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품격 - 북경대 인문 수업에서 배우는 인생 수양법 Art of Lving_인생의 기술 2
장샤오헝.한쿤 지음, 김락준 옮김 / 글담출판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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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선 제목이 근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인생의 품격이라! 뭔가 이런 책을 읽고 있으면 정말 삶의 품격이 느껴질 것만 같다. 그런데 아뿔싸! 얼핏 보면 우리나라나 서양 외국 작가의 책 같지만 저자가 중국 사람이다. 개인적으로 중국 저자들의 책은 그렇게 많이 접할 기회가 없어 뭔가 크게 쉼호흡을 하고 있어야 할 것만 같다. 중국 저작물들은 나름 그것이 가지고 있는 저력이 있어서 말이지.  

 

그래도 저자들이 북경대에서 강의한 루쉰이나 차이위안페이, 지셰린, 펑유란, 후스, 딩링 같은 중국의 지성인들이 북경대에서 강의한 말과 글을 현대인의 삶의 지침이 될 수 있도록 섬세하면서도 쉽게 풀어 썼다니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을까? 약간의 기대도 같게도 했다. 그런데 결론부터 얘기를 하자면 역시 만만치 않은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새삼 느끼는 것은, 중국이 다르긴 다르다는 것이다. 이 책은 특히 많은 예화를 다루고 있는데 중국의 역사에 대해 거의 문외한인 나로선 좀 벅찬감도 없지 않았는데, 더 놀라운 것은 자국의 예문만으로 책 전체를 꽉 채우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책이 그전에도 없지 않을텐데 때로는 다른 나라 사람의 말이나 남의 나라의 역사적 사건을 예문으로 쓸 수도 있는데 이 책은 그렇지 않더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 책은 어찌보면 에세이 같기도 하고, 어찌보면 자기계발류 같기도 한데, 그동안은 서양적 사고에 길들여져서 일까? 이 책을 읽으니 내가 읽어왔던 책들은 다소 분석적이면서도 (상대적이긴 하지만)가볍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또한 이 책은 동양 철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서인지 통찰적이면서도 사고가 깊다는 느낌이다.

 

그런데 참 읽다보면 이 책만이 가지고 있는 미덕이 있다 싶다. 새삼 누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해 줄까 싶은 것이 있었다. 예를 들면, 첫 부분에 나오는 '나 자신에 대한 예의'중에 2강에 나오는 '평생 동안 사랑해야 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다'란 글에서, 공자는 평생 신봉해야 하는 원칙으로 恕(용서할 서)'를 말했다. '恕'는 타인뿐만 아니라 자신을 용서하는 것이며, 자아를 맘대로 놔두는 것이 아니라 조절하는 것이다. 자신을 용서하는 것으로 과거의 상처를 잊어버리고 미래의 희망을 보는 것은 스스로를 사랑하는 표현이다나, 사상가 한유의 <답류수재론사서>라는 책에, "난 비록 어리석지만 나 자신을 사랑할 줄 안다."란 말을 인용하면서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비록 지금은 곤경에 처했더라도 자신을 믿고 존중하고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자신을 사랑해야 남도 사랑하고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다(28p)란 말을 읽으면 가슴이 약간은 뭉클해질 정도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이가 들면들수록 번뇌가 많아지는데 주로 쓸데없는 걱정이나, 자신이나 남을 용서하지 못한 것들 아니던가? 또한 나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는 미성숙함 때문에 우린 얼마나 많이 좌충우돌하며 자학하고, 남을 미워하며 사는가?

 

이 책은 이것말고도 삶 전반에 관한 예의와 품격을 갖추도록 격려하고 있는데 그것이 구체적이고 깊이가 느껴져서 새삼 참 좋다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대신 처음에서도 말했지만 결코 쉽게 읽혀지는 책은 아니며, 두 저자 중 어떤 글은 누가 썼는지도 함께 알았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조금 아쉽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하지만 뭐 그런 것이 아니라면 추천할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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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3-11-01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래의 희망을 보는 것은 스스로를 사랑하는 표현이다."
멋진 말이군요. 자기를 사랑하고 삶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결코 희망을 잃지 않을 듯해요.
저에겐 어떤 희망이 있는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검색해 봤더니 좋은 책 같아요. ^^

2013-11-01 13: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01 18: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루키 스타일 - 평범을 비범으로 바꾼 인생철학과 철칙들
진희정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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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고백컨대, 나는...

 

내가 처음 하루키를 접했던 건, 그 유명한 '노르웨이 숲(상실의 시대)이 아니었다. 그 작품은 한참 뒤에 읽어 봤었고, 내가 읽었던 그의 첫 작품은 단편집을 읽게 되면서부터였다. 그 무렵 나는 일본 소설 몇 작품을 읽었던 것 같은데 읽으면서 느꼈던 한마디는 '백치미'였다. 뭔가 영혼이 느껴지지 않는다랄까? 물론 그 느낌은 세월이 흐르면서 다르게 느껴지기도 했는데(그도 그럴 것이 나는 사춘기 이후 한동안 소설을 읽지 않았다. 소설에 대한 지식이 일천할 때인데 무엇을 제대로 알았겠는가?) 아무튼 그런 느낌일 때 하루키의 소설은 확실히 일본 소설의 그것과는 다른 느낌을 받았었다. 뭔가 아메리칸 스타일이 다분했었다고나 할까? 특히 내가 읽었던 그의 단편 '치즈케이크 모양을 한 나의 가난'은 단편 중 가히 백미라고 해도 좋으리만치 지금도 나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작품이다.

