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유불급의 두 가지 예

 

왜 제목을 <화차>라고 했을 지 알 것도 같다. 어쩌면 '사채업자'의 은유 같기도 하고, 돈에 영혼을 팔아버린 사람이 마지막에 저승 갈 때 타게될 불수레란 의미 같기도 하다.  

 

책 VS 드라마

 

그런데, 솔직히 나는 미미 여사와 아직 친하지 않아서 그런지, 아니면 장르 소설에 익숙치 않아서 그런지, 장황한 활자의 나열에 질려버리고 말았다. 나중엔 현깃증이 날 정도였고, 내가 이해한 게 맞는 건지 확신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마침 일드의 '화차'가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보았다. (물론 이 싯점에선 한창 절찬리에 상영중인 우리 영화 <화차>를 봐주는 것이 좋을 것 같기는 한데 그것은 다음을 기약하기로 하고) 그것을 보고나니 내가 책에서 보고 이해했던 것들이 틀린 것마는 아니구나 안심을 했다(그렇더라도 난 앞으로 장르 소설을 좋아할 수 있을는지 더 확신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것은 아무래도 나이가 주는 한계 때문인 것 같다. 책도 나이에 맞게 좋아하는 분야나 장르가 따로 있는 것 같다. 아무래도 이런 추리소설은 젊은이 취향은 아닌가 싶다). 

드라마로 보니 책에서 보는 많은 활자들이 하나의 영상으로 눈에 착 들어와 여간 편안해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보면 될 것을 왜 그리도 책은 주절대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전에도 그런 비슷한 얘기를 했지만, 이제 작가들은 자기 작품이 영화화될 것을 계산하고 글을 아예 그렇게 쓰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이 주는 장단점이 있을 수 있는 것 같다. 물론 좋게는 문학과 영화의 경계를 허무는 것이 될 수도 있겠지만, 너무 그것을 추구하다 보면 문학은 좀 더 자극적이 될 것이며 문학이 본래 가지고 있는 고유한 것을 스스로 해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닌지 싶어 그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면 알아 들을 작가들이 과연 있을까 싶다. 그들도 작가이기 이전에 생활인이니 당장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면 당장 돈되는 쪽으로 자신의 글을 써야하고 당연 대중이 선호하는 방식으로 글을 쓰게 될 것이다. 하지만 문학의 미래를 생각하면 이건 정말 위험하고 경계해야 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감히 외치고 싶다. 문학 본연으로 돌아가자! 고.

 

과거의 문학은 이러지 않았다. 문학적 사유와 향기가 있었다. 난 아마도 예전 순수 문학의 향기를 조금은 알고 그에 대한 향수가 남아 있어 이러는지도 모르겠다. 앞으로의 세대는 과연 순수 문학의 정취가 무엇인지 알까? 순수 문학의 가치를 알지도 못한 채 문학은 원래 영상으로도 호환 가능한 것이라고 그렇게 알면 어떻게 하지? 강한 것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 남는 자가 강한 것이랬다고, 문학 역시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 변종 수퍼 바이러스 뭐 이런 것으로 인식될 날도 머지 않아 보인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화차>라는 작품이 잘못됐다는 것을 말하려 하는 것이 아니다. 이 작품은 나름 의미가 있는 좋은 작품이다. 하지만 이렇게 드라마로 손색이 없게 만들면 드라마로 보지 누가 책으로 읽겠느냐는 것이다. 더구나 활자 세대는 갔다고 하는 마당에 말이다. 이런 예는 물론 이 작품이 처음은 아니다. 많은 사람이 영화나 TV 드라마로 보면 책은 잘 안 보게 된다. 결국 작가는 팔리는 작품을 쓰려다가 제 살을 깍아 먹는 꼴로 되는 것은 아니냐 하는 우려다. 

