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웅현의 책을 읽다가 문득 내가 이 영화를 한 번도 보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이 영화는 잘 알려진 대로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그 소설이 번역되어 나온 지는 대략 20년이 넘은 걸로 알고 있다. 한창 상종가를 치고 있었을 때 나도 한 권 사서 읽은 적이 있다. 하지만 읽고 나서의 나의 느낌은 과유불급이었다. 비슷한 시기 나는 창작학원을 다니고 있었는데 거기서 알게 된 원생으로부터 멋모르고 말했다 어떻게 그 책을 두고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냐고 구박 아닌 구박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죄라면 내가 유치원을 나오지 않은 것과 들은 것도 없으면서 쓸데없이 지적여 보인 나의 외모 탓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거짓말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내가 이 영화를 오래도록 보지 않고 있었던 것도 원작에서 은혜를 못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원작에 훨씬 못 미친다는 평가를 받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좋은 영화는 계속 줄을 이었으니 잊히는 것도 당연했다. 하긴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잊혔다 어느 날 문득 툭 튀어나와 보게 되는 게 영화 아닌가? 마치 잊힌 앨범을 생각지도 않은 때 보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번에 보니 왜 이 영화를 두고 사람들의 평가가 그러한지 알 것도 같다. 나는 이 영화에 별 세 개를 주겠다. 네이버 영화의 평점은 평균 네 개인데 쿤데라의 작품을 영화화 한다는 건 모험이란 점에서 다들 감히 (영화감독 나부랭이가) 쿤데라의 작품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정도 만들었다면 동정표로 네 개를 줄 수도 있겠지만 평점은 평점이다. 이런 쉽지 않은 원작을 별 세 개면 가히 성공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배우도 짱짱하지 않은가? 다니엘 루이스와 줄리엣 비노쉬가 출연했다는 것만으로도 이건 충분히 예술 영화로 손색이 없다.

내 책에도 그런 얘기를 썼지만, 나는 문학이 영화와 이종교배가 가능한 요즘의 행태가 못 마땅했다. 물론 예술이란 측면에서 크게 보자면 필요한 일이긴 하겠지만(그리고 그것을 누구도 막을 수는 없겠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문학은 더 문학다워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쉽게 영화화 하겠다고 덤비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화 하겠다고 하는 또라이 같은 감독이 있을 수 있는데 그가 진짜 예술을 사랑하고 영역을 확장시키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나는 그런 점에서 결코 자기를 쉬 열어 보여주지 않았던 쿤데라에게 경의를 표하는 바이고.
이 영화가 실패한 성공작이 될 수밖에 없는 건 문학은 문학적 서사와 문체가 있는데 이것을 영상으로 표현하려니 오히려 밋밋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서사와 문체는 작가 고유의 권한 아니던가. 박웅현의 발대로라면 쿤데라는 그 작품에서 키치를 말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에선 키치 보다는 어쩐지 세 사람의 존재 방식에만 집약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토마스와 테레사, 사비나. 원작엔 프란츠도 있지만 영화에선 그다지 비중 있게 나오지도 않는다. 그나마 후반으로 갈수록 영화는 토마스와 테레사에게만 집중되어 있다.
사실 토마스와 테레사는 적어도 우리나라에선 결코 성립될 수 있는 커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실력 있는 의사와 시골 웨이트리스가 어울린다고 생각하는가? 그런 점에서 키치를 말하자면 우리나라가 더 앞서는지도 모르겠다. 그건 또 차치하고, 언제나 그렇지만 커플은 서로 다른 점 때문에 커플이 된다. 토마스는 여자만 보면 환장하는 뜨거운 남자지만 테레사는 한 사람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타입이다. 누가 들으면 웃긴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난 이 영화가 사랑의 온도 맞추기 과정? 뭐 그런 거란 생각이 든다. 즉 토마스는 테레사를 만남으로 그 바람벽이 차츰 가라앉지 않는가? 테레사도 딴 남자와 관계를 갖지만 그건 그 남자가 좋아서가 아니라 토마스에 대한 반발심 때문이다. 즉 누구는 끌어 내리고 누구는 끌어 올려 수평을 맞추는 것.
그렇지 않더라도 토마스의 바람벽은 언제나 갈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은 차츰 노쇠해지니까. 그의 뜨거움도 언젠간 식지 않겠는가. 남자와 여자는 원래 잘 맞지 않는다고 한다. 그 맞지 않는 사람끼리 맞추며 살려니 얼마나 힘이 들겠는가. 그런데 그리도 철학적인 쿤데라도 극적인 것을 좋아했던 걸까? 이제 겨우 서로 행복을 느끼며 살만하다 싶을 때 토마스와 테레사는 교통사고로 죽음을 맞이한다. 사실 이러한 일이 현실에서 기인된 것인지 아니면 드라마가 그러니까 현실이 따라하는 건지 구분하기가 어렵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의 부모님도 그랬으니까. 20년 가까이 서로 토닥거리며 살다가 이제 겨우 부부의 정을 느낄 만하다 싶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나의 오빠도 오랜 세월을 계약직으로 떠돌다 겨우 정규직으로 전환을 앞두고 홀연히 저 세상으로 갔다. 살만하던가. 생의 의미를 깨달을 즈음 돌연 죽음을 맞이하는 게 인간인 것인가 아니면 그 시기 죽음을 맞이하려니 그 죽음을 앞두고 생이 찬란해 보이는 걸까. 법정 스님이 그런 말을 했단다. “근원적으로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변화하는 세계가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한 날 한 시에 간 토마스와 테레사는 변화된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겠지. 나의 아버지도, 오빠도. 아무튼 난 그런 생각을 하며 이 영화를 보았다.
거기에 러시아와 폴란드의 불안한 정세가 끼어들기도 한다. 프라하의 봄. 우리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그 이름을 따 서울의 봄이라고 부르기도 했었다. 지금 광화문과 청와대에서 데모하는 양상을 보면 정말 격세지감이다. 과연 우리에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나 싶기도 하다.
이 영화를 보니 원작이 읽고 싶어졌다. 지난 번 윤동주의 전기 영화를 봤을 때도 그렇고 우리에게 문학은 이런 식으로 소비가 되겠구나 싶기도 하다. 어떤 건 영화를 봐도 꼭 원작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안 드는데, 어떤 영화는 꼭 원작이 보고 싶게 만드는 영화가 있다는 것. 영화와 문학이 공생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