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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 : 초회 한정판 (2disc)
이준익, 박정민 외 / 아트서비스 / 2016년 8월
평점 :
품절
이 영화를 두 번 내리 보았다. 나는 왜 개봉했을 때 왜 혼자 개봉관에 가서 보지 못했을까? 후회가 들 정도다. 가끔 그럴 때 있지 않나, 무슨 영화 한 편 보고 센티해지고 싶을 때. 하도 우울증이 난무한 시대라 꼭 멀쩡한 사람의 기분까지 일부러 망가트릴 필요 있겠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내가 말하는 바가 뭔지 알 것이다. 그냥 좋은 영화 한 편 보고 마음을 정화하고 싶은 것이다. 그럴 때 딱 보기 좋은 영화다. 늦게 찾아 본 것도 잘못이긴 하지만, 아마도 개봉관에서 혼자 봤더라면 극장을 나와 한없이 길을 걸었을 것이다. 어딘지 목적도 없이 그냥 상념에 젖어서. 그러리만치 좋은 영화다.

책과 작가에 대한 동경을 버리지 못한 사람이라면 영화가 보여주는 미장센만으로도 충분히 빠져들 것 같다. 특히 방 바깥에서 일가친척들이 무엇을 하던 지간에 개의치 않고 그림 같이 앉아 책만 읽는 동주를 보면 새삼 그의 시대와 지금의 시대가 너무 많이 다르다는 걸 절감한다. 무엇보다 그의 시대는 결핍의 시대고, 지금은 풍요의 시대다. 그 시절 들을만한 라디오가 있었겠는가? 볼만한 TV나 영화가 있었겠는가? 소일할 수 있었던 건 오로지 책뿐이 없었을 것이다. 책조차도 흔한 시대가 아니었으니 마음만 먹으면 당시 알려진 유명한 책들은 거의 다 섭렵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지금은 그때 보다 규모 면에서 몇 배는 더 많이 책이 쏟아져 나오지만 읽지 않는다.
또 다른 것이 있다면 고등학생이다. 요즘의 고등학생과는 참 많이 다르다 싶다. 80년 대 이념의 시대 때 대학생들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암튼 성숙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시대는 부모가 대학은 고사하고 고등학교를 무사히 졸업시켜 주는 것만으로도 부모노릇 거의 다했다고 생각하던 시절 아니었겠는가. 지금의 응석받이 고등학생과 비교할 일이 못 된다.
물론 설정이겠지만, 그때의 고등학생들은 자기 진로가 확실해 보인다. 선생님이 졸업을 하면 무엇을 할 거냐고 묻자, 한 학생은 춘원 이광수의 <흙>을 읽고 감명을 받아 평양 숭실대 농업과를 가겠노라고 말한다. 그러나 선생은 단호하게 말한다. 춘원 이광수는 민족을 저버린 반역자라고. 나라가 망하면 개인은 오히려 확실해 지는가 보다. 나라의 장래가 보이지 않는데 개인은 어쩌면 그리도 나가야할 바들과 해야 할 바들이 훤히 보일 수 있단 말인가. 그게 그 시대 민족교육의 힘이었는지도 모른다.
춘원 이광수 말이 나와서 말인데, 같은 건 아니겠지만, 최근까지 표절에 성추문까지 리스트에 올라있는 작가들이 앞으로 50년 후나 100년 후쯤 어떤 평가를 받을까 싶기도 했다. 사람의 행위야 잘못한 것은 잘못한 거고, 지금의 우리가 춘원 이광수 대해 보는 시각 비슷하거나 아니면 그 보다 낮게 평가하게 되지 않을까? 우리가 이광수의 문학성은 인정하지만 차마 그를 존경한다고까지는 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글 하나 잘 쓰기는 얼마나 어려운가? 하지만 존경 받는 작가가 되기는 더더욱 어렵다는 걸 그 시대나 이 시대나 똑같아 보이는 것 같다.