 

작가 VS 감독        

 

어쨌든 나는 이것을 드라마로 봤을 때야 비로소 작가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를 알 것 같았다. 물론 미미 여사가 이룬 문학적 성취(?)가 결코 작지 않음을 나도 잘 알고 있다. 적어도 그녀는 사회파 추리 소설을 쓰는 작가다. 자신만의 무기를 가지고 현대성을 꼬집고 비판해 왔다는 점에서 문학적 성과는 작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의 문체는 건조해 보인다. 딱 영화화하면 좋을 듯한 문체. 문학쪽에서 보면 별로 사유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어쩌면 내가 견디지 못했던 건 바로 이런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왜 작가는 문체를 그처럼 생각하지 않았던 것일까. 문체는 작가의 고유한 사유를 담는 그릇 같은 것이다. 그것을 외면한다면 글쎄다, 이런 말하면 너무 한다 할지 모르지만 이류는 될지언정 일류는 되지 못할 것이다. 물론 미미 여사는 이미 그 명성만으로도 아쉬울 것이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대중에게만 어필이 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그건 큰 안목으로 봤을 때 문학적 사생아를 낳는 꼴 밖에는 되지 않아 보인다. 지금도 그를 추종하는 제2, 제 3의 미미 여사는 얼마나 많을 것이며, 작가 지망생들은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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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드는 원작에 충실해 보였다. 그점에 있어서는 감독에게 고마워할지경이다. 단지 그래도 좀 감독의 시각을 담고 싶었는지, 내가 읽기론 사토루가 애지중지하던 보케가 원작에선 죽은 것으로 나와 있는데 드라마에선 죽지 않고 재회하는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마지막 엔딩에서 혼마 형사가 마침내 실종녀를 만났을 때 자신의 이야기를 해 보라고 했을 때 뭔가 조금이나마 시청자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게 되길 바랬었던 것도 같다. 그 누구도 아닌 자신으로 살라고 주문하는 것도 같았다.

그런데 우리 영화 <화차>는 원작과는 좀 많이 다르다고 한다. 그런 것으로 봐 감독의 시각 또는 재해석이 많이 들어가 보이는 듯도 하다. 그리고 그 영화는 호불호가 있긴 하지만 대체로 선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요컨대, 전에 나는 여타의 문학 작품이 영화화 된다고 이제 소설가의 위상이 높아질 거라고 좋아했었다. 그리고 그것은 시나리오를 쓰는 어떤 녀석으로부터 다분히 질투어린 비아냥을 받기도 했다. 적어도 나는 글을 쓴다면 시나리오 안 쓰고 소설을 쓸거니까 당연 녀석은 나를 경계했겠지. 하지만 생각해 보니 정말 작가가 자기 작품 영화화된다고 마냥 좋아할 것도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건 정말 토사구팽 당하는 일 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작가 보다 위상이나 지명도가 높은 직업이 감독 또는 연출가일 수 있으니까. 그들이 판권을 사서 자기식의 작품으로 새로이 재탄생시키겠다는데 뭐가 잘못이란 말인가. 그것이 서로 상생하고 윈윈하는 것이라는데 그게 정말일까? 뭐 생산자끼리는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문제는 그것을 소비하는 대중이다. 대중이 영상만을 쫓고 활자의 수사와 사유를 점점 멀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안 그래도 대중은 복잡하고, 힘들고, 피곤한 것은 딱 질색이다. 그들에겐 읽는 것 보다 보는 것이 더 쉽고 좋다. 그래놓고 신선놀음만 하겠다는 건가? 작가의 변질은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닌가. 

내가 이 작품에 너무 많은 기대를 해서일까? 난 오히려 이런 우려 밖엔 할 수가 없었다.

 

우린 지금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가?