나는 이렇게 자국의 소설 같지 않은 그의 작품에서 뭔가 범상치 않은 느낌을 받았고, 아니나 다를까? 오늘 날 그는 세계가 주목하는 작가요,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는 작가가 되었다(올해도 그는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했다. 과연 좋아해야 하는 지 안타까워 해야 하는 것인지?). 그의 작품은 무엇이 다른 것일까? 그 다름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고백하건대, 사실 나는 하루키 매니아는 아니다(하지만 그가 해마다 어떤 작품을 내는지 관심을 갖지 않기란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대신 나는 언제부턴가 작품 보다는 그 작품을 쓴 작가를 알고 싶어하는 욕구가 생겼는데, 하루키 역시 내가 알고 싶어하는 작가이기에 이 책은 일찌기 나의 관심의 대상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루키의 독서

 

어쨌거나 나는 오래 전부터 궁금했다. 하루키의 여느 일본 소설 같지 않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그는 매일 자신이 정한 시간에 정확히 일어나 정한 분량의 글을 쓰는 것으로 유명한대, 사실 이런 하루키의 습관적 글쓰기는 반드시 그만이 지니는 습성은 아니다. 거의 모든 작가가 하루키와 비슷한 습관적 글쓰기를 한다. 나는 이런 설명만을 가지고는 성에 차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명문대 수석 합격자가, 과외는 일체 하지 않았고, 수업 시간에 수업 잘 듣고, 잠은 6시간 내지 7시간 충분히 자면서 공부했다고 하거나, 공부가 제일 쉬웠다고 말하는 그 얄미운 소리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글이라는 것도 무조건 쓰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습관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밑천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하루키가 레이먼드 카버나 폴 오스터 또는 레이먼드 챈들러를 좋아한다는 건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들의 작품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는 말을 자주하곤 했다고 한다. 그러면 그렇지. 그러니 그의 작품이 아메리칸 스타일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의도적인 것이라고도 밝힌 바 있다. 그러니까 좋아서 닮아가기 보다 자국의 작가들이 구사하는 작풍을 뛰어넘고 싶어했던 전략으로도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에서도 그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의 소설이 지역성을 벗고 세계적인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10대 시절 탐독한 미국 현대작가들의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다.

항구도시 고배에서 나고 자란 하루키는 고교시절부터 외국 선원들이 헌책방에 팔고 간 영문 페이퍼백을 사다 읽은 게 취미였다. 이때 레이먼드 카버나 트루먼 카포티, 스콧 피츠제럴드 같은 작가들의 작품을 원서로 읽으며 재미삼아 이들의 작품을 노트에다 번역하곤 했는데, 이 자발적인 취미는 훗날 하루키가 수많은 영미소설의 번역가로 활동하는 데 튼튼한 기초가 돼주기도 했다(40p)           

그렇다. 그의 작품의 원천이 그냥 나올 리 없었다. 이렇게 난 뭔가 그의 약점 하나를 잡은 것 같아 속으로 쾌재를 올리곤 했는데, 이내 꼬리를 내리고 말았다. 확실히 크게 될 사람은 노는 폼이 다르다 싶었다. 읽는 것은 그렇다손치더라도 재미삼아 그들 작품을 노트에 번역했다고 하지 않는가? 사실 나는 모국어 밖에 잘 하는 언어가 없어서인지 모국어를 외국어로 번역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훗날 하루키를 일컬어 '미국 작가가 일본어로 쓴 영어 소설'이라는 평을 받고, 미국에 자신의 소설을 알리는데 별 무리없이 알릴 수 있는 개기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하루키가 세계적인 작가임에는 틀림없지만 세상에 어떤 작가도 완벽한 작가될 수는 없는가 보다. 그런 그에게도 호불호가 있어 '헤밍웨이의 아류'니 '버터 냄새 나는 작품'이란 말도 듣는다고 하니 말이다. 물론 그것에 대해 그는 별로 개의치 않는다고 하는데, 전자든 후자든 이 모든 것이 다 하루키 스타일일 것이다.  

 

 

하루키의 하루  

 

그렇다면 하루키가 하루를 사는 스타일은 어떨까?

 

그는 우선 오전 4시 전후로 일어나 신선한 커피 한 잔을 내려 미신 후 곧바로 책상 앞에 앉아 원고를 쓴다. 오전 10까지 일한 후 10킬로미터를 달린다(그가 마라톤 마니아라는 건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 번역 작업을 취미 삼아 하고, 중고음반 가게를 돌아다니며 ... 장을 봐서 요리를 하고, 저녁을 먹은 뒤 책을 읽다 밤 10시경 잠자리에 든다.

