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힌트
이츠키 히로유키 지음, 채숙향 옮김 / 지식여행 / 2013년 8월
평점 :
품절


언제부턴가 저자의 책들이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나오고 있다. 뭔가 문학계에서는 굵직한 작가일 것 같지만, 그동안 나와는 인연이 없다가 이번에 이 책으로 인연을 맺었다. 

 

글쎄, 날씨가 더워서일까? 아니면 책이 주는 장중함 때문일까? 난 사실 이 책을 다 읽지는 못했다. 하긴, 그 책을 말하는데 있어서 꼭 그 책을 다 읽고 말해야 하는 것일까? 그러면 좋겠지만, 피에르 바야르(그의 저서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을 들어)처럼 책은 꼭 다 읽지 않았다고 해서 그 책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가급적 다 읽고 얘기하는 것이 좋기는 할 것이다. 그것이 독자로서 저자에게나, 번역자에게나 심지어는 이 책을 출판한 출판사에 대한 예의가 될 것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붙들고 앉아 이 책에 대한 찬사를 지연시킬 것인가? 이 책에 대한 찬사를 읽는 중에는 하지 말아야할 이유나 법은 없다. 물론 책 중에는 나름 잘 나가다가 맨 마지막에 김이 빠지는 그런 책도 간혹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산문집이다. 일정한 패턴을 가지고 저자의 사유를 전하는 책이기 때문에 읽다기 김이 빠지는 반전은 없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내내, '대단하다!'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읽었다. 그것은 글 하나 하나에 대한 제목이 동사형으로 제시되어 있는 것도 독특했지만, 그에 대한 사유의 깊이 또한 시쳇말로 장난이 아니다. 사실 젊었을 때는 산문집에 그다지 마음이 없었다. 개인의 생각(그것이 아무리 유명한 작가여도)을 '산문'이란 이름하에 '짓꺼리는' 정도인데 뭐 그리 대단할까 싶어 그리 마음을 두지 않은 때도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점점 산문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우리가 왜 산문을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이유를 나는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했다. 단지 나는 여타 작가들의 산문집을 읽으면 생각이 맑아지고, 감염된 듯 생각이 깊어지며,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작가에 대해 일종의 쾌감 내지는 동감을 할 수 있게 되어서 종종 산문집을 읽는다.

 

하지만 이츠키 히로유키의 이 책은 내가 이제까지 읽는 산문집과는 또 다른 감흥을 준다. 작가 개인의 산문을 누구와 비교한다는 건 엄밀한 의미에서 불가하지만, 이런 산문이 전에도 있었는가 싶게 깊이가 있다. 물론 또 그만큼 책이 쉽게 읽히는 건 아니다. 산문을 이 더운 여름 날 이렇게 어렵게(?) 읽어야 하다니 한심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전에 내가 읽었던 산문들은 이 정도의 깊이를 요하지는 않았거든. 한마디로 된통 당한 느낌이 들기도 하다. 어찌보면 산문이라기 보단 '인생론'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그런데 책에서도 밝힌 바 있지만 작가는 인생론을 쓰는 것을 꺼려한다고 했다. 그래서 대신 '삶의 힌트'란 다소 은유적으로 비껴 간 것일까? 

 

읽다보면 자주 마주치는 저자의 어법이 있다. '...한 것은 아닐까요?'라며 우리의 지금까지의 고정관념 같은 생각에 도전을 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침묵은 금이라 했는데 과연 침묵이 금 맞느냐고, 누구는 오히려 많은 말을 하라고 했다며 생각의 전환을 유도하는 글들이 각 장마다 나타나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설득과 논리가 때론 작가의 삶의 깊이에서 우러나와 유장한 느낌마저도 든다. 그러면서 왜 나는 지금까지 저자의 책을 읽을 기회를 유보해 온 것일까? 급후회가 들 정도다. 아무리 문학계의 아이돌을 우논하며 젊은 작가들의 문체의 독특함과 새로움을 띄우는 경향이 있다지만, 오래된 작가의 문장의 유려함과 깊이를 과연 그들이 따라 갈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문학은 인간의 삶과 비례에서 발달해 온 산물이기 때문에. 

 

지금은 날씨가 더워도 너무 덥다. 잠 못 드는 열대의 밤이 계속되고 있다. 어느 정도 밤에도 선선한 바람이 불면 이 책의 나머지 부분을 마저 읽을 생각이다. 그리고 올해 나의 완독리스트에 이 책을 꼭 올릴 것이다. 그리고 기회있을 때마다 저자의 다른 책도 읽어 볼 생각이다. 이 책, 한 마디로 강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공효진이나 소지섭이 나름 좋아라 하는 배우여서 이 드라마에 기대가 있었다. 그런데 이 드라마 시작부터 좀 거슬린다. 귀신을 전면에 등장시키는 것이다. 물론 내가 호러를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공효진이니까, 소지섭이니까 눈 딱 감고 봐 주려고 했다. 뭐 또 이런 더워 죽겠는 여름 밤 호러를 드라마에 편성하는 것도 나름 시청자를 위한 배려일테니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까짓 꺼 못 보겠으면 안 보면 그만이니까. 

