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택하는 경우가 많다.  지나친 경쟁과 그로인한 인간관계의 심각한 왜곡. 상업주의와 이기주의. 이 모든 것을 정부가 나서서 해결해야 하는데 거의 뒷짐을 지고 있는 형편이다.  그런 것들을 보면서 과연 오늘 날의 정부에 희망은 있는 것인가, 묻고 싶지 않을 수가 없다.

어찌보면 정부가 힘이 있어진다는 건 위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온전히 나라의 장래와 국민을 위해 힘을 발휘하는 것이라면 좋겠지만, 힘을 위한 힘이라면 그것은 위험할 수가 있다. 이책은 한마디로 국민의 저항을 촉구하는 책이라고 볼 수가 있는데, 그에 대한 지침으로 무관심을 경계하고, 꼭 투표할 것을 권하고 있다. 언제나 나는 선거 때마다 갈등하는 것은 어느 당이든 국민에 의해 정권을 잡으면 꼭 국민을 배신한다. 국민을 대신해 일을 해야하는데 오히려 국민을 볼모로 아슬한 줄타기를 한다. 그런데 저자의 말대로 투표는 해야하는 것인가? 회의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동시에 투쟁하지 않으면 국민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과연 우리나라가 진정으로 국민이 대우 받는 나라였던가? 그건 아니었던 것 같다. 늘 있는 소수를 위해 없는 다수가 희생 당하는 나라였고, 있는 소수의 권력 때문에 저항해야만 하는 나라였다. 결국 그로인해 잡초같은 근성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지 않으면 살 수 없으니.  그러나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는 말은 맞는 말 같다.

희망의 분노, 희망의 저항 

예전엔 무조건 시위하는 무리에 대해 안 좋은 시각이었지만, 지금은 그 인식이 많이 달라졌다. 예전엔 시위하면 최루탄과 화염병으로 기억되지만, 지금은 거의 사라진지 오래다. 그러다 보니 인식도 많이 달라진 것 같다.  1인 시위나 촛불이 그것을 대신했다.    

저항의 목소리도 다양해졌다. 예전엔 '독재타도'였지만, 지금은 여러 가지다. 지난 목요일 한 TV 프로를 보니 수능반대를 위한 시위도 있었고, 대학이 싫어 자퇴하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을 봤다. 거기엔 전혀 무력 같은 것은 없었다. 이책의 저자 스테판 에셀도 친절하게도 저항의 방법까지 가르쳐 주고 있는데, 무저항 비폭력을 강조했다. 그것이 가능할까 싶기도 했는데 과연 가능했던 것이다.  

막상 우리의 젊은이들이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자일 것 같아도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그들의 그런 작은 몸짓에서 뭔가의 희망을 보는 것 같아 흐뭇했다. 우리 땐 감히 꿈도 꾸지 못한 것들을 그들은 하고 있는 것이다.  난 그런 그들의 시위가 작은 열매라도 맺게 되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그래서 대학제국이라 말할 수 있는 대한민국이 더 이상 대학이 그 권력을 휘둘러대지 못하도록 했으면 좋겠다. 대학 등록금의 문제도, 우리와 우리의 이전 세대가 하도 대학 대학하니 결국 우리의 자녀들이 저리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아닌가?  

무저항 비폭력이라는 게 말이 쉽지 실천하기란 쉽지 않다. 차라리 폭력이 쉬워 보인다. 그 방법을 모색하는 것 또한 우리의 몫이다. 말하자면 어디까지 저항할 것인가를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러고 보면 우린 한번도 인간으로 살기를 포기했던 적이 없는 것 같다. 인간으로 살기를 바라는 것. 그것이 우리가 분노하는 것이고, 분노해야할 이유일 것이다.  

사실 이책은 너무 얇기도 하거니와 특별한 것을 말하는 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들끊었던 건 '분노하라'고 직접적으로 말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은 아닌가 싶다. 그것은 분노는 여전히 도덕적이지 못하고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그 누구도 아닌 할아버지뻘 되는 사람이 이렇게 말하니 얼마나 힘이 되고 용기가 되는가? 