하루키는 문체가 곧 삶의 방식과 직결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생활의 단순화를 통해 일상의 잡다한 요소들을 지웠고 대신 소설가로서 해야 할 일들에 집중했다. (19~20p)

 

작가로 등단하거나 주목받는 작가가 되는 것보다 어쩌면 더 어려운 일은 '작가로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 그를 보면 창의력과 상상력은 자유와 일탈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매일 규칙적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무언가를 반복하는 힘과 그 일을 진정으로 즐기는 태도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싶다. 여기서 특히 강조해야 할 점은 '꾸준함'이다. (22p) 

한때 하루키가 우리나라를 강타할 때 일부 작가들은 하루키의 문체를 흉내내곤 했다고 한다. 물론 문체가 워낙 독특했으니 따라해 보고 싶은 마음을 이해 못할 것도 없다. 그리고 하루키를 정말로 좋아한다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루키처럼 쓰지 않으면 독자들이 쳐다보지도 않는다는 쓸데없는 열등감에 그의 문체를 따라 했을지는 그 작가만이 알 것이다. 그건 하루키가 '헤밍웨이 아류'란 평을 듣는 것 보다 더 못한 것 아닌가? 작가를 지망하는 사람이나 초년생들은 하루키를 흉내내지 못해 안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성실함, 꾸준함을 배웠어야 했다. 그리고 하루키처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 ...... 반복성에는 확실히 주술적인 것이 있어요. 정글의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북소리의 울림 같은 것이지요.(23p)"

 

 

하루키의 원칙

 

하루키의 그런 매일 매일의 꾸준함이 그만의 원칙을 낳았을 것이다.

그런 원칙은 그가 글을 쓸 때나 소설가로서의 자세에서, 심지어는 인간관계에서도 나타난다. 먼저 그가 글을 쓸 때 그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방식(34p 참조)'을 선호한다고 한다. 그리고 거기서 그는 자신만의 방식을 찾았다.

 

첫째, 당신의 일에 집중할 시간을 정한다. ...... 자기가 제대로 미쳐보고 싶은 그 무언가를 하루 중 언제, 몇 시간 동안 할 것인지를 정한다.

둘째, 일을 하기 위해 필요한 준비물들을 갖춘다. ...

세째, 정해진 시간에 오직 그 일에만 집중하는 것을 매일매일 지킨다. ...... 돌발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요소들은 차단한 채 신변잡기적 생각들은 모두 머릿속에서 지운다. (35~36p)

 이렇게 하루키는 그만의 방식으로 30년을 지속적으로 집중하여 글을 썼다고 한다. 이것은 번역의 방식에서도 나타나고 있는데, 그는 번역을 할 때 단어의 사용, 문장의 리듬을 타는 법 등 자기 스타일을 끊임없이 점검했고, 외국 작가들의 문장은 어떤 원리로 표현되는지를 공부했다고 한다. 또한 이것을 통해 "소설에 임하는 올바른 자세"를 배웠다.

 

독자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것은, 줄거리도, 문장도 아닌, 소설에 배어나오는 소설가의 '자세'라는 사실을 ...... 그렇게 하루키는 작가로서 기초적인 힘을 길렀고, 서구문학의 아류가 아닌 자신만의 오리지널리티를 만들어냈다. 

오리지널이라는 건 다른 누구도 쓸 수 없는 누군가의 영향을 받았더라도 본격적으로 전업 작가의 길을 걷게 된 뒤로부터는 자신만의 독립적인 방향성을 모색해왔다. 소설가의 '자세'를 고민하고 연구하며 발전시켜나갔다. 그리고 어느 시점부터는 그 앞에 아무도 없었다.(42p)  

그렇다. 어느 시점부터 그 앞에 아무도 없을 때! 바로 이것을 오리지널이라 할만하며, 그만의 '스타일'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인간관계 역시 하루키는 중요하게 여기는데, 예를들어, 회사 직원을 대할 때도 직원이 아닌 인간으로 대한다고 한다. 또 그러니만큼 자신을 진정성 있게 대해주는 사람에게 신뢰를 느낀다고 한다(이거 너무 완벽남 아닌가? 빈틈이 없어 보인다) 재미있는 것은 자신의 책을 영어로 번역할 때의 그만의 원칙이다. 그의 책을 번역해 주는 사람은, 제이 루빈 교수와 필립 가브리엘, 알프레드 번바움 교수 등 세 명이 있다고 한다. 하루키는 매번 자신의 작품을  이들 세 명에게 원고를 읽게 하고 그 중 가장 열정을 보이는 사람을 이번 번역자로 최종 결정을 한다고 한다(189p). 그것은 확실히 재미있으면서 동시에 재치있는 방식인 것 같다. 

 

 

하루키가 말하는 작가 또는 작가로서의 삶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하루키가 확실히 매력적인 사람이라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서른을 코앞에 둔 어느 날 야구 경기를 구경하다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을 했다고 하는데 그때까지 소설을 써본 적도, 소설 작법 같은 것을 배운 적도 없지만 어쨌든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것은 또 소설을 쓰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용기와 도전을 주는가?