 

그런데 이거 해도 좀 너무 한다 싶다. 초반부터 귀신을 너무 많이 등장 시킨다. 등장하는 귀신마다 어쩌면 이미지가 다 다를 수 있는지, 그 이미지의 끝은 어딜까? 놀랍기도 하다. 뭐 그것도 다재다능이라면 다재다능이겠지. 하지만 사람이 죽는다고 해서 다 귀신 되나? 어떤 영혼이 귀신이 되는 건지 이 드라마에서의 그 선정기준이 뭔지 궁금하다. 뭐 흔히 들 알고 있기는 한이 많은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된다고 하지만 그것도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오는 전설 같은 이야기지 정말 그런지 어떤 지는 알 수가 없다. 

 

어쨌든 이 드라마에선 사람이 죽으면 다 귀신 되는 것처럼 보여지고 있는데 이런 식으로 죽은 영혼과 시청자를 우롱해도 될까 모르겠다. 물론 나름의 교육적 효과는 있을 수도 있겠다. 요즘 자살하는 사람이 많은데 죽어서 귀신 된다고 생각하면 자살도 신중히 고려하게 되지 않을까? 하지만 사람이 죽으면 다 귀신 된다고 생각하면 거 기분 나빠서 어디 죽겠나?   

 

뭐 이야기의 재미를 위해서 귀신 신나락 까먹게 했다. 그렇게도 말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좀 극단은 피해가야 하지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너무나 인간적이지만 현실감각 없는 당신에게
발타자르 그라시안 지음, 임정재 옮김 / 타커스(끌레마) / 201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지혜는 어떻게 오는 것일까?

 

내가 요즘 보고 있는 드라마가 있다.  그것은 M 본부에서 하는 <여왕의 교실>이다. 처음엔 제목이 그다지 끌리지 않아 봐야할까 망설이기도 했다. 사실 제목에서 느끼는 것은 대충,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이상에 들뜬 선생님이 아이들을 신사와 숙녀로 만드는 다소 트렌디한 드라마는 아닐까 싶기도 했고, 아니면 학교 현장을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서 다분히 교훈적이고, 도덕적인 드라마는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렇게 호기심 반, 의심 반 하는 드라마가 어딘가 모르게 좀 독특한데가 있어 이내 보게 만든다. 그것은 무엇보다 6학년에 부임한 마여진 선생의 독특한 캐릭터 때문이다. 

 

이 마여진 선생은 여느 선생과는 다르다. 전혀 웃을 줄 모르며, 무엇 때문인지 한 여름에도 우중충한 옷을 목까지 감아 오르도록 입고, 아이들에겐 혹독하게 공부만 시키는 선생님이다. 같은 동료 선생님에게도 어찌나 야멸찬지 도무지 빈 틈이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다. 또한 아이들에게 노골적으로 차별과 냉대를 일삼으며, 그것도 부족하여 자신의 심복으로 삼아 서로를 감시하게 만들고, 일부러 싸움을 부추기기도 한다. 요즘 말로 하면 배울 것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왕싸가지' 선생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이 선생님의 또 다른 점은, 아이들에 대해서 만큼은 책임 의식이 투철하다는 것이다. 어디선가 누군가의 무슨 일이 생기면 나타나 아이들을 위기에서 건져 준다는 것이다. 마치 짱가처럼. 거기엔 또 남다른 촉수가 있는데, 그녀는 늘 아이들을 알게 모르게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마여진 선생은 현실에선 좀처럼 있을 법하지 않은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런데도 이 캐릭터에 빠져드는 것은, 어쩌면 그녀가 진짜 선생일지도 모른다는 믿음을 갖게 만든다는데 있다. 그녀는 어쩌면 부도덕을 통해 도덕을 가르치는 선생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이들의 집단 심리를 이용해 아주 현실적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애초부터 인기 많은 좋은 선생이될 생각이 없었다. 처음부터 반 전체를 쥐고 흔드는 악인이 되기를 자처했으며, 그 가운데 아이들의 이기적인 심리를 여지 없이 드러나게 하며 동시에 이런 이기적인 힘이 판치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 남을 것인가를 은연 중 가르쳐 주는 것도 같다.  

 

이렇게 나는 이 드라마를 보면서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사실 보통의 (초등학교)선생님이라면 아이들과 적당히 놀아주다가 또 적당히 야단치다가 상급학교로 올려보내는 것이 다가 아닌가? 아이들 가운데 인기 있는 선생님이 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다지 어렵지도 않을지 모른다. 눈높이 교육이라고 해서 친구 같은 선생이 되야한다는 묘한 강박에 사로잡혀 적당히 아이들 비휘나 맞춰주고, 아이들 편에서 아이들을 변호해 주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하지만 이런 것과 전혀 다른 마여진 선생이 어떤 의도에서 그렇게 가르치는지를 안다면 누구도 그녀에게 쉽게 반기를 들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또 그렇게 가르치기엔 안 그래도 상급학교에 올라 가면 올라갈수록 그리고 사회 생활을 하면 할수록 현실이 녹녹치 않음을 알텐데 그걸 굳이 6학년 밖에 안 된 아이들에게 가르쳐줄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할 것이다. 아이면 아이답게 꿈을 꾸게 만들고, 도덕적 인간이 되라고 적당히 훈계하면 그만 아닐까? 하지만 그러기엔 선생으로서 가르치는 권리를 선생들 스스로가 방기하고 있는 것이 될 수도 있다. 하긴 오늘날의 교사가 지식 전수 외에 하는 것이 뭐가 있을까? 

