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초등학교 2학년 때가 생각이 납니다.  

학생들을 꼭 키 순서로 앉히는 건 아닐텐데, 그 때 저는 초등 2년 생 치고 작은 키가 아니어서 한때 맨 뒤에 앉은 적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감히 언감생심이죠.  저는 그때 이후로 점점 앞으로 앞으로만 앉게 되었으니까요. 그래도 학창시절 키 작다고 맨 앞에 앉아 본적은 없으니 그나마 다행일까? 

아무튼 그 시절 맨뒤에 앉아 공부를 했는데, 어느 날,  여느 때와 상관없이 아침에 등교를 했는데 제 책상위에 대접으로 한 대접쯤 되었을 거품이 잔뜩낀 끊긴 국수가락도 보이는 흰 물체가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얼마나 놀라고, 누군지 장난을 쳐도 이렇게 칠 수 있을까? 어린 마음에 적잖이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렇다고 내성적인 성격에 드러내놓고 호들갑 떨지도 못하겠고,  주변의 장난꾸러기 남자아이들은 동정 보다는, 네가 뭘 잘못했길래 이런 일을 당하느냐는 듯 저를 놀려대기에 바빴습니다. 사실은 그게 더 당한 입장에선 상처받을 수 있다는 걸 그 아이들은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네 책상 이니까 빨리 치우라며 과연 그것을 제가 어떻게 치우나 보고 싶어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무슨 오기였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 토사물을 치우지 않기로 했습니다. 어떤 몰지각한 놈이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그 범인을 잡을 길은 요원했지만 아무튼 그놈이 치워야 마땅한 거라며 버텼습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3학년 선배가 그랬다. 또는 5학년 선배가 그랬다. 말은 많았지만 그것 역시 확실하지는 않았습니다. 또 그렇게 안다고 한들 제가 그 선배를 찾아가, 선배가 그랬으니 치우라는 말도 못할 거면서 아무런 대책도 없이 그냥 버티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그날은 책상 위에 아무 것도 올려놓지 못하고 오로지 제 무릎 위와 책상 서랍을 의지해서 수업을 받았습니다. 선생님은 "누가 이랬어?" 한마디만 하셨고, 그렇게 놀려대던 아이들도 차츰 관심을 끄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채로 2교신가? 3교시가 지나갔습니다. 지금이야 2, 3교시 금방 지나가는 것 같아도 어린 아이가 그 시각까지 버틴다는 건 거의 하루종일을 버티는 것과 다를바 없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한참이 흐르자 어느 하얗고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 아이가, 저 보기가 딱했던지 웃는 얼굴로 아무렇지도 않은 듯 걸레를 가져다 그 토사물을 깨끗히 치워주는 것이었습니다.  편하게 공부하라면서.그 아이는 나와는 그다지 친하지도 않았고, 그 이후에도 친해질 기회가 없어 그냥 덤덤하게 지냈을 뿐인데, 그날 딱 하루 그렇게 나에게 천사가 되어주었습니다. 저는 그때 어린 마음에도 그 친구가 어찌나 고맙고, 미안했던지 꼭 누군가 치워주길 바랐던 것도 아닌데 거의 충격에 가까운 감동을 먹었습니다. 세상엔 이런 아이도 있구나, 하면서.  