솔직히 글을 써 보겠다고 하면 왜 그렇게 자질에 대해서 요구하는 것이 많은 것인지? 창작 수업 한 시간만 들으면 지레 겁부터 먹게 된다. 물론 그런 식으로 해서 될 사람과 안 될 사람을 걸러내는 것이 되겠지만 그래서 미리부터 해 보지도 않고 기를 죽이는 것도 좀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일까? 하루키는 학교란 제도권 교육을 싫어했다고 한다. 청소년기 때도 그는 공부를 하지 않았으며, 1년 재수 끝에 와세다 대학에 들어갔다. 사실 오늘 날 그 대학은 일본 내에서 알아주는 명문이지만 그가 다녔던 때만해도 그렇게 유명한 대학이 아니라며 자신이 그리 똑똑한 인간이 아님을 그런 식으로 겸손하게 말하곤 한다. 자신이 그 대학에 들어간 것 하나 잘한 것이 있다면 지금의 아내를 만난 것이라나? 겸손도 지나치면 오만이라던데 하루키는 확실히 그래 보인다. 그래도 하루키의 학창시절을 생각해 보면 그는 확실히 아웃사이더의 승리요, 조상쯤 되어 보인다.

또한 그는 신문이나 잡지, TV는 거의 보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것 또한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우리는 '모름지기 작가라면...'이래야 한다며 스스로 덧씌운 족쇄가 얼마나 많은가? 그중 하나가 신문, 집지 광이 되어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솔직히 좋아서 광이 되는 거라면 누가 말리겠는가? 그러나 그것이 되지 못해서 작가가 될 수 없다는 말은 이제 하루키를 봐서라도 하지 않는 것이 좋을 듯 하다. 물론 여기에도 함정은 있을 것이다. 하루키는 신문이나 잡지, TV를 보지 않는대신 뭔가에는 미쳐있겠지. 예를들면 재즈 같은 것에. 그가 재즈 광이란 건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 아닌가?

그래서 오래 전 하루키를 좋아해서 하루키를 닮은 나의 글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글을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이든 한 가지에 정통해 있으라고. 그 말이 세월이 흐르면 그를수록 뼈에 사무치도록 와 닿는다. 그래서일까? 하루키의 글은 재즈와 닮아있는 것도 같다.  

사실 난 그의 책을 많이 읽지 못했는데 게으른 탓도 있겠지만 섹스에 관한 표현이 너무 많거나 적나라해서 보지 않은 이유도 있다. 보기에는 상당히 보수적으로 생겼다. 오죽하면 그의 표정을 가리켜, 긴장하면 얼굴이 금방이라도 풀을 먹인 것처럼 빳빳하게 굳고 만다고 표현했을까. 그런 그가 섹스 표현 잘하기로 유명한 작가라는 건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그런데 놀라운 건, 그 역시 섹스에 관한 표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통해 많은 사람들과 꿈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극복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아가 섹스는 자신의 본능에 굴복하지 않으면서 제어할 수 있는 아이템과도 같다고 보았단다.  솔직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그는 섹스 표현 조차도 소설을 완성하는데 중요한 재료였다면 그만의 스타일을 구축해 갔을 것이다.

 

 그렇다면 하루키가 말하는 작가는 과연 무엇일까? 그는 말한다. '소설가는 많은 것을 관찰하고, 판단은 조금만 하는 사람'이라고. 그리고 나는 그것에 동의한다. 관찰은 하루키 문학 인생의 출발점과 같다고 했다. 어둠과 지하, 그리고 통로는 하루키 작품의 주요 모티프며,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사람의 진짜 모습, 그 보이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사람이 진정 구원받기 위해서는 홀로 어둠의 깊숙한 부분까지 내려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그래서 그의 작품 속 주인공들은 각자가 느끼는 공포를 인정하고 그것을 직시하면서 상실, 상처, 고독, 혼란 등을 헤쳐나가는 사람들이라(206P)고 했다.   

 

 

하루키 자서전이나 평전이 나오기를 기대하며...

 

 하루키는 자신을 자주 고양이에 비유하곤 했다. 그건 실제로 그가 고양이를 좋아하고, 도도하고 관찰하기 좋아하며, 낮가림이 있는 습성 등을 들어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가 소설가가 된 것도, 처음엔 시나리오 작가가 되려고 했단다. 하지만 시나리오 작가는 팀 작업을 해야한다는 것을 알고 포기하고 혼자 작업하기 좋은 소설을 택했다고 하니 그가 고양이의 습성을 가졌다는 건 확실히 맞는 말이긴 한 것 같다. 그래 가지고 한때 재즈 카페를 운영했다는 건 역시 미스테리고. 확실히 그는 미워할 수 없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사실 이번 독서는 나름 하루키를 가까이 느낄 수 있게 해 줘서 좋기는 했다. 그리고 하루키와 인터뷰 한 번 하지 않고 순전히 그에 대한 자료만을 가지고 이만큼 썼다는 것이 대단하다 싶기도 하다.  그런데 그것이 또한 이 책을 읽으면서의 아쉬움이다. 물론 하루키의 성격상 아무에게나 곁을 내줄리는 만무할테니 인터뷰는 접고 시작한 작업이었겠지. 그에 관한 모든 책을 다 읽고 각 키워드에 따라 책을 쓴 저자의 노력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하지만 하루키 스타일이라고 해놓고 뭔가 촛점이 조금은 안 맞은 것도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얼핏 보면 무슨 하루키를 재조명하면서 자기계발류의 책처럼도 느껴지니 말이다. 그래서 어찌보면 작가가 되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용기를 주기도 하겠지만 왜 순수하게 하루키를 조명을 하지 못했을까? 하루키 스타일이라면서 스타일에 대해 좀 더 파고들었어야지 그 키워드란 또 뭐란 말인가? 조금은 산만한 느낌도 들었다. 그래도 뭐 워낙 하루키를 좋아한다면 저자에겐 나름 의미있는 작업이었을 것이다.