 

사실 아이들 입장에서도 보면 결과적으로는 선생님을 잘 만났다고 생각한다. 오죽 나쁜 선생님으로 찍혔으면 '마녀 선생'이란 별명이 붙었을까? 하지만 그런 선생님 덕분에 조금만 똑똑한 아이들이라면 불평만 하기 전에 생각을 한다. 솔직히 6학년이면 초등학교로선 최고학년이고, 자신은 더 이상 어린 아이가 아니란 다소의 자만한 생각도 있으리라. 그런 아이들이 자신이 원하는 선생님이 아니라고 해서 언제까지고 어리광만 부리고, 불평만 한다면 어떻게 발전을 할 수 있겠는가? 사람은 평안함 속에서는 발전이 없으며, 문제와 고난을 헤쳐나가야 발전이 있다. 그래서 아이들은 끊임없이 묻는다. 이렇게 하는 마녀 선생님의 의도가 뭐냐고. 또한 그것은 선생님을 잘 만나고 동시에 잘못 만난 덕분에 그들의 지혜는 일취월장하며, 그 나이에 맞는 생각을 할 줄 아는 아이들로 성장한다. 지혜는 그런 것이며, 그렇게 오는 것일게다.

 

아무리 책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숨겨두고 싶은 책은 있다                  

 

책은 함께 그 지식을 공유하자고 있는 것일게다. 그래서 어떤 책은 소문이 났으면 하고 바라는 책이 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이 책만큼은 혼자만 알고 있으면 하는 책이 반드시 있다. 사실 난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책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한때 미치도록 책을 좋아해(지금도 별로 나아진 것 같지는 않지만) 책을 마구 사 들였던 적이 있다. 주머니 사정이 가벼워 비싼 책은 못 사고, 어디서 책을 싸게 판다(물론 헌책은 아니고)하면 그 앞을 그냥 못 지나고 꼭 두서너 권씩 산 적이 있다. 이렇게 그 좌판에서 우연히 그의 책을 발견하고 가방에 다른 책과 함께 휩쓸어 담았나 보다. 그책의 이름은 '세상을 사는 소중한 지혜(아이템북스 간)'였다. 하지만 나는 안타깝게도 그 책을 사놓고 한동안 읽을 생각을 못했다(아니 안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뭐 내가 그런 책이 한 둘이어야 말이지). 그렇게 다시 내 손에 들려지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던 것 같다. 어느 시인의 시집 만큼이나 낱장에 글씨는 몇 자 박힌 것이 없다. 그러니 마음만 먹으면 또 언제든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하지만 난 결코 활자중독자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서도 글자가 대체로 촘촘히 박힌 책들을 좋아 했기에 나는 이 책에 좀처럼 눈길을 주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이 지닌 위력를 모르지는 않는다. 발타자르 그라시안이 누군가? 17세기 중세시대 수도사이면서 철학자가 아닌가? 뒤늦게 무슨 생각에선지 그의 책을 펼치기 시작했고, 줄을 쫙쫙 쳐가면서 읽었던 기억이 새롭다. 사실 그런 책이 무섭지 않은가? 반드시 활자가 촘촘히 박힌 책이라고 해서 좋은 책은 아닐 수 있다. 그런 것처럼 활자는 듬성듬성 하다고 우습게 볼 것도 아니다. 오히려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만드는 위력은 그런 책에서 나오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것처럼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책을 처음 읽으면서 왜 이제야 이책을 읽었을까? 후회가 들 정도였다. 그리고 이런 책은 정말이지 나만 알고 있는 책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또 드는 생각은 이런 책에 대한 세상의 홀대였다. 당시의 출판 가격도 그리 비싸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더구나 읽는 사람이 없어서 폐기처분되기 전에 덤핑으로 단 몇 천원에 팔리고 있었으니 정말 좋은 책을 알아 보는 안목이 이렇게도 없는 것일까 안타까웠다. 하긴 그래서도 많은 사람이 못 알아 봤을테니 나의 바람은 이루어진 셈일까? 그리고 한참 후에 이책 보게 되었다. 솔직히 많은 사람이 그라시안의 책을 읽고 지혜에 눈을 뜨는 것도 좋긴 하겠지만 그래서 많은 사람이 지혜로워진다면 나는 언제 지혜를 뽐내 보겠는가? 그래서 그의 책은 가급적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길 원하지 않았다.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문장     

 

사실 그의 문장을 처음 대했을 때 나는 성경의 또 다른 잠언을 대하는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하루에 한 장씩만 꾸준히 읽어가면 지혜로워진다는 성경의 잠언 말이다. 그런 것처럼 그의 책도 가까운 곳에 두고 거듭 읽어 볼 생각이었다. 

 

 솔직히 잠언은 도덕과 윤리에 관한 책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보단 사는 방법 또는 처세에 관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것처럼 그라시안의 책도 그런 책이었다. 그의 문장은 아름답다기 보다 뭔가 통찰적이고 때론 서늘하며, 교활한 느낌마저도 든다. 예를 들면 그런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어리석은 사람을 보고도 그가 어리석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어리석은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과 인연을 끊지 못하는 사람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불운을 몰고 온다' 중에서(105p) 

 

또는,

현명한 사람은 바보보다는 적에게서 더 많은 것을 얻는다. 역사상에는 적이 가지고 있는 증오심을 이용해서 엄청난 어려움을 해결하고 위대한 인물이 된 사람이 상당수에 이른다.

아첨이 증오심 보다 위험하다. 상대의 증오심은 자신의 결함을 고칠 수 있도록 자극을 주지만 아첨은 결함을 덮어버리기 때문이다. 현명한 사람은 상대의 증오심을 거울삼아 행동한다. 이는 상대의 애정을 거울삼아 행동하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지혜로운 태도이다.

