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바지는 빨아 입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안 건 3년 전쯤이다. 이걸 알고 얼마나 신기했던지. 촌티팍팍.
그전까지는 청바지를 사면 열심히 빨아 입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 이후에도 습관에 의해 빨아 입었다(어떻게 빨지 않고 입을 수 있니?촌티나도 할 수 없다). 그래서 어떤 청바지는 파란물이 거의 나오지 않게 되었다. 염색을 했는데 그게 피부에 닿으면 좋을 리 없지 않은가 싶어 빨아 입었던 것.
그래서 지난 번 여름이 시작되면서 얇은 청바지 하나를 구입했는데, 이것은 한번도 빨지 않고 여태까지 입고 있다. 그래봐야 다리 핑계로 외출을 자제했으니 몇번 입지도 않은 셈이다. 그런데 입을 때마다 이걸 한번은 빨아야 하지 않을까? 매번 유혹을 받는다.
요즘 은희경 작가의 에세이를 조금씩 읽고 있었다. 그녀의 글은 정말 모던하다. 나는 알지도 못하는 단어들이 책 한장을 넘길 때마다 하나씩은 나오는 것 같다. 오늘은 읽으니 '누디 청바지'란 말이 나온다. 청바지의 한 종류가 본데 이건 또 어떻게 생겨 먹은 걸까 했더니, 워싱이 안 된 채로 출고되는 청바지를 일컫는 말인가 보다. 그렇담 어떤 건 워싱이 된단 말인가?
어쨌든 이건 세탁을 하지 않을수록 그 아이덴티티가 오래 보존이 된단다. 은희경 작가는 세 가지 이유에서 이 청바지를 샀다고 하는데, 하나는 원고를 쓸 때 작가의 습관이 어떻게 표출이 될까 궁금하고 재미있을 것 같아서고,
둘째는, 빨지 않을수록 칭찬 받는 옷이라 호감이 가서 샀으며,
세째는, 가장 중요한 이유인데, 바지에 자기 정체가 담기는 과정을 소설로 써 보려고 해서란다.(210p) 참, 누가 소설가 아니랄까봐...! 동시에 소설가 역시 탐험 정신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걸 여기서도 다시 한번 깨닫게 한다.
그런데 작가는 그걸 입고 글을 쓰는 동안 손을 네 번쯤 씼었단다. 원고만 썼다고 생각했는데 그동안 바지를 만졌다는 증거. 이로써 첫번째 이유가 증명된 셈이다.
이것을 트위터에 올렸단다. 손을 씼을 때마다 파란 비누 거품이 나오고, 누디 청바지는 모든 청색을 그것이 닿는 모든 것들에게 옮겨 입힌다고 했다. 벗는다는 정체가 그것이었다고. 그러면서 그 글 끝에,
내가 벗는 건 남에게 입혀진다? 혹은 내가 벗어도 남이 입고 있다? 내가 벗을수록 남이 입는다?
암튼 누디 정신!(211p)
그런데 난 이러고 저러고 지간에 손을 씼으면 파란 비누 거품이 나온다는 말에 아까 말했던 나의 청바지를 여름이 가면 기필코 빨아 넣어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까짓 거 아이덴티티가 좀 망가지면 어떠냐? 지금 당장에라도 빨고 싶지만 앞으로 여름이 몇날이나 남았을까? 그동안 몸 좀 저 청산가리 같은 청바지에 굴리고 있는 거지. 포기한다.
아, 그리고 이러고 저러고 지간에 청바지 접어 입지 않아도 될만큼 다리 좀 길어 봤으면 좋겠다. 물론 그나마 다행으로 이번에 청바지는 접지 않고도 무난히 입을 수 있는 것이어서 좋긴한데 뽀대는 그리나지 않는다. 펑퍼짐한 한국형 청바지라고 생각하면 됨. 디자인이 좋아서 산 것이 그만...ㅜ
아무튼 '내가 벗을수록 남이 입는다' 멋진 말이다. 작가란 이렇다는 걸 은희경 작가는 또 한번 통찰한 것이겠지? 이게 뭐 꼭 작가 정신이겠는가? 정말 모두 이런 정신이라면 좋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