 

나의 이런 우려를 차치하고라도, 이 작품은 우리에게, '우린 지금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가?'를 묻고 있는 것 같다. "나는 그저 행복하고자 했을 뿐인데."라고 말했던 실종녀의 말이 참 허허롭고, 자칫 발 하나 잘못 들여서 늪에 빠진 모습을 쉽게 연상할 수 있게 만든다. 이런 자본주의화 된 세상에서 이 여자에겐 행복이 뭐 길래 이런 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저 남이 크레디트 카드를 남발하며 사치와 호화로운 물품을 사 들일 때 남들이라고 하는데 나라고 못할까 하는 집단 심리 그것 아닌가. 물론 실종녀는 그다지 크게 사치한 것은 없다고 하더라도 소소한 건 소소한 것대로 위험성은 있다. 아무튼 그게 행복이었나? 그녀가 그렇게 말하기엔 행복이 너무 보잘 것 없다는 생각은 안 드나? 그런데 그것만이 행복이라고 말하는 세상이 이 자본주의화된 세상에 그녀는 속고 있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었고. 무엇보다 속는 것은 실종된 그 여자만이 아니다(난 그녀를 어떻게 불러줘야 할지 모르겠다. 원래의 이름으로 불러줘야 할지, 아니면 신분을 위조한 이름으로 불러야할지. 둘 다 완벽하지가 않다). 우리도 속고 있지 않냐고 작가는 묻고 있는 것 같다. 적어도 그런 것만이 행복은 아니라는 것을 이 여자가 알았다면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진짜 행복은 쉽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것은 애써 찾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비해 여자가 말했던 '행복'이란 건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한 즉물적인 것이다. 물론 그게 있으면 나쁘지는 않겠지만 그게 행복의 전부는 아니지 않는가.

 

나는 언젠가 돈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그것의 실체를 생각해 본적이 있다. 책의 내용에도 그런 말이 나오지만, 돈은 그야말로 종이조각이나 코인에 지나지 않는다. 얼마나 하찮은 것이랴. 그러나 그것의 가치를 생각하면 정말 하찮다. 그런데 그것으로 우리는 필요한 물건을 사며, 그 거품에 온몸을 담그며, 필요하면 사람을 죽이거나 파산까지 한다. 어떤 사람은 이것의 있고 없음 때문에 결혼을 못하기도 하고, 이혼도 한다. 사람의 운명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실로 괴력을 가진 물건이다. 그래서 우린 그것에 그토록 많이 흔들린다. 작품을 보면 우울하고 화도 난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 실종녀처럼 피해자가 되는 동시에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행복을 말하기 전에 자유를 말할 수 있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치하지 않을 자유. 돈에 메이지 않을 자유. 돈만이 행복의 전부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 돈만이 전부라고 믿게 만드는 이 세상에 그렇지 않음을 보여줄 자유. 그것은 행복 보다 더 강력해 보인다. 동시에 자유는 선택이고 보다 능동적인 것인 것이다. 돈만 지불하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그것보다 훨씬 값진 것이다.

 

답은 어디에...

 

물론 작품은 그것까지를 말하고 있지 않다. 문학이 그렇듯 좋게 말하면 열린 결말이고, 문제재기 정도에서 끝나버린다. 이 작품도 그렇다. 그냥 문제재기만 할 뿐이다. 답은 각자의 몫이다. 엊그제 모처럼 괜찮은 영화를 봤다. 좀 오래된 영환데 <고잉 온 스타일>이란 미국 영화다. 노인 셋이 은행을 털고 그중 노인 둘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그 일을 주동했던 노인 하나만이 남아 결국 경찰에 의해 검거되고 교도소에 간다는 지극히 간단한 영화다. 그런데 이 영화는 의외로 생각할 것이 많은 영화였다. 이 노인들은 정해진 규칙을 준수하며 살아왔다. 하고 싶은 것도 못하고 절제하며 앞만 보고 살아왔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죽기전에 일탈을 꿈꿔보는 것도 이들에겐 나쁘지 않아 보였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니 없던 젊음의 기백이 살아나는 것 같다. 그 일을 공모하고 주동한 노인은 교도소로 가면서도 끝까지 돈이 어디에 있는지를 밝히지 않고 형량을 고스란히 살기로 한다. 그는 말한다. 교도소 밖이나 안이나 나는 어차피 수감자의 삶을 사는 것은 똑같다. 그러니 교도소안에서 살겠다고 그를 면회 온 조카에게 말하고 다시 뚜벅뚜벅 당당하게 면회실을 나간다. 하긴, 노인에겐 교도소 밖에서 혼자 사느니 교도소안에서 수감자와 함께 사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그게 참 인상적이다. 노인이 되면 그게 좋겠다 싶다. 어떻게 살아도 별로 아쉬울 것이 없는 삶.