                                                                    '경쟁상대에게 배워라'(117p) 중에서

과연 성경의 표현을 빌자면 비둘기 같이 순결하고, 뱀 같이 지혜롭지 않은가? 자신의 주위에 이렇게 은밀하며 우아하기까지하게 조언을 해 주는 사람이 있는가? 그래서 난 그라시안의 책을 손 가까이 두려했고, 나만이 아는 책으로 삼고 싶어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혜는 어리석음에서 가치가 있고, 빛나는 것이기에 말이다.

 

책 제목이 인상적이다. '너무나 인간적이지만 현실감각이 없는 당신에게'라니. 신랄하기까지 하다. 이 제목을 보고 있노라면 처음에 서두에서 말했던 '여왕의 교실'에 나오는 그렇고 그런 선생님들이 생각난다. 그들은 흔히 우리 주위에서 보는 선생님들이다. 차라리 그런 선생님 보단 확실히 나쁜 선생님이 더 나을 듯 싶다. 마여진 선생님처럼 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정한 휴머니스트도 못 되면서 현실감각도 없지 않은가? 아마도 '너무나 인간적'이란 말은 휴머니스트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대충 편하고 좋은 게 좋은 범인을 이르는 말이 아닐까.  그런데 이런 제목은 그라시안이 직접 지었을 리는 없을 것 같다. 아무래도 출판사나 편집자의 꼼수 같기는 하다. 그도 그럴 것이, 비록 그라시안의 초기작이라고는 하지만 그의 책은 '영웅'이나 '완전한 신사' '신탁' 같이 몇 글자 안으로 떨어지는 제목이 대부분이다.  

 

세상은 꿈을 가진 자의 것이라고 마치 꿈동산인 양 말하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세상은 꿈동산은 아니다. 어찌보면 세상은 그저 실험의 장이고, 혹독한 현실의 장이다. 물론 세상을 사노라면 때론 꿈과 비전, 그것을 이루기 위해 좋은 스승이나 멘토를 만나기도 해야겠지만 그런 사람의 위험은 외골수가 되기 쉽다는 것이다. 요즘 매스컴과 광고나 교육은 꿈을 이루라고 자극만 하는지 모르겠다. 전문인 우논하면서 말이다. 이렇게 세상은 전문인이 되라고 하지 지혜로운 사람이 되라고 하지는 않는다. 물론 그렇게 꿈이 있고, 전문인이 대우 받는 세상이 되면 좋겠지만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거기에도 모종의 음모가 있는 지 누가 알겠는가? 단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내가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나게 해 주면 안 될 일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며 지혜를 쌓으라고 말한다면 너무 책장수 같은 소리일까?

 

책은 적용 가능해야 한다

 

지식을 전달해 주는 책도 좋은 책이긴 하지만, 곱씹게 되고 적용 가능한 책이 더 좋은 책은 아닐까? 그런 책은 읽다보면 좀 뜨끔하게 만드는 구절도 종종 발견하게 된다. 나는 이 책을 읽다 마지막 쳅터인 5장 '가장 중요한 일에서 최고의 능력을 발휘하라'에서 주로 뜨끔한 느낌을 많이했다. 그중 '완성되지 않은 것을 공개하지 마라'란 글에서는 한 방 제대로 먹은 기분이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그것을 요리하는 과정을 본다면 식욕이 반감되거나 오히려 불쾌감이 생길 수 있다.

이런 이유로 거장들은 모두 시작 단계에 있는 작품을 좀처럼 남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자연에서도 이러한 교훈을 배울 수 있다. 자연은 때가 될 때까지는 절대로 자신을 세상에 내놓지 않는다. (232p)    

예전에 대본 쓰는 일을 했을 때 나는 주로 초고나 재고 단계에서 사람들에게 보여준 일이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작업을 하다 보면 나의 원래 대본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이렇게 저렇게 재단된 작품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굳이 애써 열심히 해야겠다는 의욕도 사라진다. 그래서 대충의 얼개만을 보여주고 나머지는 여러 사람의 의견으로 채워 넣겠다는 생각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렇게 되면 작가로서의 책임의식도 약화되고, 어느 틈엔가 초라해진 모습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비교적 최근에  나는 다시 대본 쓰는 일을 했는데 여전히 예전의 태도를 고스란히 반복하고 있는 것을 알고 좀 놀랐다. 그럴 때 한 사람은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나를 조롱과 혐오하는 눈빛으로 보는 것을 읽을 수가 있었고, 또 한 사람에게선 자신이 개입할 여지가 많음을 알고 음흉한 눈빛을 애써 감추는 것을 보았다. 전자는 나와 잘 아는 사이었고, 후자는 뭐든 자신의 입김을 불어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무엇이었을까? 적어도 시작 단계에서 작품을 보여주는 어리석은 일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걸 이책을 보고야 비로소 알았다니! 어느 바닥을 구르던 거기엔 꼭 나를 이용해 먹거나 조롱하는 사람은 꼭 있게 마련이다. 거기에 저자의 말마따나 '성공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 복수'란 말에 나는 심하게 동의한다.