이 영화의 관전 포인트는 아무래도 윤동주와 그의 고종사촌이라는 송몽규의 대비가 아닐까 한다. 서로 성격도 다르고, 가는 길도 다르다. 같다면 죽음이 같을 뿐이다. 동주는 평생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살았다. 그는 시인이란 슬픈 천명을 가졌다며,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쓰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했다. 그것은 아마도 그가 조용하면서도 자의식이 강한 때문이고, 그의 사촌 몽규와 매사 비교가 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혁명가 기질이 다분한 몽규는 동주 보다 공부도 잘해 열등감을 자극했고, 김구도 인정하는 투사요 행동파였다. 그에 비하면 그는 우유부단하고 문학에 자신을 숨는다고 오해나 받고 있다. 그렇지 않다고 반항하면 매사 그 보다 대범한 몽규는 알았다며 싸우지 않고 넓은 아량으로 동주를 포용한다. 차라리 치열하게 싸우면 열패감이 덜할지도 모른다. 몽규는 동주를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그의 혁명 과업에서 번번이 제외시키는데 그건 또 동주에겐 얼마나 자존심 상하는 일이 되었을까. 대신 그는 그걸 시로 풀어낼 뿐이다. 여기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건, 시 즉 문학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느냐는 거다. 오늘날 문학은 영화와 TV, 그밖에 여러 잡다한 것에 자리를 내준 느낌이다. 문학이 구원을 얘기하려면 성스럽고 고귀하기도 해야 할 것 같은데 후대의 작가들에 의해 오히려 그것을 거부한 것처럼도 보인다. 그렇다면 문학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문학이 우리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뭐냐고 묻고 싶을 정도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동주에게 있어서 책을 읽고 시를 짓지 않았으면 그는 온전히 그 자신으로 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문학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아무도 시를 쓰지 않는다고 했던 그 시대에. 그 시대에 시는 그에게 아무 것도 해 주지 않았다. 부모조차도 아들이 문학의 길을 가지 말고 의사가 되어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러기는 이 시대도 마찬가지 아닌가. 아니 오히려 이 시대는 시를 쓰는 사람은 많은데 읽는 사람은 없다고 하는 시대다. 서로 양상은 다르지만 불균형의 시대인 것만큼은 같다. 하지만 그는 누가 뭐라고 하던 지간에 시로 자의식을 표현해 왔고, 시대를 대변해 왔다. 시가 그였고, 그가 곧 시다. 이제 누구도 그를 시인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마침내 시 즉 문학은 그에게 구원을 허락한 것이다.
시가 문학이 우리에게 무엇을 해 주었냐고, 무엇을 줄 수 있냐고 묻지 말아야 한다. 무엇으로 자신의 구원을 삼던 그것 또한 마찬가지다. 무슨 일을 하든지 우리 당대뿐만이 아니라 후대의 사람에게도 전수해 주려면 그걸 잘 가꿔야 한다. 그것이 동주 자신이 볼 땐 몽규 보다 못한 일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 시대나 오늘날이나 제 3 자인 독자들이 볼 땐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토록이나 명징하고 쓸쓸한 시를 그가 쓰지 않았더라면 우린 어디서 시가 주는 참된 위로를 받을 수 있겠는가.
중간 중간 흐르는 그의 시가 지금도 귓가를 맴돈다. 감독이 왜 흑백필름으로 했는지 알 것도 같다. 하지만 윤동주 그의 쓸쓸한 영혼을 표현하기엔 다소 미흡해 보이기도 한다. 잡지 편집 회의 때 바닥에 펴 놓은 평상엔 호롱불을 켜놨으면서 방 한쪽 구석에 켜 놓은 전기스탠드나 몽규가 차던 가죽 손목시계, 그와 동주가 배를 기다리며 입었던 겨울 코트 등이 시대와 맞지 않게 너무 세련됐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나는 이준익 감독의 결코 고급지지 않은 정서를 좋아한다. 동주 역에 강하늘을, 몽규 역에 박정민을 캐스팅한 건 일단 적절해 보인다. 특히 나는 강하늘을 좋아하는데 그의 반듯한 이미지가 동주 역을 맡기에 결코 부족해 보이지 않는다. 박정민은 아직 이렇다하게 확 끌리는 건 아니지만 점점 좋아지고 지켜보고 싶은 배우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다시 한 번 또 돌려서 보았다. 아직 다 보지는 못했는데, 영화를 보는 동안 내 인생의 영화 리스트에 포함시켰다. 언제 다시 보아도 좋아할 것 같다. 이 영화를 보고 윤동주의 전기 소설이나 평전을 사 봤다는 사람이 의외로 많았다. 나 역시 그런 충동을 느꼈다. 조만간 전기 소설이든 평전이든 사 봐야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