나는 우리나라 노인 세대도 분노했으면 좋겠다. 우리의 젊은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누가 대신 우리가 살수있도록 삶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 늙었다고 소외를 언제까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60은 더 이상 노인이 아니라는 세상에서 자신의 삶의 자리를 찾아가야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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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1-08-09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프랑스 할아버지가 주장하고 있는 '분노' 라는 실천적 자세의 제안이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적용되는건 좋은데,, 과연 이 행위가 대중들에게 정말 실천할 수
있도록 각인되었는지 궁금하기도 해요. 올해의 '분노' 신드롬이
10년 전의 홍세화 씨의 똘레랑스가 처음 국내에 소개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 들어요.
처음 국내에 소개될때만해도 신선하고 좋은 반응이 이어졌는데,,
그 신드롬이 오랫동안 유지 못한채 잊혀진거 같아요. 이번 '분노' 신드롬도
똘레랑스 신드롬처럼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으면 하는 개인적인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

stella.K 2011-08-09 13:41   좋아요 0 | URL
저도 처음엔 좀 부정적이었는데
일전에 제가 소개한 <타임>이란 프로를 보면서
우리나라가 나름 시위를 잘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물론 일부 과격한 시위도 없지는 않겠죠.
실제로 2008년 쇠고기 문제가 일어났을 때 시청을 나간 적이 있는데
나름 잘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똘레랑스는 몰라도 분노 신드룸은 한동안 가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우리나라가 원래 분노할 일이 많은 나라잖아요.
그때마다 시위의 방법을 진화시킬 필요를 느끼긴 해요.
이책 읽으면서 무저항 비폭력주의야 말로 민주적 분노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이 조그만 책 리뷰 쓰기가 만만치 않더군요.
생각도 많고, 체력도 저질이고. 읽은지 한참 지나고 나서 쓰는 건데
역시 쉽지가 않더라구요.ㅠ
 
내 이름은 왜? - 우리 동식물 이름에 담긴 뜻과 어휘 변천사
이주희 지음 / 자연과생태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아담을 지으시고 그가 어떻게 자연만물의 이름을 짓나 보시고 짓는 이름이 그대로 사물의 이름이 되었다고 나와있다. 물론 아담이 분류학자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사물의 이름은 인간을 위하여, 인간에 의해 지어진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그게 또 꼭 인간을 위한 것이기만 하겠는가? 김춘수의 시를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아무리 하찮은 것이더라도 이름은 반드시 주어져야 한다. 그래야 사물과 사물끼리 구분하기도 좋을뿐만 아니라 사물에게도 나름의 격을 부여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요, 인격이 있는 존재라면 사물에게도 나름의 격을 부여하는 것이 인격을 갖춘자의 몫은 아닐까?   

이책은 우리 동식물의 이름에 담긴 뜻과 어휘의 변천사를 다루고 있다. 읽다보면 새삼 아, 이런 뜻이었구나 흥미롭기도 하고,  내가 잘못알고 있는 것도 바로 알게되며, 왜 이런 것들에 대해 무관심했을까? 나의 무지함을 깨닫게도 된다.

특히 인간에 의해 이름이 붙여지긴 했지만, 오랜 세월 흘러오면서 다른 것과 섞여지기도하고 본래의 의미는 퇴색된 체 와전된 그것이 정식 명칭인 양(때론 뜻인 양) 잘못 알고 있는 예들이 많다는 것을 이책을 보며 새롭게 알았다. 흥미로운 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백조'는 일본인이 만든 한자어라고 한다. 그것은 백조가 아니라 '고니'라고 쓰는 것이 맞다고 한다. 그것의 발전은 '곤'이란 중세국이에서 곤 > 곤이 > 고니로 변화를 겪었다는 말이다.(199p) 하지만 이것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렇다면 우리가 잘 아는 차이콥스키의 <백조의 호수>도 알고보면 '고니의 호수'가 되어야하는 것이 맞는 얘기일 것 같다. 하지만 고니의 호수는 또 얼마나 어색한 제목인가?  