 

사실 그라시안의 책을 읽으면 궁금한 것이 있기는 하다. 그는 어디서 이런 지혜를 얻었을까 하는 것이다. 물론 수도원에만 있다고 해서 시야가 좁은 인간이 되란 법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지혜는 넓고도 깊어 어디서 과연 이런 문장을 길어 올렸을까 궁금하기도 하다. 그러면서 슬픈 건 이런 조언을 해 줄 스승이 우리 주위에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너무 아쉬워 할 것도 아니다. 책 속에 길이 있다지 않은가? 옛 성현은 그러한 삶을 살아보고, 공부하고 그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자신이 지혜가 부족하고 똑똑하지 못하다면 이 책을 거듭해서 읽고, 심지어는 외워두고 삶에서 실천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두 번째로 읽은 그라시안의 이책은 역시 많은 사람이 읽지 말았으면 좋겠는지는 잘 모르겠다. 쓰다보니 의외로 많은 말을 하게 되었으니 이제 와 읽지 말았으면 하는 것도 우습지 않은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망현 內望顯 - 의사와 기자 두 개의 눈으로 바라본 김철중의 메디컬 소시올로지
김철중 지음 / Mid(엠아이디) / 2013년 6월
평점 :
절판


'우리나라 의료는 건강한가?' 이책에 대한 리뷰의 제목을 저리 정해봤다. 아프면 찾아 가는 곳이 병원인데 의료가 건강한지를 묻고 있다니. 약간은 아이러니 한지도 모르겠다. 최근 몇년 사이 비록 일부이긴 하지만 우리나라 의료 수준이 세계적이라는 자평 반, 타평 반 하는 말이 흘러 나오고 있다. 특히 위암을 포함한 몇 가지 암은 거의 탑이어서 (물론 돈 있는 사람들에 국한 된 이야기지만)원정 치료 받으러 해외에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있다. 

 

그전까지 병원에 웬만해서 가지 않았던 내가 올초 암 환자의 가족이 되면서 병원에 자주 드나들게 되었다. 그것은 병원에 다닌 것만으로는 거의 13년만의 일이고, 다시 암 환자의 가족이 된 것은 22년만의 일이다. 어떤 사람은 병원을 내집 드나들듯 한다지만 이렇게 병원을 드물게 다녔던 나는 그동안 우리나라 의료 수준이 어느 정돈지 실감하기는 그다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책을 읽으니 그때가 생각이 난다. 바로 그 13년 전, 뜻하지 않게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을 때 한 눈에 보아도 오래된 병원이란 외양 못지 않게 헤지고 바랜 환자복을 보고 좀 놀랐다. 무엇보다 거긴 주로 몸이 작은 환자만 받아 왔는지 환자복이 하나 같이 내 몸에 맞지 않아 그나마 윗도리만 환자복을 입고 아랫도리는 집에서 공수해 온 엄마의 꽃분홍 속바지를 입고 있었다. 이책의 저자는 '환자복을 입으면 김태희도 처량해 보인다(92p~)'는 글에서 환자복에 관해 지적했는데, 환자가 되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병원의 환자복은 어쩌면 하나 같이 그렇고 그런지. 부자 병원이든, 가난한 병원이든 똑같다. 저자가 지적했듯이 죄수복과 함께 가장 멋없는 옷이 아닐까 한다. 만일 병원의 환자복이 기능면에서나 패션면에서나 나아진다면 환자가 좀 더 나아지지 않을까? 아니 차라리 이참에 환자복의 사복화를 시도해 보면 어떨까? 저자는 김태희도 환자복을 입으면 처량하다고 했는데, 글의 의도는 알겠지만 제목은 그다지 맞는 것 같지는 않다. 그래도 김태희는 김태희다. 김태희가 환자 역할 한 번 안 맡아 봤으려고? 환자복 입혀 놨다고 그 아우라가 어디 안 갈 것이다. 세상의 모든 환자가 김태희만 같아도 좋을 걸?

 

솔직히 22년만에 암 환자의 가족이 되었을 때 참으로 만감이 교차했다. 22년 전에 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셨을 때 나는 참 어렸다. 그리고 병수발을 직접적으로 안 했기 때문에 그저 아픈 아버지만을 안타까워 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제 세월이 흘러 다시 암 환자의 가족이 되고 병원에 자주 드나드는 신세가 되면서 병원을 다시 보게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처음엔 암 치료가 달라져도 이렇게 달라졌나? 좀 놀랐었다. 무엇보다 22년 전엔 무조건 꼼짝없이 병원에 입원해서 살아서 나오던지, 죽어서 나오던지 해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통원치료를 원칙으로 한다는 걸 알았다. 그건 정말 좋다고 생각을 했다. 병원에 입원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환자가 됐다는 심적 부담도 큰데 교도소나 다를 바 없는 병원에서 언제까지고 있어야 한다면 숨막혀 못 살 것이다. 그리고 의사는 약이 좋아져서 예전처럼 머리 빠지고, 토하고 하는 일도 없다고 햇다. 무엇보다 그 약은 나라에서 95%를 지원해 주고 있어서 환자 본인의 부담을 획기적으로 줄였다는 것이 큰 장점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환자가 마루타가 되었을 때나 가능한 것이었다. 그 생체실험에서 성공한다면 계속 그것을 쓰겠지만 성공하지 못한다면 기존에 써 왔던 약을 쓸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의료보험 혜택은 받을 수가 없고, 한 번 맞는데도 적지 않은 돈이 들며, 머리 빠지고, 구토하는 등의 부작용을 환자가 고스란히 겪어내야만 한다. 그렇다면 22년 전과 무엇이 달라졌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22년 전 나의 아버지는 한 달 반만에 세상을 떠나셨지만, 지금은 낫지도 않으면서 고통만 길게 만드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 22년 동안 의학은 무엇을 해왔단 말인가? 반문하지 않을 수가 없다. 

