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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혼자 읽는 주역인문학 - 세상에서 가장 쉬운 주역 공부 ㅣ 새벽에 혼자 읽는 주역인문학
김승호 지음 / 다산북스 / 2015년 10월
평점 :
절판
사람이 자기 운명을 알고 싶어하는 것은 거의 본능에 가깝지 않나 생각한다. 그래서 점이나 사주를 보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급격히 서양의 문물과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점이나 사주를 터부시 해 왔다. 그래서 그것의 대안으로 막연히 주역을 동경하기도 했다. 그것은 과학이라 하지 않던가? 즉 자기 운명은 알고 싶은데 점은 미신이라 볼 수 없고, 주역은 또 그렇지 않으니 그것을 통해 자기 운명을 알아보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주역이 어째서 과학이란 말인가?
우선 주역은 너무 방대하다. 또한 그것은 동양사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특히 서양사상이나 과학은 널리 알려진 것에 비해 동양사상은 너무 방대해서일까? 감히 대중화를 못하고 있다(아니면 안하고 있거나). 그래서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 그냥 뜻이 있으면 그 사람이 들이 파는 것이지 누가 알아 달라고 보채는 법이 없는 것이다. 그게 어쩌면 주역을 포함한 동양사상의 운명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물질이 발달할수록 정신적인 것을 추구하다 보니 요즘엔 서양의 그것보다 동양적인 것이 더 각광을 받는 시대가 도래했다. 유명한 분석심리학자 칼 융이나 아인슈타인이 주역을 공부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고, 공자는 주역을 공부하기에 자신의 생이 너무 짧음을 한탄했다고 하니 주역이 대단한 학문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오죽했으면 "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역설했을까.
그런데도 주역이 과학적 체계와 기틀을 마련했던 건 독일을 철학자 라이프니츠에 의해서라고 한다. 나는 여기서 서양이 분석이나 해석에 강하고, 동양이 통찰에 능하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이 오랜 학문이 라이프니츠에 의해서야 체계를 확립할 수 있었더란 말인가. 이후 서양의 물리학자 닐스 보어에 전해 졌고 그는 노벨 물리학상까지 받게 된다.
아무튼 이 책을 읽으니 시야가 확 넓어지는 느낌이었다. 특히 주역은 세상 만물을 범주화시키는 작업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될 것이다. 범주화가 가능하면 세상에 이해 못할 것이 없을 것도 같다. 그런데 또 문제는 이 범주화가 그렇게 만만하게 쉬운 일이 아니다. 처음엔 잘 따라 갈 것만 같은데 어느 순간 머리속에서 과부하가 일어났다. 그것은 저자의 괘의 설명에서 4괘까지는 별 무리가 없었다. 8괘까지도 잘 따라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16괘가 되고, 32, 64괘가 되자 뭔 말인지 헷갈리는 것이다. 무엇보다 64괘가 뜻하는 바를 잘 알고 있어야 주역의 기초를 알 수 있는데 무엇으로 64괘를 다 알 수 있을까? 외우는 건 조두라 어렵고, 틈틈히 자주 보고 익혀두는 것인데 워낙 귀차니스트라 장담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특히 저자는 이것을 설명하면서 주변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열심히 관찰하면 얼마든지 응용이 가능하다고 하는데 아예 목숨을 걸었다면 모를까 나 같은 벽안의 사람은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런데 읽으면서 오래 전 내가 교회 청년부 시절 내게 성경공부를 가르쳤던 조장 언니의 말이 생각났다. 그 언니는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 동양 사상도 공부해야 한다고 했었다. 어찌보면 기독교와 동양 사상은 서로 상극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세계 4대 종교의 시조는 모두 동양에서부터 시작됐으며 동양 철학에 뿌리를 뒀다는 것이다. 동양철학은 자연과 범신론에 뿌리를 두는 것이라면, 기독교는 오직 그리스도라고 하는 한 인물을 연구하고 사랑하기 위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지향점이 다른 것이다. 그때 그 언니는 왜 기독교인가를 알기 위해 그 바탕을 이루는 동양철학을 알아야 한다고 봤던 것 같다.
그 언니가 그런 이야기를 했던 때는 30이 채 안 됐거나 그 엇비슷한 나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 언니가 무슨 동양철학을 깊이 공부하고 그런 말을 했던 것 같지는 않고 그냥 이치를 생각해 보니 그런 것 같아 그렇게 말한 것 같다. 그런데 나는 그 언니 말이 나름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동양철학을 공부하면 자연이나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질 수는 있지만 자칫 허무주의로 흐를 수가 있다. 한 사람을 무조건 맹신하고 따른다는 것 역시 위험할 수가 있다. 그것이 아무리 구원을 제시하는 신앙일지라도 말이다. 아마도 그 언니는 시야의 균형을 위해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니 그 언니가 했던 말이 나름 일 리가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나의 이 말에 크게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 뭐 눈엔 뭐만 보이고, 믿음이 있으면 뭐든 그쪽으로의 해석과 사고가 가능한 법이니까.
그나저나 솔직히 난 이 책에 한 방 먹은 느낌이다. 나이가 드니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또는 어떻게 살게될까 알고 싶어 이 책을 읽어 본 건데, (물론 이 책 한 권 읽었다고 다 알 리는 없겠지만) 오히려 주역이란 학문은 너무 어렵다는 것을 확인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나는 또 어떻게 살아야 하나? 어떻게 살게 될까? 아무래도,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던 성경 말씀을 다시 한 번 음미해 봐야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