그밖에도 한글인데 한자처럼 쓰인다든지, 반대로 한자인데 한글처럼 쓰이는 명칭에 대해서도 의식을 바로잡고 있으며, 동물이나 식물의 이름이 왜 지금의 그런 이름이 되었는가에 대해 쉽고도 명료하게 밝혀놓고 있다. 그렇게 하나 하나 알아가다보면 하찮은 것들이 더 이상 하찮은 것이 아니며 나름의 이름값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책은 청소년들을 위해 썼다고 하는데 어른들이 봐도 유익하다. 앞에서 잠깐 백조와 고니에 관한 이야기를 했지만 무엇을 새롭게 아는 것은 좋지만, 잘못 알고 있는 것을 바로 알고 그것을 고쳐나가는 것은 쉽지 않다. 그것은 사람의 인식을 의도적으로 변화시키는 노력이 필요한데 그 변경에 따른 기억 회로를 새롭게 해야한다는 귀찮음 때문에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인간의 언어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새롭게 태어나고 사라져 갔다. 앞으로 우리 후대의 사람들이 사물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할 수 있도록 우리가 바로 알고 바로 전달해 줘야한다. 그렇다면 우리 당대의 귀찮음 정도야 아무 것도 아니지 않을까? 우리 당대에서 알고 끝나는 것이라면 그것은 반쪽짜리 앎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저자를 비롯해 이런 일에 헌신하는 사람들의 노력이 새삼 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쯤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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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대중문화>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어제 TV 뉴스를 보니, 현빈이 해병대 훈련 받은 모습을 찍은 사진집이 나왔다고 한다. 현빈이 난 사람은 난 사람인가 보다. 조인성이가 군대를 들어갔나 나와도 그의 사진집은 고사하고 훈련 받는 엉덩이 조차  볼 수 없었는데, 현빈은 이렇게 사진집까지 떡하니 나오고.  

그렇수밖에 없는 것이, 그는 인기 절정에 있을 때 군대를 갔을 뿐만 아니라, 가장 힘들다는 해병대를 지원했으니 그를 보는 마음 팬들의 마음이 오죽 저릿할까? 난 뭐 상업주의 냄새나는 저 책을 꼭 보고 싶은 생각은 없는데 그래도 어제 뉴스에서 저 책을 소개하면 남긴 그의 인터뷰 내용은 참 인상 깊다. 

그는 자신의 한계를 뛰어 넘고자 해병을 지원했다고 했다. 물론 못 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단다. 그러나 일단 해 보고 실패하는 것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낫고 생각한다며, 자신이 해병대를 지원한 것에 대해 추호의 후회가 없는 것처럼 말했다. 그런데 그런 그의 말이 왜 그렇게 나의 마음을 후비는 것인지...  

예전에 그 알량한 연극을 했을 때, 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잘할 수 없다면 아예 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말을 거의 입에 달고 살아었다.  나는 그다지 완벽주의자가 못되는데 보여지는 것에 신경을 많이 쓰다보니 그런 말을 자주했던 것 같다. 또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함께했던 사람들의 임하는 자세가 그다지 진지하지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나 자신도 완벽할 수 없으면서 그런 말을 어쩌면 그렇게 열심히 자주 써 먹었는지 모르겠다. 물론 누구는 나의 그런 말을 들어도 싼 사람이 있지만, 모든 사람은 다 똑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누구는 정말 잘 못하지만 현빈의 말처럼 실패할 것이 두려워 아무 것도 안하는 것 보다 실패할 때 실패하더라도 도전해 보겠다고 연습하고 무대에 섰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나의 그런 말 보다 현빈의 그 말이 더 맞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때 왜 난 그말을 사람들에게 해 주지 못했을까?  

확실히 이름은 잘 짓고 볼 일이다. 현빈 그는 어쩌면 그리도 태평양 같은 긍정적인 마음을 가졌던 걸까? 그는 또한 자기가 사람들로부터 잊혀지는 것을 그다지 겁내하지 않았는 것 같았다. 잊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단다. 하지만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확실히 멋진 놈이다. 그런데 어제 그 뉴스 보다 중 그의 군입대전 마지막 작품이었던 <시크릿 가든>의 주제곡이 잠깐 흘렀다. 그걸 들으니 그 드라마를 다시 보고 싶어졌다. 특히 겨울을 배경으로 찍었기 때문에 이런 여름에 보면 더위가 좀 달래지지 않을까? 