물론 그렇다고 이 영화가 노인의 범죄를 부추기는 영화로 보면 안 된다. (일탈이 그런 식으로 표현이 돼 약간은 아쉬운 면이 없지 않지만)이 영화는 오히려 세상에 대해 자기식의 복수를 그렸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늘 정해진 대로만 살라고 하는 세상. 그래서 진정한 자유란 게 뭔지도 모르고 선량하게만 살라고 하는 세상에 대한 마지막 몸부림 같은 것으로도 보여진다(그런데 그게 나름 귀엽다ㅋ). 그런 것처럼 우리가 정말 돈이면 다 된다는 세상에 끌려 다니지 말고, 그게 전부라고 믿게 만드는 세상에 복수하는 마음, 선택하는 삶. 좀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다.

 

이 작품에 나오는 실종녀와 같이 살지 않으려면 당장 드는 생각은 화폐 없는 세상에서 살아 보는 삶을 살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려면 연합하고, 상부상조 해야할 것 같다. 개인주의와 자본주의는 자웅동체 같은 면이 있기도 하니까. 함께 사는 건 확실히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 그래서 개인주의가 확산이 되고 그 허전함과 외로움을 매꿔주는 것이 자본주의의 모든 것으로 대변되는 산업화가 아닌가. 거꾸로의 삶, 역류하는 삶은 반드시 필요해 보인다. 안 그러면 세상은 숨이 막혀 살 수가 없다. 우리는 인류의 허파로 살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좀 갖다 붙이는 경향도 없지 않지만, 읽는 것이 보는 것 보다 불편하다고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요는 영화만 보지 말고 책도 좀 읽으라는 말이다. 문학의 기능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지금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가? 우리는 지금 몇시에 살고 있는가? 그것을 자각하도록 만드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미미 여사는 그것을 아주 충실히 잘 감당하는 작가 중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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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3-18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후... 스텔라님의 글을 읽으니 책장속에 가만히 잠들어있던 <화차>를 얼른 꺼내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모방범>형제들을 조용히 꺼내들어야겠지요. 제발 좀 한 권을 무사히 끝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stella.K 2012-03-18 19:34   좋아요 0 | URL
읽어줘서 고맙다. 소이진. 근데 못 읽었다고 자책은 하지마.
못 읽겠으면 일드로 봐.ㅋ

이진 2012-03-19 06:29   좋아요 0 | URL
조금 읽어봤는데, 꽤 괜찮은 걸요?
미미여사의 글은 초반이 잘 읽힌다는 장점이 있어요.
대개 일본 추리소설들을 보면 초반에는 지형 설명에, 인물을 설명한답시고 처음 들어보는 기괴한 단어들을 막 뱉어놓는데 저는 그게 읽기 싫어서 요새 추리를 안 읽고 있어요. 요코미조 세이시도 엄청난 작가라는데 초반에 지형설명 부분이 이해가 안가서 손을 뗀 상태구요. 오늘부터 하여튼 <화차>읽어야겠습니다

stella.K 2012-03-19 11:39   좋아요 0 | URL
중요한 건 그 작품이 의미하는 바인데
그 점에 있어서는 뭐라고 할 수 없을 것 같아.
하지만 역시 미미 여사는 내 꽈는 아닌 것 같아.
간혹 나 같은 족속이 있더라.
하긴 모든 사람이 다 좋아할 필요는 없잖아.
잘 읽어보라구.^^

차트랑 2012-03-18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 사실 작품의 질을 고집하다가 돈을 덜 버느니
차라리 질을 떨어뜨리는 한이 잇더라도 많이 팔리는 선택을 한 것은
아닐까????
그런 선택은 아닐까???
화차를 읽지 않은 입장인지라...

