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아는 분이 그의 사무실 신년회를 한다고 해서 갔다(사무실이라고는 하지만 실은 오피스텔이다).
예전 같으면 제법 왁자했을텐데 이번엔 공교롭게도 나와 번역하시는 분, 이렇게 셋만 모였다.
사무실 주인장과 내가 동갑이고, 번역하시는 분이 그 보다 한 살 위다.
그런데 그 주인장, 번역가께서 가져 온 와인을 따서는 내 잔에 먼저 따르려 하는 것을 배운 것이 있어 사양하고 번역가 먼저 따라드리도록 했다. 그러면서 불쑥 튀어나온 말이 "유유상종"이라고 했다.
웬열. 분명 머리속에선 이 말이 적당한 말이 아니란 걸 알고는 있었는데 정확한 사자성어가 생각이 나질 않아 무조건 질러버린다는 게 그만...
우린 그대로 한동안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웃을 수 밖에 없었던 건 그 순간 누구도 이 상황에서 맞는 사자성어를 대지못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번역가님이 깔깔 웃으며 겨우 "장유유서"라고 했다. 나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안도할 수 있었다. 장유유서. 그것을 기억하지 못해 그런 실수를 하다니. 결국 이럴 때 만만한 건 나이 탓이다. 학년도 바뀌고, 반도 바뀐 그 웬수 같은 나이 말이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게 꼭 나이탓이겠는가?
같은 '유유'에서 걸린 것으로 그런 실수는 젊은 사람도 하지 않는가?
나이탓하면 서글퍼지긴 하지만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나이탓만큼 좋은 것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만큼 편해지는 수도 있고.
잊지 말자. 찬물도 위 아래가 있다고, 장유유서. 얼마나 아름다운 예의범절인가.
그 신년회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보니 서재의 달인에게 보내준다던 알라딘 선물이 도착해 있었다. 별로 기대는 안 했는데 그래서인지 선물은 대체로 마음에 들긴 했다. 그런데 좀 아쉬운 건 이걸 새해가 되기 전에 받았으면 더 좋았을 텐데 싶다. 그랬다면 달력도 새해 부터 책상 머리맡에 모셔놨을 것이고, 다이어리도 새해부터 썼을 것이다. 알다시피 다이어리는 새해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쓸 수 있도록 되어 있는데 벌써 앞의 일주일 이상을 비워두고 써 나갈수 밖에 없다. 물론 안다. 연말이었으니 택배의 분주함을 피해 이제야 보낸 거겠지.
아쉬운대로 지나갔지만 새해가 되고 기억나는 일을 적어넣긴 했는데 엊그제 금요일부터다. 그러니까 그 이전에 뭘하고 지냈는지 기억이 없다. 이런 좌절을 봤나?ㅠ
그런데 이 다이어리가 또 나의 승부욕을 자극한다.
적당히 두꺼웠다면 그냥 심플하고 모던하네 하며 구석에 방치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확 두꺼워져 버리니까 남 줄 수도 없고, 열심히 써서 보관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사실 내가 다이어리를 안 쓰게 된 것은 알라딘의 영향이 크다. 처음 블로그를 쓴게 알라딘 서재였고, 쓰다보니 일기 쓰는 게 점점 멀어졌다. 그래서도 서재의 달인 선물로 다이어리 보내준다는 게 별로였고. 그런데 이런 다이어리를 보내줘 버리면 나더러 어쩌란 말인가?ㅠ
아무튼 보내주니 고맙게는 받겠다만, 역시 서재의 달인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닌 성 싶다. 다이어리를 생각하면 서재가 울고, 서재를 생각하면 다이어리가 울고.
아마도 이러면서 또 한 해는 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