 

하루키도 이제 60이 넘었다. 그가 과연 자서전을 쓸까? 그의 독특한 성격으로 봐선 안 쓸 것도 같다.  또한 워낙에 많은 책에서 자신의 삶을 주저리 주저리 늘어 놓았으니 겸손한 의미에서 자서전이라고 따로 쓸 게 없다고 할런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그의 평전을 써야하지 않을까? 뭐 평전은 꼭 그 사람이 죽었을 때나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미 움베르코 에코의 평전이 나와있지 않은가? 그는 그 사실에 대해 정작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왠지 살았을 때 평전이 나오면 이제 글은 그만 쓰라는 건가? 오해할 수도 있을 것도 같다. 그는 아직도 쓸 이야기가 많다지 않은가? 그렇다면 지금으로선 그에 대해 알고 싶으면 문학론에 관한 책을 읽어보는 것이 좋을 듯 싶다.    

 

아, 지금 고개를 돌려 시계를 보니 오후 2시가 조금 못된 시각이다. 이 시각이면 하루킨 뭘하고 있을까? 책에 나와 있는대로라면, 번역을 하고 있거나, 어느 중고 음반 가게를 기웃거리고 있으려나? 그가 더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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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23 14: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3-10-24 10:18   좋아요 0 | URL
ㅎㅎ미안해요!^^

페크pek0501 2013-10-23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도 있는 거예요?
하루키를 좋아하는 독자에게 관심 끌만한 책이네요.
저는 하루키에 관심이 있다기보다 독자들이 좋아하는 작가에 관심이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을 읽어 볼 만한 것 같아요.

님의 책 소개 글로 많이 팔릴 것 같은 예감이 들어요.
님의 리뷰를 읽으니까 저도 사고 싶어지니까 말이죠.^^





stella.K 2013-10-24 10:13   좋아요 0 | URL
저도 하루키를 그렇게 많이 좋아라 하지는 않는데
분명 끌리는 작가인 것만큼은 사실인 것 같아요.
저자가 나름 글을 잘 쓰긴 했는데 하루키 스타일을 말하고자
했다면 하루키의 라이프 스타일을 썼어야 맞는 것 같은데
뭔가 촛점이 좀 아쉬웠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하루키의 작품 보다 이런 책이 더 많이 끌리는 것도 사실이라
뭐 갖고 있으면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cyrus 2013-10-23 1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주위에는 하루키 에세이에 열광할 정도로 읽는 지인이 있는데, 저는 아직도 하루키 스타일에 그렇게 끌리지 않더라고요. 이 글 읽으면서 느낀건데요, 아마도 빠르면 5년 안으로 하루키 평전이나 자서전이 출간될꺼 같은 예감이 드네요

stella.K 2013-10-24 10:16   좋아요 0 | URL
오랜만이야. 하루키에 대해선 나도 동감이야.
근데 이 사람은 워낙 독특해서 자서전을 쓸까 싶기도 해.
나중에 평전은 나오겠지.
요즘 부지런히 글을 올리고 있더라. 짱이야!^^
 

 

<월터와 프랭크> ★★★☆

 

편견이겠지만, 허리우드 영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내가 이번엔 허리우드 영화를 봤다. 그것도 20년이나 지난 영화를. 그것은 순전히 여름을 배경으로 했다는 것이 주요 결정적인 요인 때문이다. 그것은 아직 추운 건 아니지만 가을 쳐놓고 제법 쌀쌀해진 요즘의 날씨 탓도 있고 무엇보다 내가 여름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여름은 더운 게 문제이긴 하지만, 그것만 아니면 계절적으로나 시기상으로 가장 절정 아닌가? 그야말로 찬란하다. 

더구나 난 요즘 가끔 옛날 고리짝 영화를 보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재미가 나름 쏠쏠하다. 이유는 뭐 옛 추억이 떠올라서일 수도 있고, 의외로 볼만한 구석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영화의 역사를 볼 때 20년 전 영화면 그다지 오래 됐다고도 볼 수 없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 영화 뭔가 모르게 빠져들게 만드는 게 있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굳이 분류하자면 노인 영화일 것이다. 가끔 허리우드 영화중엔 노년이나 노인이 주인공인 영화가 있는데, 허리우드를 무시 못하는 건 그런 것이 아닐까? 이렇게 주제나 컨텐츠가 다양하다는 것 말이다.

