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하라
스테판 에셀 지음, 임희근 옮김 / 돌베개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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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의 제목은 분노하라가 맞는가? 

왜 이책이 이토록이나 들끊는지 모르겠다.  객관적으로 분노가 건강에 얼마나 안 좋은지는 누구든지 다 아는 사실이다. 분노하는 당사자도 당사자지만, 그것을 지켜보거나 받아줘야 하는 사람 또 무슨 죄란 말인가?  그도 그럴 것이 우리의 분노라는 것이 동대문에서 뺨맞고 남대문에서 화풀이 하는 식이 많지 않은가? 그것은 어찌보면 흡연자보다 비흡연자가 더 위험한 것처럼, 그 사람의 분노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제3자가 더 위험할 것이다. 더구나 한 개인의 분노가 불특정다수에게 행해지는 파급력은 또 얼마나 위험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노하라니! 이책은 단순히 제목만 읽으면 위험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지 않아도 나는 이책을 읽은지 몇주가 지났지만 확실히 뭔가 자극을 받는 것 같고, 선동적이 되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이 얇고 조그만 책이 뭐라고...   

실제로 이책을 읽어보니 과연 제목 그대로가 맞는가 싶기도 했다. 이책에서 저자 스테판 에셀은  말한다. "...... 나는 남들보다 훨씬 오래 살다 보니 분노할 이유들이 끊임없이 생겨났다."고.  우리에겐 낯설긴 하지만, 저자가 독일의 나치 시절 레지스탕스의 일원으로 활동을 한적이 있다. 그때문에 그는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 사형선고까지 받았으나 극적으로 탈출을 하고, 그 이후 그 근거지를 프랑스로 옮겨 계속 저항적인 삶과 행보를 이어갔던 사람이다. 그가 1917년 생이니 그맘도 90이 훨씬 넘었다. 이 노인에게 오래 살다보니 분노할 이유가 끊임없이 생겼다니? 분노도 젊은 때 한때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나이쯤되면 분노를 다스리는 법에 대해 강의를 해야하지 않을까? 사람 저마다 그릇이 있고, 탈란트가 있다는데 아마도 저자는 이 분노하는 일이 맞는가 보다. 그러니 그렇게 분노하고도 저토록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 그렇다고 해서 분노하면 저자처럼 오래 산다. 뭐 이런 식으로 곡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는 않다. 어떤 경우 차라리 분노하는 것이 분노 안 하느니만 못한 사람도 있을 테니.      

그런데 이 할아버지의 책을 가만히 읽어보면 단순히 그냥 분노하라고마는 하지 않는 것 같다. 더 정확히는  저항하라. 즉 저항으로서의 분노를 하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애매한 사람에게 하지말고 우리가 속한 사회에 하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에게도 분노의 시절, 저항의 시절이 있었다  

이책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떠올리는 우리나라 현대사의 한 장면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386세대를 대표로 한 민주화항쟁이다. 그 시절은 독재와 싸워야 하던 시절이었고,  개인 보다는 국가 또는 공동체를 더 많이 생각해야 하는 어찌보면 거대담론의 시대이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의 386 세대를 키워냈던 부모들은 무엇이 두려웠던 건지, 모난돌이 정을 맞는다며 남의 자식 시위 현장에 뛰어드는 걸 막지 못할지라도 내 자식만큼은 쥐 죽은 듯 살아주길 바래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이 대학생들의 시위를 아니꼬운 눈초리로 바라봤던가? 배에 기름이 끼어 저런다며, 말리는 전경을 더 측은한 눈으로 봐라봤던 때도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온탕안의 개구리라고, 시민의 주권을 독재권력에게 담보한 현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무엇인지도 잘 모른 채 시끄러운 것이라면 당췌 못마땅한 우리의 착한 부모님들이 계셨다.  