 

거기에 대해 병원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닐 것이다. 현재 내 가족이 겪고 있는 암은 모든 암 중에 가장 고약하다는 췌장암을 앓고 있다. 스티브 잡스가 걸려서 뭔가 모를 아우라가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 암을 두고 '고약하다'는 표현을 쓴 건 병원의 의사였다. 그렇다면 환자가 그 병에만 걸리지 않았다면 덜 고약하며 희망은 있는 것인가? 유독 그 췌장암에 그런 표현을 쓴다면 다른 여타의 암을 앓고 있는 환자는 어찌 생각할까? 듣기에 따라선 자기네들을 너무 만만히 보고 있는 것은 아니냐? 세상의 모든 암은 다 고통스러운데 무슨 소리하고 있는 거냐고 항의하지 않을까? 또한 의사가 그런 표현을 쓴다는 것은 치료가 어렵다는 걸 의미한다는 것은 알지만 혹시라도 잘못돼도 책임지지 않겠다는 방어적 표현이란 걸 알 수가 있다. '그러게 누가 그런 고약한 병에 걸리래?'하는. 그리고 처음 병원에 입원할 때부터 지금까지 병원의 관례라며 검사의 검사를 거듭해 왔던 병원의 과잉 검사("이왕이면 MRI 하나 찍으시죠" 인센티브로 도배된 병원, 160p)를 생각하면 욕이 나올 지경이다. 외국에선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CT 촬영은 잘 하지 않는다는데 성한 사람도 아닌 환자에게 여러 가지 이유를 붙여 촬영을 종용하면 그 환자가 언제 그 병을 떨치고 일어날까? 

 

그만도 이해 못할 것은 아니다. 나의 가족이 입원한 병원은 무슨 병원이라 이름만대도 알만한 대학병원이다. 모르는 사이 같은 병원이 여기 저기 세워졌다. 암 환자의 가족이 된 덕분에 나는 그 병원 지하 1층에 있는 구내 식당을 드나들곤 했는데, 그곳으로 들어가는 복도에 보면 그 병원이 처음 생겼던 때로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병원의 발전사를 사진으로 전시해 놓은 것을 볼 수가 있었다. 구한말 미국의 의료 선교사가 한국에 와서 세웠다던 병원. 그가 한국에 왔을 땐 병자를 낫게 하겠다는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눈부신 발전이 있기까지 인술은 어디 가고 자본주의 논리에 갇혀 저렇게 발전해 왔겠지 생각하면 그 사진들이 그다지 멋있어 보이진 않는다. 무엇보다 환자를 하나의 인격체로 대하지 못하고 컨베이어벨트의 짐짝 다루듯 하는 걸 보면 현대 병원의 공룡화를 의식한 저자의 목소리가 예사롭지가 않다('대학병원은 왜 공룡이 되었나'174p).

 

사실 나는 제 3자지만 환자 본인이 병원에 대해 느끼는 것은 더할 것이란 생각이 든다. 실제로 치료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할 때 병원을 더 이상 못 믿겠다고 했던 건 환자였으니까. 환자와 치료자 간에 믿음이 있어야 치료 효과가 좋아진다는 건 상식 같은 이야기다. 하지만 실제로 의사가 자신을 어떻게 치료하나 지켜보고 느껴야 했던 환자가 나중에 이런 말을 한다는 건 확실히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의학 전공이라면 적어도 소위 우리나라에 난다 긴다하는 수재들이 하는 공부일텐데 확실히 머리가 좋다는 것과 사람 간의 신뢰를 쌓는 문제는 별개인가 보다. '쓸만한 치료법이 있어도 입 다무는 의사들. 177p'을 읽다보면 정말 나의 가족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입다무는 것은 아닐까 의심이 가기도 한다. 물론 그것도 알고 보면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지만 확실히 현대 의료는 사람을 치료하고 고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우리를 씁쓸하게 만든다.

 

특히 '"당신, 암 걸렸다"는 소식 잘 전하기,137p'를 읽다보면, 아직도 겨울 추위가 가시지 않았던 그날 이 소식을 가족인 우리 중 아무도 환자에게 알리지 못했다는 건 두고 두고 가슴 에이는 아품으로 남는다. 마치 가족의 의무를 방기한 것만 같고, 가족이 아닌 담당 레지던트에게서 그 소식을 들었을 때 환자 본인은 얼마나 외로웠을까를 생각하면 지금도 미안하고 가슴이 아프다. 보호자로서 가족이 암에 걸렸다는데 그저 하늘이 노래져 그 정신 챙기기도 바빴다. 어떻게 그 엄청난 소식을 가족이 직접 전할 수 있단 말인가? 그때 우린 그 레지던트에게 나름 고마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물론 그건 보호자 보단 의사가 알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보호자가 뭘 알아 그것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 것인가? 책은 그랬을 때 환자의 반응은 참으로 여러 가지란다. 그래서 요즘엔 의학교육에 의사들이 '나쁜 소식 잘 전하기'를 교육한다고 하니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환자와 가족이 받을 충격을 최소화하고, 다음 대책을 잘 마련해 보자는 취지라는데, 그래서일까? 우리 가족에게 이 나쁜 소식을 최초로 알린 그 레지던트는 나름 전하는 태도가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정작 환자에게는 끝까지 사실을 확실하게는 전달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나중에 알고 보니 환자는 자신의 상태가 암으로 가기 전 단계로 알고 있었다니 말이다. 그것을 알았을 때 난 '이건 또 뭐지?' 했다. 모르긴 해도 그 레지던트는 처음엔 넌지시 운만 띄었던 것 같고, 나중에 치료가 진행이 되면서 눈치를 챌 수 있도록 했던 것도 같다. 또 실제로 그 레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과로 전출을 갔기 때문에 왜 그랬는지 정확한 정황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나중에 느껴야 하는 실망감은 배가가 된다.        