어쨌든, 언제나 그렇듯 평가단에서 보내 준 책을 미처 채 펼쳐보기도 전에 또 좋든 싫든 주목하는 신간을 작성해야 하는 순간이 돌아왔다.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아무래도 예술/대중문화 분야에서 가장 강력한 후보가 이책은 아닌가 싶다. 진중권. 이미 그 이름만으로도 하나의 트렌드가 되지 않았을까? 그는 중요한 잇슈가 있을 때마다 칭찬을 받던 비난을 받던 기꺼이 논객이 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의 논쟁이 옳든 그르든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그가 때로 좋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우리나라는 남과 다르면 그것을 못 견뎌하는 경향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책이 380페이지로 두께도 만만치 않지만 과연 이 어려운 현대미술을 어떻게 대중이 알아먹을 수 있도록 그만의 언어로 풀어놨을지 궁금하다. 사실 그의 대표적 저서가 <미학 오딧세이>인데 미학을 가장 대중적으로 쉽게 풀었다고 해서 주목 받은 책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은 잊혀진 얘기지만, 몇년 전, 멋모르고 1권을 읽을 때 이것도 만만치 않구나 했다.  이것도 역시 그럴 공산이 커 보이긴 하지만, 그후  알게 모르게 미술에 관한 알량한 지식을 좀 쌓아놨으니 그래도 읽는데 어려워 참혹함을 느낄 정도는 아닐거라고 본다.  

그동안 평가단 책 어렵다고 적지않은 불만을 토로했지만, 다음 달에 이책을 선정도서로 보내 준다면 아무리 어려워도 불만 같은 건 절대로 터뜨리지 않을 것이다.ㅋ 더구나 이건 MD의 초이스이기도 하니 더욱 기대해 볼만 하지 않을까?  

대부 시나리오 & 제작노트

이책을 보는 순간 웃음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책의 역자가 나의 사부다. 어쩐지...!ㅋ 

정말 이책을 나의 사부가 아니면 누가 번역을 한단 말인가? 수년 전 강의를 들었을 때 사부는 지금도 1년의 한번은 꼭 이 영화를 보며, 지금까지 수없이 많이 베껴쓰기를 해 왔다고 말씀하셨다. 그만큼 이 작품에 바치는 선생님의 경의는 대단했다.  

하지만 난 아무래도 여자라 그런지 이 영화가 잘 만든 영화라는 건 알겠는데 경의를 표할 정도는 아니었다. 마초들의 영화라서 그런가? 1편을 본 건 확실히 기억은 나는데 2,3편은 보았는지 기억에 없다.  내가 선생님께로부터 그말을 들었을 때 선생님이 과연 여자였어도 최고의 영화를 <대부>라고 했을까? 내가 남자였다면 정말 가슴속 깊이 절절하게 동감했을지도 모르는데, 선생님은 남자요, 나는 여자라는 사실이 그때처럼 그렇게 멀게 느꼈던 때도 없었다. 거기엔 뭔가 모르게 큰강이 흐르고 있는 것 같았다. 도저히 좁혀질 수 없는 강이.  

그래도 이 작품이 명작이라는 것엔 이의가 없고 시나리오 앤 제작노트가 나왔다니 궁금하긴 하다. 이책을 평가단에서 선정해 줄 수는 없을까? 값자기 기를 팍팍 불어넣고 싶어졌다. 더구나 나의 사부의 책이기도 하니.ㅋ  

조선인극장 단성사 1907~1939

       

 지금 단성사가 없어지긴 했을 것이다. 대한극장도 없어지지 않았나? 내가 국민학교(지금은 초등학교지만 나 때는 국민학교였다)를 졸업했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아는가? 그것은 관람불가의 영화만 아니라면 극장을 드나들어도 된다는 말도 됐다. 물론 국민학생도 가지 말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그때만해도 어른과 동반입장이 아니라면 쉽지 않았던 때였다. 지금은 언감생심이다.  