어쨋든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stella.K 2012-03-19 11:41   좋아요 0 | URL
요즘 작가나 출판계가 다 그렇잖아요.
중국은 작가들한테 월급도 준다는데
그렇게 해서라도 작가 육성을 하면 좋을 것도 같은데
원래 또 작가라는 족속이 배곪기 전에는 뭘 안하는 게으른 족속이기도 한지라
뭐가 문학계의 발전을 위한 것인지 잘 모르겠어요.ㅎ

페크pek0501 2012-03-19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라마로 보니 책에서 보는 많은 활자들이 하나의 영상으로 눈에 착 들어와 여간 편안해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 - 이렇다고 해도 저처럼 책을 고집하는 사람이 있을 듯해요.

1. 드라마는 아무래도 영상으로 전달되니까 상상력이 발동될 수 없지만 책은 무한한 상상력을 발동시켜서 더 재밌을 수 있어요. 어릴 적 라디오로 연속극을 들었을 때처럼요.
2. 만약 주인공이 어떤 행동을 했을 때, 상대방의 뺨을 때렸다면 그 이유가 뭔지 드라마는 정확히 알 수 없는 반면, 책으론 그의 독백을 통해서 정확히 알 수 있는 맛이 있어요. 그때의 기분까지 알 수 있죠. 그러니까 더 정확히 전달되는 맛이 있어요.
3. 드라마나 영화가 줄거리 중심으로 보게 된다면, 책을 통해선 줄거리 말고도 다른 것을 관찰하는 재미가 있어요. 작가가 그걸 어떻게 문장으로 표현했는가, 하는 것의 재미죠. 이것이 문학의 중요한 재미라는 생각... 밑줄 긋는 맛도 있죠.
4. 또 책은 들고 다닐 수 있고 언제든 자유롭게 책장을 넘길 수 있으나, 드라마나 영화는 보려고 작정하고 몇 시간을 비워 두고 봐야 한다는 게 부담이 돼요.

스텔라님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에요. 저도 책이 많이 팔렸으면 좋겠고, 순수한 문학으로서의 자리를 지키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잘 읽고 갑니다.ㅋ

stella.K 2012-03-19 18:46   좋아요 0 | URL
언니 말이 맞아요. 근데 소이진이 얘기한 것처럼
지형 설명이 장황하죠. 그걸 쫓아가다 보면 앞의 내용이 뭔지
뒤죽박죽이고 내가 안 것에 대한 확신을 할 수가 없어요.
문장도 꽤 건조하구요. 요즘 작가들이 그렇게 쓴다는 거죠.
그건 또 모르겠어요. 하드보일드 하다고 해야할지.
헤밍웨이의 문장은 하드보일드 하지만 되게 낭만적이고
뭔가의 깊이가 느껴지거든요. 아무튼 책은 책 읽는 맛을 내야한다고 봐요.
근데 문학이 뭔가 영상적으로 그려주려고 한다는 건
전엔 몰랐는데 문제가 있어 보인다는 생각을 이책을 보면서 깨달았다는
거예요. 제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ㅠ

아이리시스 2012-03-19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본은 책,드라마,영화 삼박이 잘 맞아 떨어져서 엄청 빨리 텍스트이용을 하더라고요. 그런데 이것저것 비교하는 재미랄까, 저는 그런 건 없고 어느 쪽이든 하나면 되는 것 같아요. 딱 하나, <백야행>은 일드를 보고 원작소설을 읽었어요. 한국에서 만든 영화는 안봤구요. <화차>도 일드가 있네요! 요즘 일드는 <스트로베리 나이트>만 유일하게 보고 있어요^^

저도 문학은 문학으로 소비하는 게 가장 옳다고 느껴요.

stella.K 2012-03-19 18:48   좋아요 0 | URL
그럼 추천을 눌러주셔야죠.
아이님의 추천이 문학을 살릴 수 있는 힘이 될지 누가 알겠어요.ㅋㅋㅋ
<스트로베라 나이트>라...기억할게요.
전 아직 <심야식당>도 안 봤어요.ㅠㅠ

2012-03-21 16: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21 16:0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