          

이렇게 난 지난 몇 달 동안 병원에 대한 불신과 불만을 하나 둘씩 쌓아가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특히 암 환자의 가족이 된 덕에 암에 관한 책들을 읽어 가면서 암에 대한 대표적 3가지 치료에 대한 비판과 회의를 대하면서 그것은 더욱 배가가 됐던 것 같다. 지금은 의학의 발달로 회복된 사람이 예전에 비해 많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암 치료가 새로 또는 재발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물론 그것도 우리 집 환자가 천운으로 회복의 조짐을 보였다면 이 비판은 다소 약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22년 전이나 지금이나 아직 그런 행운은 우리에게 주워지지 않았기에 나는 아직도 병원에 대해 신뢰하지 못하겠다. 이럴 때 이책은 병원과 우리나라의 의료 현실에 대해 어느 정도 객관적인 시야를 확보할 수 있게 해 준 것 같아 다행이고 고마운 생각마저 든다. 

 

특히 저자는 독자의 알 권리를 나름 잘 충족해 줬다고 생각한다.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수준이 짐승적일 것만 같은 세상에, 이혼한 전 남편을 위해 간을 떼어 준 여자가 있다는 건 이책이 아니면 몰랐을 것이다. 그녀가 그럴 수 있었던 건 전 남편이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기에 그 특유의 모성이 그런 결단을 낳게 된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에 설대위라는 의료 선교사가 있어 당시 할수만 있으면 유학만 가려고 했던 우리나라 의학도들에게 그렇다면 한국 환자는 누가 돌보겠느냐고 했던 것도 저자가 아니면 알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아무리 문제 많고 탈도 많은 의료 현실이라고는 하지만, 20세기에 의학이 싸웠던 것이 흡연이었다면, 21세기는 나트륨과의 전쟁이라고 했을 때 그 최전선에 있는 것도 병원이고 보면 확실히 우리의 의료는 국민 건강의 한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것만큼은 사실이다. 

 

우리나라에 의료 평론가란 직업이 있을까? 그렇다면 저자가 바로 그런 사람이 아닐까 싶다. 그의 이력이 흥미로웠다. 의사생활을 10년쯤 하다 때려 치우고 기자의 길로 들어 섰단다. 어렸을 때부터 신문 중독자여서 매일 3시간씩 신문을 읽어 제꼈다고 한다. 그게 오늘날 우리나라 메이저 신문사의 의학 담당 기자가 되게 했다. 그가 기자가 되었을 시절엔 의학 담당 기자들은 의학 상식 같은 것만을 단신으로 내보내는 정도로 소극적인 활동을 했었다고 한다. 그는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 우리나라 의료 현실을 파헤치고 전달하려는 일에 몸바쳐 일했고 보다시피 내망현(내시경, 망원경, 현미경)이라는 책을 펴냈다. 어찌보면 다소 흥미 위주로 소제목을 잡은 것도 같은데 저자 특유의 우리나라 의료 사회 병리를 잘 집어내고 있는 것 같아 만족스러운 독서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읽고 난 느낌은 아무리 우리나라 의학계가 선진국 수준 못지 않다고 해도 의료 현실은 아직도 그다지 밝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결론은 그런 것 같다. 계속 의료가 좋아지기를 바라는 것도 필요한 일이겠지만, 국민 개개인이 좀 더 건강한 삶을 추구하며 사는 것이 더 중요할 거라는 것. 이책을 읽으면서 또 한 번 생각하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콘텐츠로 세상을 지배하라
전진국 지음 / 쌤앤파커스 / 201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굳이 말하자면 자기계발서쯤 될 것이다. 자기계발서를 특별히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로선 접할 기회가 그다지 많지 않다. 이 책도 사실은 다른 누군가가 썼다면 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저자가 전진국이라 읽게 되었다.

 

전진국. 그가 누구인고 하니, 내가 매주 토요일이면 즐겨보던 <불후의 명곡>을 기획한 사람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 보자면,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개그콘서트>의 '용감한 형제들'에서 개그맨 박성광이 서수민 PD와 함께 디스하던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다. 그런데 이 사람 좀 대단한 사람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KBS 예능국장이고, 지금은 편성센터장이란다. 그런 사람을 일개의 개그맨이 디스하다니. 이쯤되면 개그맨이 예능국장을 능가하는 건가?ㅋ

 

사실 난 그다지 예능 프로그램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 인기많다는 <개그콘서트>도 매주 보지는 않는다. 솔직히 그런 건 가끔 봐주면 재밌긴한데 매번 똑같은 방식으로 웃기는 걸 보면 나같은 사람은 좀 식상한다. 그건 <개그콘서트>만이 아니다. 시청률 좋다는 다른 여타 예능 프로도 좀 보다가 만다. 그런데 난 유독 <불후의 명곡>에 만큼은 경의를 표할 정도로 좋아한다. 어쩌다 <불후의 명곡>을 보지 않는 토요일이 있다면 거짓말 조금 보태서 기운이 좀 빠진다. 