오죽했으면 박정희나 전두환의 독재시절이 다시 돌아와야 한다고 말하겠는가?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그분들은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만큼 순진하셨다는 말일 것이다. 역사는 독재를 허락한 적이 없다. 독재가 무너진다는 것은 나라를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것과 맘먹는 것이 됨으로, 독재는 그만큼 위험한 것이고  그것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하는 것이었다. 민주화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은,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에 의해 애굽을 나왔을 때 자신에게 어떤 신분의 변화가 있는 것인지 모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더 이상 애굽의 노예 신분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신분의 변화를 알지 못하고, 말할 수 없는 노역에 시달렸는데도 어느 덧 그 시절을 그리워 하는 것이다. 그 시절 먹었던 음식과 비록 몸은 고되더라도 마음마는 편했다고 생각하며 현재의 행군을 불평하는 것이다. 이것이 막상 항쟁을 하고 민주화가 이루어졌을 때 불행 끝. 행복 시작 일줄만 알았던 우리의 부모님이나 우리의 세대가 느끼는 박탈감과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시절을 그리워 하는 거나, 다시 독재가 와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비슷해 보이는 며,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위험해 보이는 것인지 알지 못하는 것 같다.

"희망은 어찌 이리 격렬한가!" 

독재도 일종의 신앙이었을까? 그래서 신앙은 마약이라고 했던 것일까? 독재가 무너졌을 때 행복은 시작되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들끊음으로 조용할 날이 없었다. 무엇이든 하나가 무너지고 새로운 것을 세우려 할 때 그것을 세우기까지 심리적 공허와 비판과 들끊음은 당연히 거쳐야할 과정이다. 그래서 아폴리네르는 <미라보의 다리>란 시에서, "희망은 어찌 이리 격렬한가!"라고 읊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언제나 원했던 건 독재가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합리적이며, 힘있는 정부를 원했다. 그것은 나의 삶과 내 가정의 안위를 보장해 주길 바라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오늘 날의 정부는 예전의 정부와는 다르다.  독재가 무너지고 민주화가 되고보니 여기 저기서 다양한 요구들이 분출되기 시작했다. 이전 세대에 비해 가난하지도 않다. 지난 세기는 하나의 정부를 원했지만, 지금의 정부는 국민들의 다양한 요구들을 들어줘야 하는 멀티플레이가 되어야 한다. 그만큼 변화에 민감하게 대처하는 정부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정부는 그렇지가 못하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확률은 더 높아 보인다. 섣부른 판단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어떤 정권이 들어서도 결과는 마찬가지일거라고 본다. 그럴 때마다 우린 아폴리네르의 저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희망은 어찌 이리 격렬한가!" 

왜 분노해야 하는가?  

책을 읽다보니 현재 프랑스가 안고 있는 문제나,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가 비슷해 보인다. 날로 심해지는 빈부의 격차, 인권의 문제는 정말 우리나라도 심각하다. 특히 인간으로서 살 권리는 심각하게 침해받고 있는 느낌이다. 대학 등록금 문제 때문에 강의실에 있어야 할 대학생들이 이 뜨거운 여름 날 거리에 나와 시위를 해야 한다. 그것을 보면서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 돈에서 한 시도 자유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실감하지 않을 수가 없다. 국민 소득 1만불의 시대가 된지가 벌써 언젠가? 그런데도 우리나라의 최저 임금은 조금도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자살률 역시 높다. 그리고 자살의 동기가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택하는 경우가 많다.  지나친 경쟁과 그로인한 인간관계의 심각한 왜곡. 상업주의와 이기주의. 이 모든 것을 정부가 나서서 해결해야 하는데 거의 뒷짐을 지고 있는 형편이다.  그런 것들을 보면서 과연 오늘 날의 정부에 희망은 있는 것인가, 묻고 싶지 않을 수가 없다.

어찌보면 정부가 힘이 있어진다는 건 위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온전히 나라의 장래와 국민을 위해 힘을 발휘하는 것이라면 좋겠지만, 힘을 위한 힘이라면 그것은 위험할 수가 있다. 이책은 한마디로 국민의 저항을 촉구하는 책이라고 볼 수가 있는데, 그에 대한 지침으로 무관심을 경계하고, 꼭 투표할 것을 권하고 있다. 언제나 나는 선거 때마다 갈등하는 것은 어느 당이든 국민에 의해 정권을 잡으면 꼭 국민을 배신한다. 국민을 대신해 일을 해야하는데 오히려 국민을 볼모로 아슬한 줄타기를 한다. 그런데 저자의 말대로 투표는 해야하는 것인가? 회의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동시에 투쟁하지 않으면 국민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과연 우리나라가 진정으로 국민이 대우 받는 나라였던가? 그건 아니었던 것 같다. 늘 있는 소수를 위해 없는 다수가 희생 당하는 나라였고, 있는 소수의 권력 때문에 저항해야만 하는 나라였다. 결국 그로인해 잡초같은 근성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지 않으면 살 수 없으니.  그러나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는 말은 맞는 말 같다.

