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격적으로 책을 읽은 건,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다.
그때부터 책을 모으기 시작했고,
책이 빽빽히 쌓여있거나, 꽂혀 있으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그런 걸 중학교 들어가면서, 그동안 모아온 계림문고 어린이 책을 과감하게 버리고 ,
어른들이 봄직한 묵직한 세로 줄 책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 무렵, 어찌어찌 해서 장식장을 내 방에 들여놓게 됐는데,
이게 거실에 있었으면 폼잡느라고 갖가지 술병에, 장식품들이 들어갔을 것이다.
더구나 옛날 장식장들은 요즘 나오는 그런 것이 아니어서,
제법 크기도 크거니와 수납공간이 넓어 책장을 겸하기도 했다.

그런 책장에 나는 참 부지런히도 책을 사서 꽂았다.
돈이 많았더라면 전집류로 채우면 됐을 것이다.
하지만 난 돈도 없거니와, 그딴 과시용은 내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비록 책을 읽다 포기하는 일이 있어도, 일일이 내 손떼가 묻고, 나의 체취가 묻은(묻어봤자 얼마나 묻었겠냐만) 그런 책으로 빽빽히 세울 수 있기를 바랐다.

처음엔 이걸 언제 다 채우나 싶었는데,
곧 책을 빈 공간 하나 없이 빽빽히 채우고,
그것도 모자라 책장 위에도 책을 얹져서, 보고만 있어도 배가 그득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가끔 심심하면, 어디 내가 그동안 몇 권의 책을 모았나 세어보기도 했는데 400권 넘어가는 것을 보고 더 이상 책을 세지 않았다.
그게 벌써 꽤 오래 전 일이다. 물론 중간에 남을 주기도 했으니 많아야 그 선을 넘어갈 것 같지는 않다.

지금도 난 몇 권의 책이 있는지 잘 모른다.
이사 때 안타깝게도 그 책장을 버리고 왔을 뿐만 아니라,
이사 와서도 지금까지 풀지 못한 책 박스가 몇 개가 되고,
그 위에 책을 차곡차곡 싸놓았다.
또 그것도 부족해 안 읽은 책이 산더미다. 
아무튼 내가 생각해도 엄청나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모르는 사람은 내가 책을 여러 방면에서 굉장히 많이 읽는 줄 것이다.
하지만, 나 역시 편식이 심하며, 편견, 편애가 심하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생각해 봤다. 나는 무슨 책을 안 읽는지를.

우선 난, 추리 또는 미스터리류를 읽지 않는다.
그걸 읽으면 좀 머리가 빠릿빠릿 해 질 텐데, 이야기의 얼개를 파악하는데 꽤 시간이 걸리므로
그 머리 쓰는 게 싫어 안 읽는다.

또, 작가 김훈은, 소설 같은 건 읽지 않는다고 했다.
오히려 자신이 읽는 책은, 법전이나, 소방 수칙, 칼 만드는 법. 뭐 이런 책을 읽는다고 했다.
내가 그런 책을 읽을 턱이 있겠는가? 

그림 많고, 글씨 드문드문 박힌 책 역시 제외된다.
그런 책 보면 괜히 책을 속아서 사는 느낌이 들어 선택하지 않게된다. 
이것에 대해서는 어제 읽은, 조너선 샤프란 포어 말에 귀 기울여 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문학에 대해서는 이상하리만치 다들 완고해요. 활자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나 봐요.
비주얼이 들어간 소설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놀라워하죠."
"비주얼의 중요성이 높아지는 건 확실해요. 세상을 둘러보면 온통 멀티미디어잖아요."
출판업계의 작가들은 누구보다 미디어 빅뱅을 체감할 수 없다. 

                                                                                   -엘르 2011,6월호에서-

멀티미디어적 세상에서 굳이 책까지 그래야 하는 것인가란 다소의 의문의 여지는 남지만,
이 자체만으로도 생각해 볼 가치는 있어 보인다. 
그래도 난 책은 역시 활자의 향연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야말로 사방팔방을 돌아봐도 다 멀티미디어도, 이미지인데 책까지 그래야할 필요가 있는가?
그건 또 나의 어린 시절하고도 무관하지 않아 보이는데,
난 어렸을 때 그림책을 그다지 많이 볼 수 있는 환경에서 자라나지 못했다.
유치원 거치지 않고 바로 초등학교로 직행했던 것처럼, 
나는 한글을 깨치고 나서 바로 책을 읽기 시작한거나 다름없다. 

또한 나는, 가제본을 읽지 않는다.
그런 것으로 봐 나는 분명 활자중독자는 아닌 것도 같다.
활자중독자는 뭐든 읽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이라 가제본도 읽을 것이다.
나도 한 때는 가제본 몇 권 읽긴했다. 근데 읽다보면 넘기는 맛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보통의 정본은 두 페이지가 왼쪽, 오른쪽 한 면이지만,
어떤 가제본은 4 페이지가 한 면이다. 속도감이 없고, 왠지 모르게 벅차다는 느낌이 든다.
뭐 그런 건 차치하고라도, 가제본 읽으면 나중에 정본 보내주는데,
이게 또 사람은 묘하게 만든다.
남 주자니 아깝고, 갖고 있자니 별로 필요가 없다.
출판사에서 아예 안 만들면 좋겠는데...