 

나는 <불후의 명곡>을 보면서 여러가지를 생각한다. 한때는 화려했지만 지금은 잊혀질 왕년의 스타를 '전설'이란 미명하에 카메라 앞으로 불러 앉혔다는 것도 대단하지만, 요즘의 젊은 가수들에 대해 그리 많이 알리가 없는 내가(이것은 예능 프로를 좋아하지 않는 것과 함께 나이가 많다는 것도 요인이 될 것이다) 요즘 가수들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이 프로의 지대한 영향이다. 게다가 한 가지 요인을 더하자면 그 '전설들'의 노래를 요즘의 감각에 맞게 편곡하는 그 편곡의 뛰어남이 나를 이 프로를 보지 않으면 안 되게끔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이유는 한 가지 더 있다. 이 프로를 보면 뭔가 내 일에 대한 꿈을 꾸게 만든다는 것이다. 물론 현재 내가 하는 일이 꼭 <불후의 명곡>에서 영향을 받을 건 아니지만 보다 보면 뭔가를 하고 싶도록 자극하게 만드는 요인이 있다는 것이다. 그 '뭔가'를 자극하게 만드는 것을 굳이 말하자면 '편곡'이라고 말하고 싶다. <불후의 명곡>이 저자의 프로였던 것만큼 편곡에 대한 정의를 책에서도 밝힌 바 있지만, 역시 '편곡'은 결국 곡의 해석 능력이다. 사실 나는 요즘 한동안 쓰지 않았던 대본을 쓰고 있는데 특별히 요즘은 뮤지컬 대본을 쓰고 있다. 사실 어떤 작가의 작품도 알고 보면 세상에 대한 재해석이고, 그것을 어떤 구성과 기획에 따라 보여주느냐의 능력은 아닐까? 

 

사실 내가 쓰는 뮤지컬 대본이란 것은 세상을 향해 돌직구를 던질만큼의 화려 짱짱한 것은 아니고, 그냥 소소하게 교회에서 하는 것이다. 한때는 이쪽 방면에서 일을 하다가 그도 여의치 않아 접어 뒀던 일이다. 하다보면 너무 바닥이 보여 지치기도 한다. 무엇보다 봉사 정신으로 하는 거라 주위에서 격려는 많이 받지만 키워주고, 밀어줄만한 뭔가의 시스템을 갖추고 있지 못한터라 하나의 작은 경험은 될지 모르지만, 스펙으로까지는 연결되지는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이 책을 보면서 좀 부럽기도 했다. 어차피 자본주의 세상이고, 자본주의의 메카라 할만한 방송에 관한 이야기이고 보면, 자본 없이는 돌아가지 않는 것이 대중문화다. 물론 젊은피가 들끊는 사람은 읽어 볼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하지만 나 역시 이 책이 표현한대로 '노땅'이다. 이런 이야기에 들끊을만한 피가 남아 도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 자본을 거부하리만큼 뇌쇠한 것은 아니다. 읽다보면 내가 지금 일하고 있는 환경은 뭔가 회의가 스멀스멀 몰려 든다. 

 

기독교 문화를 외치고, 이쪽 분야에서 일하고 싶은 사람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아다시피 한국에서 기독교 문화를 대중적으로 알린다는 건 여러모로 어렵다. 그것은 신앙의 보수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직도 우리나라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보수적이다. 그들은 오직 말씀과 기도, 선교와 봉사 이런 쪽에만 관심이 많지 사람을 보지 않는다. 교회가 사람을 키우지 않고, 일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지 못한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결국 교회는 하나님과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데 말이다.

 

아무튼 책을 읽다보면 도전이 많이 된다. 솔직히 나는 경쟁사회에 그다지 잘 적응해 살아 온 사람이 못된다. 다분히 아웃사이더적이다. 그런 내가 살벌한 방송가에서 일한다는 건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한다. 하지만 오래도록 대본을 써 온 이력을 보면 내 속에도 뭔가 대중적인 일을 아직도 하고 싶다는 소망이 있다는 것일테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주먹구구식이 많았고, 오래 버티지 못하는 근성 없는 성격도 한몫했다. 그런데 이 책은 일이란 어떻게 하는 것인가에 대한 이론과 실제를 적절히 균형있게 보여준 좋은 책이란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내가 대본 쓰는 일을 다시 하게 된 것은 사람이 그립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일과 사람. 사람과 일은 따로 떼어 놓을래야 떼어 놓을 수 없다. 이것을 균형있게 맞춰가기란 쉽지 않은데, 이 책은 가슴으로 일한다는 게 뭔지를 보여주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의 <개그 콘서트>의 PD 서수민이 저자를 가리켜, "그는 내가 아는 가장 가슴 따뜻한 크리에이터"라고 표현했는데 그 말은 정말 어울리리만큼 잘 썼다는 생각이 든다. 좋은 책이다. 한번쯤 읽어보길 강추한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파란놀 2013-07-08 1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배당 짓는 데에 돈을 쓰기 때문에 종교는 제 빛을 잃으리라 느껴요.
아무쪼록 더운 날씨에 늘 힘내어 하루하루 누리셔요~

stella.K 2013-07-09 12:16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ㅋㅋ
함께살기님도 더위에 건강 잃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2013-07-13 1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7-13 2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7-14 17:0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