제가 또 유치원이라도 좋은데 나왔으면 그럴 때 어떻게 행동을 해야할지 행동요령을 알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시절 유치원에 다녔던 아이가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저 역시 초등학교가 처음으로 사회성을 길렀던 곳인데 그 어린 나이에 사회성의 사자라도 제대로 알았겠습니까? 아마 그런 경험이 없었더라면 저는 평생 학교는 갈만한 곳이 못 된다고 생각하고, 어느 산 속에 암자 하나 지어놓고 살았을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왜 드리냐면, 어제 오늘 그 옛날과 비슷한 일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제 저 <성균관 유생의 나날>을 빌려주거나 그냥 넘겨달라는 페이퍼를 올렸었는데, 아무도 이것에 만족할만한 결과가 없어 섭섭해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빌려주겠다는 알라디너가 나와 저의 민망함을 덮어주길 기대했지만 결국 안 되나 보다 마음을 접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h님께서 저 책을 보내주셨습니다. 제가 그 전에 사이판의 친구 예를들어 아쉬운 마음을 피력했었는데, 그런 제가 불쌍해 보이셨는지 중고책도 있는데 굳이 새책으로 보내 주셔서 다시 한번 새롭게 민망해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 책이 저에겐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모르겠습니다. h님께서는 오히려 미안했는지 제가 읽고 나중에 자신에게 적선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선물 받은 걸 그 선물한 분께 다시 적선하는 하는 법은 없는 법. 그것만큼 결례가 어디 있겠습니까? 단, 이 책을 다 읽고 제가 리뷰를 쓸터이니, 제 리뷰를 읽으시고 h님도 저와 같이 읽고 싶으시다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ㅎ 

또 한 가지 놀라운 일은, 제가 그렇게 사이판의 도서실을 운영하고 있는 친구의 얘기를  했을 때 ㅂ님께서 그 친구에게 보내달라며 책을 7권이나 쾌척해 주셨습니다. 

 

 

 

 

그것도 ㅂ님께서 가지고 있는 책은 상태가 좋지 않다며 굳이 새책으로 신청해서 보내주신 것입니다. 사실 고백하자면, 저는 그 친구에게 새책 같이 상태가 좋은 책을 보내 준적은 있어도 일부러 새책을 사서 보내 준 적은 아직 한번도 없습니다. 이 사실을 그 친구가 알면 얼마나 좋아할까요?   

정말 이 세상엔 천사의 마음을 지닌 사람이 있는가 봅니다. 그 어린 날 내가 만났던 웃는 얼굴로 토사물을 치워줬던 친구처럼 말입니다. 저는 그 시간 이후로 책상에 책과 공책을 올려놓고 공부한다는 게 이토록이나 편하고 좋은 것인지를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솔직히 그전까지 무릎위에 올려놓고 공부하느라 목이 엄청 아팠거든요.  

갑자기 그 친구가 보고 싶어졌습니다. 변변히 고맙다는 말도 못한 하얀 얼굴의 그 친구가. 이름도 기억이 안 나고, 이목구비도 기억이 없어 길에서 스쳐지나도 모를 것입니다. 그런 친구가 있었기에 저도 인생 살면서 잠시잠깐 아주 사소한 친절이라도 베풀 생각을 하고 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저 귀한 책들을 보내주신 두 분을 생각하면서, 나도 누군가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야겠다고 배우게 되는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이 지면을 빌어 고맙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또한, 함께 걱정해 주시고, 응원해 주셨던 댓글 달아주신 분들께 고마운 말씀과 죄송하다는 말씀을 함께 전하고 싶습니다. 제가 아쉬운 마음에 저만 생각하는 옹졸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또 어디선가 누구에게 친절을 베풀며 사실텐데 그것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자, 이제 저는 h님께 약속 드린 바도 있으니 이 책을 읽기 위해 알라딘을 잠시 떠나있겠습니다. 남은 시간도 좋은 시간 되시기 바라겠습니다.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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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0-10-03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 아래글부터 주욱~ 읽고서야 이해가 됐어요.
일비일희하고 절망과 희망의 곡선을 타는게 우리네 인생이지요. 뭐~ ^^

stella.K 2010-10-03 16:48   좋아요 0 | URL
ㅎㅎ 그렇죠?
언니는 정말 호호 아줌마 같으세요. 아, 그렇다고 오해하진 말아주세요.
좋은 뜻이라는 거 언니도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순오기 2010-10-04 00:43   좋아요 0 | URL
호호아줌마~ 잘 알지요. 우리 큰아이 어려서 늘 보던 프로였어요.
호호아줌마처럼 살 수 있다면 멋진 인생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