극장에서 본 나의 첫 영화가 <챔프>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렇다고 혼자나 친구들과 보러간 것은 아니고 , 당시의 과외 선생님과 같이 보러갔다. 그때 간 극장이 단성사 아니면 대한극장이었던 것 같은데 어느 게 맞는지 기억엔 확실치 않다.  

그런데 그렇게 나 때도 단성사가 있었던 게 확실한데 이책은 1939년도에 폐관했던 것으로 나온다. 그렇다면 나 때 단성사란 극장은 어떻게 된 걸까? 누가 훗날 그 명맥을 이었던 걸까? 아니면 누가 극장을 세우면서 그 이름이 갖는 상징성이 좋아서 차용을 했던 것일까? 어쨌거나 이책을 본 순간 호기심이 동한다. 그런데 그 영화관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내는데 고작 216페이지뿐이 할애하지 않았다.  조금은 아쉬운 분량이긴 하지만, 일제시대 이 영화관이 어떻게 문을 열었으며 폐관했는지 문화사적 관점에서 상당히 궁금하다.   

빈에서는 인생이 아름다워진다

박종호는 음악평론가이면서 거의 유럽통(그중에서도 이탈리아) 은 아닐까 싶다. 특히 그의 오페라 사랑은 끔찍해서, 언젠가 오페라의 종주국이라 할 수 있는 이탈리아에 관한 그의 책을 읽고 입이 쩍 벌어졌던 기억이 난다. 어쩌면 그리도 수려하게 글을 잘 쓰던지 질투가 날 정도였다. 더구나 이탈리아는 나의 로망이기도 하다(비록 다리가 안 좋아 죽기전에 가 보겠다는 장담을 할 수 있는 처지는 못되지만). 전에 얼핏 듣기로 그는 이탈리아를 너무 사랑해 매년 다녀온다는 얘기를 들었던 것 같다.

사실 그는 질투의 대상인 것마는 확실하다. 클래식 음반만을 취급한다는 <풍월당> 대표이기도 하지만, 그의 본래 직업은 정신과 의사다. 의사 하나를 하거나 음반점 하나 하기도 힘들 텐데 프로필이 이러니 질투 할만도 하지 않은가?  

어쨌든 그런 그가 이젠 오스트리아 빈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다. 얼마나 화려한 문체로 그곳에 대한 경의를 표하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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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06 17: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1-08-07 10:01   좋아요 0 | URL
넵.ㅋㅋ

cyrus 2011-08-07 0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빈 사진집도 예술 부문 신간도서가 될 수 있군요. 저 역시 예술 신간도서로
진중권 씨의 책이 될거라고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제 생각이지만 노성두, 이주헌, 이명옥 씨도 있지만 진중권 씨 역시 대중들을 위해서 미술을 쉽고 재미있게 소개한 몇 안 되는
저자라고 생각해요. 저도 처음에 <미학 오디세이 1>을 읽었을 때 미학이라는 내용이
쉽게 와닿지 않았는데,, 계속 읽다보니 이해가 가더라고요, 그리고 <오디세이> 책
내용 구성도 재미있었고요. 그래도 이번에 나온 현대 미술편 서양미술사,,
만만히 보면 안 될거 같아요. 아무래도 현대미술 내용은 좀 어려울거 같아요.
각오 단단히 하시는게 좋을거에요 ^^

stella.K 2011-08-07 10:07   좋아요 0 | URL
뭐 현빈의 사진집도 예술 부문이긴 하죠.
그런데 저런 책을 평가단에서 선정할리는 없다고 봐요.
그냥 마침 그런 책이 나왔다길래 생각나서 썼을 뿐이구요,
진중권의 책이 좀 어렵긴 하겠죠? 겁은 좀 나긴 하는데
그래도 이 분야 평가단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 이책을 뽑았더라구요.
선정도서가 될 확률이 높겠죠?
사실 저 개인적으론 단성사와 박종호가 가장 많이 끌리기는 하는데
박종호는 수필 같은 느낌이 있어서 아마 안 될 것 같아요...ㅠㅠ

2011-08-09 08: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1-08-09 13:51   좋아요 0 | URL
나이들어도 멋있잖아요, 박종호님.
너무 멋있어도 다가가긴 어렵던데.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