요즘 우리나라 영화가 선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그것도 조금 한물간 느낌이기도 하지만 암튼) 그래서 꽃중년 꽃노년 배우들의 쓰임새가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해진 것도 사실이지만 이 영화처럼 노년을 주제로하리만큼 영화층이 다양하지는 않는 것 같아 아쉽다.  

물론 난 영화의 배경이 여름이어서 봤다고 했지만, 이런 영화에 여름을 배경으로 했다는 것은 그 나름의 영화적 계산이 있어서는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런 영화에 가을이나 겨울을 배경으로 했을 수도 있었으리라. 그게 인생의 사계절을 의미할 때 적절해 보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나이가 들면 들수록 푸르른 인생의 계절을 더 많이 생각하게도 된다. 그러니 그 대비효과를 위해 감독 (또는 작가)은 여름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두 주연 배우들도 극과극이다.

한쪽은 자신이 아직도 늙지 않았음을 과시하고 싶어하고, 한쪽은 그냥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하는 듯 차분하고 조용한 성격이다. 한쪽은 결혼을 네 번하고, 네 번 이혼을 했지만, 한쪽은 전혀 결혼을 해 보지 않았다. 한쪽은 들이대는데 선수지만, 한쪽은 연애에 소심하다. 한쪽은 강한 것 같아도 약하고, 한쪽은 외유내강이다.

하지만 누가 그러던가? 인간의 늙음이 사랑과 무관하다고. 사람들은 주로 사랑이 젊음의 상징인 양 떠들어대고 조금 더 인심을 써서 중연의 사랑까지 봐 준다고 하지만 노인도 사람이다. 사랑에 대한 욕망, 호기심은 줄어들지 않는다. 죽을 때까지. 사랑하니까 인간이다. 

하지만 우리 현실은 어떠한가? 늙은이가 연애한다고 하면 주책이라며 무성인이 될 것을 강요하지 않는가? 묘한 건, 이 영화를 보면서 얼마 전, 탑골 공원에 하릴 없이 나와있는 노인들 중엔 '죽어도 좋아'하는 노인들, 즉 이를테면 성병에 걸린 노인들이 그렇게 많다고 하는데 왜 그것과 오버랩 되는지 모르겠다. 물론 이 영화는 노인의 성을 발가벗긴 영화는 아니다. 사랑을 해 보지 않은 인생이 얼마나 되겠느냐만, 사랑도 배워야 한다고, 사랑할 수 있을 때 배우지 않으면 늙어서도 못하는 게 사랑은 아닐까? 

그렇다고 꼭 노인들이 섹스도 해야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다. 노인이 섹스한다고 크게 보고, 섹스 안하면 작게 보는 것도 문제는 있어 보인다. 영화 말미에, 로버트 듀발이 셜리 맥클레인에게 섹스를 하자고 요청한다. 하지만 금방 그것이 자신의 허세임을 말하고, 자신은 섹스할 수 없다고 고백한다. 그러자 셜리가 그를 진심으로 끌어안아 준다. 그게 동정일 수도 있겠지만 그때만큼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노년은 그런 육체적 허세 보다 진실이 통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이해할 수 있고, 이해받을 수 있는 마음과 마음이 통할 수 있는 절정이 노년은 아닐까? 분명 늙으면 기력이 떨어져 섹스도 젊을 때만큼 못하는 건 당연하다. 그것을 부정하는 게 더 이상한 거지. 그렇다고 사랑을 못하는 것도 아니다.  

영화 속 주인공의 공간이 참 인상적이다. 허름한 여인숙 같은 방에서 에어컨도 고장이나 돌아가지도 않는다. 그래도 커튼을 열면 바다가 보인다. 우리나라 같으면 괜찮은 별장에 커튼을 열면 바다가 보이는 것으로 설정했겠지. 하지만 충산층 이하의 삶을 산다고 해서 그런 환경에서 살지 말라는 법 없다. 우리나라가 자꾸 집, 집하는 것도 좋은 집을 차지하는 사람이 좋은 환경도 누릴 수 있다는 착각 때문은 아니던가? 만인은 집에서 살 권리가 있으며, 공평하게 환경을 누릴 권한도 있는 것이다.

로버트 듀발은 영화 내내 자신이 헤밍웨이를 만났다고 떠벌리곤 하는데 그러고 보니 정말 헤밍웨이가 생각나는 영화 같기도 하다. 또한 소심한 리처드 해리스의 젊었을 때 직업은 이발사였는데, 로버트 듀발에게 이발과 면도를 해 주는 장면은 가히 이 영화의 백미는 아니였을까 한다. 거의 제의에 가깝고, 이상하게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릴렉스하게 만드는 장면이기도 하다. 별로 긴장하고 볼 필요를 느끼지 않는 영화인데 릴렉스하게 만들었다면 어느 정도의 느낌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그러다 그렇게도 젊은 척 하던 로버트 듀발이 어느 날 자기 집 안락의자에서 죽은 채 발견이 된다. 20년 전만해도 그런 설정이 나쁘지 않아 보이긴 하지만 지금 보면 약간은 식상한 장면이란 생각이 든다. 물론 가장 편안한 죽음이란 것엔 이의가 없지만 그렇게 죽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유명해지기 전의 산드라 블록을 보는 재미도 나쁘진 않다. 지금은 유명하다 못해 한물간 배우이긴 하지만.