가제본은 확실히 종이낭비란 생각이 든다.
가득이나 요즘 종이컵 안 쓰기, 산림 보호 이런 거 하고 있는데,
출판사 사람들은 자기네들이 꽤 의식있는 사람들인 줄 착각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가제본은 가제본대로 만들어 종이 낭비하면서, 
여타의 자연보호에 관한 그런 책내면 좋은 책 출판하는 건가?

또한 난 학교 때 수학이나 과학은 젬병이었던 관계로
그런 책은 아예 쳐다도 보지 않는다.
막 내 상처가 건드려지는 것 같아 읽기가 싫어진다.
그렇게 생각하면, 내가 알지못하는 전인미답의 책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다못해 나는 거의 태어나면서 개를 길러왔고, 지금도 여전히 개를 기르고 있으면서도
개에 관한 책은 읽어보지도 못했다. 

또 그뿐인가? 예전엔 책이 그렇게 많이 다양하게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요즘은 출판 환경이 좋아져서 시쳇말로 개나 소나 다 책을 내겠다고 한다.
더구나 책을 팔기위한 마케팅이나 선전문구는 또 얼마나 요란한가?
그런 가운데 옥석을 가리는 일이 중요해졌다. 그런데 이것이 또 쉽지가 않다.
그 과정에서 나의 편견, 나의 취향이 섞여들어가기 마련이다.

그저 내가 오로지 관심있어 하는 건, 문학과 관련된 책들이 고작인데,
이것 또한 얼마나 편견이 많은가? 이 작가는 고리타분해서 싫고, 저 작가는 청승떨어 싫고,
그 작가는 멍청함을 들어내는 것 같아 웃기고, 등등...
요는, 아는 것이 병이랬다고, 좋아하면 좋아할수록 편견은 더욱 심해져 간다는 생각이 든다.

내 방엔 아직도 나의 눈도장과 손때가 묻혀지길 바라는 책들이 그득그득 쌓여 있다.
언젠간 읽어야지 하면서 아직 읽지 않은 책들이다.
알고보면 이것도 나의 편견의 산물이다. 내 취향에 맞을 것 같아 사 놓고, 내 취향에서 아직 선택되지 못한 책들.
때론 책에 대한 편견을 깨고, 지평을 넓혀 보겠다고 각종 리뷰 대회나 이벤트에 올인하는 나.
이 모습이 현재 내가 책을 읽는 자화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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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1-06-05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딴 과시용' ㅋㅋ
저도 책 편식이 심해서 제 남편은 소설 읽는 저보고 감히 '그런 것'만 읽지 말고 골고루 읽으라고 합니다. 문학, 소설 분야만 해도 얼마나 광범위한데...전 그것이라도 골고루 읽으면 좋겠어요.
눈도장과 손때라는 말이 오늘 따라 참 정겹게 들리네요.

stella.K 2011-06-05 19:09   좋아요 0 | URL
맞아요. 소설도 얼마나 방대한데요.
책은 그렇게 편애만해서 읽어도 다 못 읽어요.ㅜ

제가 손때를 손떼로 잘못 썼죠? 헷갈려요.ㅋ

꼬마요정 2011-06-06 0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저건 베스트셀러라서 안 읽고, 이건 내가 안 좋아하는 작가라서 안 읽고, 요건 너무 어려워서 안 읽고... 하지만 세상 사람 중에서 대부분의 분야를 섭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한 분야, 한 작가만 파도 엄청난 걸요..라고 생각하며 아직 읽지 않은 책들 보면서 한숨 짓는 저입니다.^^

stella.K 2011-06-06 12:41   좋아요 0 | URL
ㅎㅎ 저랑 똑같으시군요.
맞아요. 한 분야, 한 작가도 엄청난데,
또 다른 쪽에선 그렇게 편식하지 말라고 하죠.
책은 너무 방대해요.ㅠ

oren 2011-06-06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tella님의 글을 읽어보니 저는 어른이 되고 난 이후엔 문학을 너무 멀리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많이 드네요.

초등학교 시절 읍내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려 읽을 땐 온통 '문학전집류' 밖에 안 읽었었는데, 최근 들어서는 '문학 특히 소설'과는 완전히 담 쌓고 지내는 것 같아요.

고교시절만 하더라도 한국근대문학전집이나 세계문학전집류들을 곧잘 재미있게 읽었었고, 군대 다닐 때만 하더라도 노벨문학상 수상작품들을 열심히 골라 읽었던 것 같은데, 나이 들면서부터 어느새 딱딱하고 어려운 책들만 골라 읽는 이상한 독서습관으로 바뀐 저 자신을 보면서, 자꾸만 더 문학쪽으로 되돌아가서 말랑말랑한 재미들을 느끼고 싶은 욕구를 느낄 때가 한두번이 아닌데, 그게 참 쉽지가 않네요.

stella.K 2011-06-06 16:23   좋아요 0 | URL
뭘 그렇게까지...
그렇지 않아도 매번 오렌님 독서에 놀라고 있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만 파도 인생이 너무 짧다고 생각합니다.
말랑말랑 재미는 저에게 맞기시고, 오렌님 좋아하시는 책
읽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