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에 단편소설 ‘목선(木船)’으로 등단한 후 20세기가 끝날 때까지 3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줄기차게 많은 문제작을 발표한 소설가 한승원<사진>은 21세기로 넘어온 이후에도 ‘화사(花蛇)’(2001), ‘멍텅구리배’(2001), ‘물보라’(2002), ‘초의(草衣)’(2003) 등 해마다 최소한 한 권씩의 신작 장편소설을 빠짐없이 출간하는 정력을 과시해 왔다. 그 작품들은 이 작가가 지난 수십 년 동안 일관되게 지켜 왔던 문학적 밀도를 유지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환갑을 넘어선 자연인으로서의 연령에 걸맞은 보다 원숙하고 넉넉한 정신의 모습을 드러내 주었다는 점에서 예외가 없다. 이러한 최근 한승원 문학의 면모는 이번에 새로 출간된 ‘잠수 거미’에서도 변함없이 확인된다.

‘잠수 거미’는 이 작가로서는 모처럼 만에 선보이는 단편소설집이다. 장편소설과는 또 다른 단편 특유의 묘미가 이 작품집 속에 수록된 열두 편의 작품들(그중에서 ‘수방청의 소’와 ‘저 길로 가면 율산이지라우?’의 두 편은 연작)에 일관되게 나타난다. 작가는 수년 전부터 서울을 떠나 고향과 가까운 전남 장흥 율산의 바닷가 마을로 거처를 옮겼다. 이처럼 고향의 자연과 가까운 곳으로 거처를 옮긴 후 그에게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온 세상과 삶의 풍경이 단편의 규모 속에서, 그러한 규모에 어울리는 서정적이면서도 잘 짜여진 필치로 다채롭게 그려진다.

작가가 보기에 인간들의 세상은 언제나 거친 욕망의 바다이고, 인간의 삶은 그 바다 위를 헤치고 나가는 고달픈 항해이다. 그러한 사실은 작가가 서울에 있건 고향 가까운 바닷가로 내려와 있건 달라질 바 없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각에는 변화가 있다. 작가의 마음은 전보다 더 차분해지고, 부드러워졌다. 전보다 더 많은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고 해도 좋다. 전에는 주로 넘쳐나는 햇빛 아래 들끓어 오르는 대낮의 바다만을 그리던 작가가 이제는 고요한 저녁이나 밤의 바다도 좀더 자주 자신의 캔버스에 담아낸다. 그리고 작가의 시선은 어린아이들까지 포함해서 모든 연령층의 사람들을 고루 주목하지만, 그전과 굳이 비교해 본다면, 좀더 자주 노년의 사람들에게로 쏠린다. 자식들이 다 떠난 시골을 지키며 품위 있게, 혹은 품위 없게 늙어가는 노년의 사람들에게로 쏠린다. 노년의 사람들을 보는 작가의 시선은 그들 중 품위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물론이요 품위 없는 사람에 대해서도 따뜻한 사랑과 연민으로 넘친다.

‘그러나 다 그러는 것만은 아니다’라는 작품의 경우를 보자. 농현(弄絃)이라는 말이 있다. 가야금이나 거문고를 연주할 때 줄을 퉁기면서 흔드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한 농현의 효과에 의하여 비로소 연주자가 표현하고자 하는 감정의 결이나 무늬가 오롯하게 살아날 수 있다. 아무 이룬 것 없이 늙어가는 무명의 사진작가가 카메라의 렌즈를 통해 이 농현의 효과를 살려 내고자 하는 꿈을 갖는다.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그는 친구의 노모를 상대로 하여 엉뚱한 행동을 벌인다. 그 행동의 자초지종과 그것이 낳는 결과를 서술하면서 작가 한승원은 자칫하면 엽기적인 수준으로 떨어질 수도 있을 내용을 따뜻한 사랑과 연민의 마음으로 감싸서 승화시킨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특히 돋보이는 것이 노모에 의하여 구현되는 진정한 정신의 품위이다.

‘그러나 다 그러는 것만은 아니다’도 그렇지만, 이 소설집에는 작가 자신을 직접적으로 등장시키고 있는 작품들이 여럿 있다. 특히 작가가 율산으로 거주지를 옮기게 된 과정을 구체적으로 서술해 나간 ‘길을 가다 보면 개도 만나고’ 같은 작품은, 물론 어느 정도의 허구도 당연히 섞여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작가의 육성을 그대로 들려주는 진솔한 고백에 가까운 느낌을 준다. 이런 작품들을 읽으면서 한승원이라는 사람의 생생한 참모습을 만나고, 그 인간적인 모습을 ‘작가 한승원’의 예술세계와 겹쳐서 놓아 보는 것도 뜻깊은 독서가 될 법하다. 이동하·서울시립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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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4-23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들 한동림이 얼마전에 <유령>이라는 첫 소설집을 냈었잖아요. 이제 아버지도 신간을 냈고, 딸 한강의 신작 소식만 기다리면 되려나? ^^

stella.K 2004-04-23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이 작가란 말을 들었는데, 아들까지...정말 작가집안이로군요.
전 역시 이 사람이 환상적 에로티시즘이 참 인상적인 것 같아요. 어떻게 에로시티즘을 그렇게도 잘 표현할 수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