 

이렇게 난 요즘 최근 주목을 받는 영화 보다 몰랐거나 상대적으로 저평가된 영화를 찾아 보는 재미에 빠져 산다. 이 영화 좀 한참된 영화긴 하지만 괜찮은 영화다. 추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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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젤과 그레텔 (1disc)
임필성 감독, 천정명 출연 / CJ 엔터테인먼트 / 2011년 12월
평점 :
품절


감독의 이름이 낮설지가 않았다. 누구였더라...? 그래서 일부러 그의 필모그래필을 검색해 봤다. 그랬더니 역시 모르겠다. 그런데 이상하지. 이렇게 이름이 낮설지가 않으니. 그나마 이 영화도 얼마 전, 모 인터넷 TV에서 천정명이 인터뷰하는 것을 보고 알았다. 

원래 호러나 그로테스크한 영화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고, 이 영화도 개봉 당시에도 그다지 흥행에 성공하지 않았던 걸로 알고 있어 모르고 그냥 지나갔을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가 나의 눈을 끌었던 건, 천정명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은원재나 심은경 특히 진지희의 어렸을 적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이 아이들 역시 귀엽다. 그리고 연기를 꽤나 잘한다. 특히 진지희는 정말...! 난 이 배우가 이렇게 연기를 잘하는 줄은 이 영화에서 처음 알았다.

하지만 이 아이는 이제 너무 많이(?) 커 버렸다. 얼마 전, M 본부의 사극 드라마 <불의 여신 정이>에서 문근영의 아역으로 나왔는데 이젠 아역이란 말이 안 어울릴만큼 성숙해 있었다. 몇 년 전, 같은 방송국의 모 시트콤에서 빵구똥구를 외쳐댔던 그 진지희가 맞나 싶을 정도다. 

 

영화는 대체로 볼만하다.

그로테스크하더라도 '헨젤과 그레텔'이란 동화적 이미지와 잔혹의 이미지를 나름 살리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또한 저 세 명의 아이들의 연기도 예사롭지 않다. 한마디로 이 영화가 개봉 당시 주목 받지 못했다는 것이 아쉬울 정도다.

영화의 메시지도 뭐 그만하면 전달력이 아주 나쁜 것도 아니다. 글쎄, 사람마다 해석하기 나름이겠지만 내가 볼 때 이 영화는 뭐 얼핏 보면 아동학대를 다룬 듯도 하지만 조금 더 들여다 보면 '어른아이'를 다루고 있지 않나 싶다.

몸은 어른인데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자아는 어린 아이를 벗지 않은 것이다. 특히 어렸을 때 학대를 받은 경험이 있다면 쉽게 어른이 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어른아이'는 그렇게 학대를 당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성향은 아닌 것 같다. 누구든 자라면서 어떤 트라우마가 있다면 그러한 면들은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인간의 내면을 영화는 우화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뭔가 모르게 아쉽다. 시간여행이란 익숙한 또는 한번쯤 보았을 방식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스토리의 완성도가 높지 않아서일까? 연출이나 무대 셋트 디자인은 나름 만족스러운데 뭔가 허전함이 남는다. 그게 뭘까?

그래도 뭐 봐서 나쁠 것은 없다. 난 저 세 아역배우들의 연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했으니까. 이렇게 넓디 넓은 영화의 바다에서 괜찮은 영화를 건져 올렸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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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하자면 나에겐 이 책이 그런 책이다.

이 책은 소생의학에 관한 책이다. 

어차피 의학이란 게  사람의 병을 치료하고, 어떻게 하면 건강하게 오래 살까를 연구하며, 더불어 생명을 연장시키는 것에 그 의미를 두고 있는만큼 소생의학은 나름 중요한 의학의 한 분야인 것만큼은 사실일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소생술이라면 심폐소생술 이 대표적인 정도가 아닐까? 하지만 이 책을 읽어보면, 사람을 살리는 기술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많이 발달되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재밌는 건, 지금까지 죽음을 정의할 때 심장이 멎으면 사망 선언을 하곤 하는데, 사실은 심장이 멎고도 사람은 얼마간을 더 산다고 한다(솔직히 난 이 부분에서 조금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그렇게 빨리 내려진 사망선언 때문에 혹시 육체로 돌아오고 싶은 영혼이 못 돌아오고 결국 정말 구천을 떠도는 것은 아닐까? 또한 그렇다면 사망선언을 한 의사는 본의 아니게 간접 살인을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상상을 해 보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런 일은 아직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머지않아 실제로 사망한 지 여러 시간이 지난 뒤에도 죽음의 마수에서 구해낼 때가 올지도 모른다고 농담 반, 진담 반(적어도 나에겐 그렇게 받아들여 진다)하는 말을 한다. 그러면 정말 영화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다.