희망의 분노, 희망의 저항 

예전엔 무조건 시위하는 무리에 대해 안 좋은 시각이었지만, 지금은 그 인식이 많이 달라졌다. 예전엔 시위하면 최루탄과 화염병으로 기억되지만, 지금은 거의 사라진지 오래다. 그러다 보니 인식도 많이 달라진 것 같다.  1인 시위나 촛불이 그것을 대신했다.    

저항의 목소리도 다양해졌다. 예전엔 '독재타도'였지만, 지금은 여러 가지다. 지난 목요일 한 TV 프로를 보니 수능반대를 위한 시위도 있었고, 대학이 싫어 자퇴하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을 봤다. 거기엔 전혀 무력 같은 것은 없었다. 이책의 저자 스테판 에셀도 친절하게도 저항의 방법까지 가르쳐 주고 있는데, 무저항 비폭력을 강조했다. 그것이 가능할까 싶기도 했는데 과연 가능했던 것이다.  

막상 우리의 젊은이들이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자일 것 같아도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그들의 그런 작은 몸짓에서 뭔가의 희망을 보는 것 같아 흐뭇했다. 우리 땐 감히 꿈도 꾸지 못한 것들을 그들은 하고 있는 것이다.  난 그런 그들의 시위가 작은 열매라도 맺게 되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그래서 대학제국이라 말할 수 있는 대한민국이 더 이상 대학이 그 권력을 휘둘러대지 못하도록 했으면 좋겠다. 대학 등록금의 문제도, 우리와 우리의 이전 세대가 하도 대학 대학하니 결국 우리의 자녀들이 저리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아닌가?  

무저항 비폭력이라는 게 말이 쉽지 실천하기란 쉽지 않다. 차라리 폭력이 쉬워 보인다. 그 방법을 모색하는 것 또한 우리의 몫이다. 말하자면 어디까지 저항할 것인가를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러고 보면 우린 한번도 인간으로 살기를 포기했던 적이 없는 것 같다. 인간으로 살기를 바라는 것. 그것이 우리가 분노하는 것이고, 분노해야할 이유일 것이다.  

사실 이책은 너무 얇기도 하거니와 특별한 것을 말하는 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들끊었던 건 '분노하라'고 직접적으로 말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은 아닌가 싶다. 그것은 분노는 여전히 도덕적이지 못하고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그 누구도 아닌 할아버지뻘 되는 사람이 이렇게 말하니 얼마나 힘이 되고 용기가 되는가? 

나는 우리나라 노인 세대도 분노했으면 좋겠다. 우리의 젊은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누가 대신 우리가 살수있도록 삶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 늙었다고 소외를 언제까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60은 더 이상 노인이 아니라는 세상에서 자신의 삶의 자리를 찾아가야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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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1-08-09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프랑스 할아버지가 주장하고 있는 '분노' 라는 실천적 자세의 제안이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적용되는건 좋은데,, 과연 이 행위가 대중들에게 정말 실천할 수
있도록 각인되었는지 궁금하기도 해요. 올해의 '분노' 신드롬이
10년 전의 홍세화 씨의 똘레랑스가 처음 국내에 소개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 들어요.
처음 국내에 소개될때만해도 신선하고 좋은 반응이 이어졌는데,,
그 신드롬이 오랫동안 유지 못한채 잊혀진거 같아요. 이번 '분노' 신드롬도
똘레랑스 신드롬처럼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으면 하는 개인적인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

stella.K 2011-08-09 13:41   좋아요 0 | URL
저도 처음엔 좀 부정적이었는데
일전에 제가 소개한 <타임>이란 프로를 보면서
우리나라가 나름 시위를 잘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물론 일부 과격한 시위도 없지는 않겠죠.
실제로 2008년 쇠고기 문제가 일어났을 때 시청을 나간 적이 있는데
나름 잘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똘레랑스는 몰라도 분노 신드룸은 한동안 가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우리나라가 원래 분노할 일이 많은 나라잖아요.
그때마다 시위의 방법을 진화시킬 필요를 느끼긴 해요.
이책 읽으면서 무저항 비폭력주의야 말로 민주적 분노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이 조그만 책 리뷰 쓰기가 만만치 않더군요.
생각도 많고, 체력도 저질이고. 읽은지 한참 지나고 나서 쓰는 건데
역시 쉽지가 않더라구요.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