실제로 난 얼마 전, 암으로  세상을 떠난 오빠를 생각하면서, 그를 화장했던 것이 잘못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물론 그런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오빠는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아니 그의 육체가 화장할 때까지도 세상으로 돌아오고 싶어하지는 않았을까? 그런 걸 단순히 의학적으로 사망했다는 이유만으로 사후처리를 너무 빨리 해 다시 삶으로 귀환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만든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물론 이 생각은 오빠가 돌아간 지 얼마 되지 않고, 아직도 그 삶의 흔적이 기시감처럼 남아 있어 그런 상상도 해 보게 되는 것일테지만, 저자의 저 말은 이제 곧 나의 이런 생각이 전혀 근거없는 생각마는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줄 것만 같다. 그렇다면 정말 오빠에게 미안해 해야하는 때가 오는 줄도 모르겠다.     

 

사실 고백하는 것은, 적지않은 세월 책을 읽었으니, 그 책이 객관적으로 좋고 나쁘고를 떠나, 적어도 내가 읽을만한 책인가 아닌가를 하늠하는데 나름 선수가 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읽으면서, 이 책은 나의 기대를 조금은 빗나갔던 책란 걸 알았다. 

나는 이 책이 말 그대도 '죽음' 즉 임사체험(저자는 이 용어도 그렇게 적절한 용어는 아니라고 하지만)에 관한 책인 줄 알았다(그리고 이 책에서 실제로 이 부분을 다루기는 했다. 하지만 극히 일부고 그것도 내가 알고 있는 임사체험에 관한 이야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아니 더 정확히는 내가 갑자기 죽음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요즘 하도 웰빙, 웰빙 하길래 웰빙 보다  중요한 건 '웰다잉'이라 생각해 이 책이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대를 잇는 뭐 그런 책은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왜 사람들은 생명은 그렇게 중요하거나 또는 그 반대로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생각하면서, '죽음'에 대해선 어쩌면 그리도 무지하거나, 무조건 두려워 하는 것인지? 난 이것에 대한 정의가 어느 때 보다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조건 남의 죽음에 대해 연민하며, 나의 죽음에 대해선 두려워 하는 그런 태도를 벗어나 좀 더 성숙하게 죽음을 생각하고 맞는 것 이것이 결국 진정한 삶이요, 죽음은 아닐까?

 저자도 '죽음의 마수'란 표현을 썼지만 흔히 죽음을 일컬어 '마수'란 표현도 '임사체험'만큼이나 적절한 표현일까? 우리는 언제까지 죽음을 그런 식으로 이해하고, 방치할 것인가? 그렇다면 누구도 죽음을 피해가는 사람은 없고, 나도 언젠가 죽을 텐데 너무 무지하고 무책임한 것은 아닐까? 그래서 이 책이 그런 나의 생각에 좀 더 도전을 주는 그런 책인 줄만 알았다.     

 

그렇다면 누가 잘못했을까? 멋 모르고 제목에서 '죽음'이란 단어 하나를보고 읽기를 선택한 나의 성급함이 문제였을까? 제목에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으니 다소 생소하고 또 어찌보면 고루하더라도 '소생의학의 현주소를 가다' 뭐 그런 제목이었다면 헷갈리지 않았을까(하긴, 그렇게 전문적인 제목을 달았다면 대중의 외면을 받았을 것이다. 아, 제목 짓는 것은 역시 어렵다.ㅠ)?

아, 물론 그렇다고 이 책이 전혀 가치 없는 책이라는 말은 아니다. 소생의학이란 다소 생소한 분야를 나름 평이한 문체를 써서 일반인도 이해하기 쉽게 쓴 공로는 높이 인정할만 하다.

그런데 소생에 대해 과연 일반인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물론 생각하기에 따라선 흥미로운 주제고, 분야인 것만큼은 사실이다. 하지만, 누가 걱정한다고 한 키나 크게 할 수 없다는 성경 말씀처럼, 나는 소생의학이 발달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생명이 더 연장됐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주어진 날 수를 사는 것뿐이라는 다소 운명론자적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저 현대의 소생술에 의해 살아났다면 그건 그가 그것이 발달되지 않은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것뿐이다.

진시황이 죽지 않으려고 불로초를 구했지만 결국 그는 생각 보다 그리 오래 살지도 못하지 않는가? 그건 김일성도 그랬고, 김정일도 그랬다. 

소생술이 발달이 됐다고 어떤 사람은 좋아라 하지만, 한쪽에서는 일부러 존엄하게 죽을 것을 생각해서 일부러 치료를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

 

사실 이 책은 소생의학이라고 해서 꼭 의학에 관한 분야만을 소개하려고 하지 않았다. 철학적이고, 윤리적인 접근까지도 포함하고 있어 (난 좀 버겁긴 했지만) 나름 생명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인상적여 보인다. 한번쯤 읽어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아, 그나저나 어떻게 하면 책 선택에 대한 실패율을 줄여보나?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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