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산다는 것은 - 존재의 안부를 묻는 일곱 가지 방법
박범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작가 이기호는 이 책의 저자인 박범신 선생을 두고 모더니스트라고 했단다. 그러자 선생은 아니라고 부인하면서, 자신은 리얼리스트라고 했단다.(191p) 글쎄, 선생께서 당신 자신을 가리켜 리얼리스트라고 한 것은 이해가 가는데, 이기호 씨는 어떤 의미에서 모더니스트라고 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말하건데 그는 휴머니스트, 즉 인본주의자다.
사실 나는 선생께서 내신 <은교>라는 소설을 읽고 감동을 했고, 어디서건, 누구를 만나건 <은교>얘기를 했었다. 하도 많이 떠들고 다녀서 사람들은 아마도 내가 박범신 선생을 잘 알아서 그런가 보다, 오해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난 선생의 작품은 그것이 처음이고, 왜 이제사 선생을 알아 본 건지 새삼 송구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내가 왜 그토록 작가에 대해서 열광하는 정도가 되었는가 하면, 선생처럼 인간을 깊이 이해하는 작가가 흔치 않아서다. 특히 인간을 이해함에 있어서 오욕칠정(五慾七情)을 이만큼이나 명징하게 그릴 수 있는 작가가 얼마나 되겠는가?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정말 전기에 감전된듯 했다.
그것이 왜 그토록 다가왔냐면, 사실 이것들은 쉽게 까서 보여줄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다섯 가지 욕구와 일곱 가지 정(喜怒哀樂愛惡慾)은 여러가지 사회적 관습에 갇혀 그것이 뭔지도 모른 체 살아가는 사람이 대부분이고, 설혹 안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도 모른 체 그것의 노예가 돼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루에도 몇 번씩 교차하는 이 감정들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고 다스릴 수만 있다면 우린 그것들에 매이지 않고 보다 자유롭게 살아가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진정한 인간해방이 이루어지는 것이겠지.
사실 내가 <은교>에 대해서 열광했던 또 다른 이유가 하나가 더 있는데, 나는 그 작품을 통해 문학이 나가야할 바를 보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문학의 정의는 사람마다 다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미 이것을 이루어 놓은 이론가, 작가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내가 본 건, 이 오욕칠정을 그림으로써 진정한 인간 해방의 길은 무엇인가를 묻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선생의 작품 속에 투영하고자 했던 건, 산업화 또는 경쟁 사회속에 인간의 가치가 함몰되어져 가고 있는 것을 설파하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이 산문집에 그것에 대한 사유가 고스란히 들어나고 있다.
이 산문집은 그렇게 오욕칠정을 따서 7장의 구성으로 되어있는데 그의 부제는 '존재의 안부를 묻는 법'에 관해서다. 그러므로 어찌보면 딱히 인간의 일곱 가지 감정을 굳이 설명하려 했던 건 아닌듯 하다. 그보단 에세이가 그렇듯, 저자가 사유한 것들을 자유롭게 풀어 가고자 오욕칠정의 구성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사실 오욕칠정이란 본질에 대한 연구는 심리학자나 철학자가 해도 충분한 것이 아니겠는가? 작가는 그것들을 통찰하고 눈으로 보듯이 증명해 보여줘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 책은 주로 글쓰기에 대한 생각들, 삶에 대한 생각들을 미사여구 없이 직설적으로 표현해 주고 있어 매력적이란 느낌까지 들게 만든다. 하지만, 선생은 책에서 때로 삶의 신산함에 대해 말하기도 하고, 글쓰기에 대한 애증을 노래하기도 한다. 하긴, 삶은 살면 살수록 느긋하고, 여유롭고, 통찰 가능한 것 같아도 또 한편으론, 매우 피곤하고, 권태로우며, 허탈한 느낌을 갖게도 한다. 삶은 그런 것이다. 또 글쓰기는 어떤가? 글쎄, 선생만큼 치열하게 글을 써 보지 않아 뭐라 말하기 어렵지만 왜 선생이 이 책에서 그렇게 쓰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한마디로, 자신을 있게 만드는 원동력이 동시에 절망이고, 희망이었을 것이다. 선생이 얼마나 글쓰기를 사모하냐면, "내 안에 늙지 않는 괴물이 산다."고 했다. 오죽했으면, 글을 안 쓰고 있으면 그것이 자신을 삼켜 버릴 것 같아 그것에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서 글을 쓴다고 했을까? 그 글을 읽었을 때 나는, 선생은 글쓰기를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셨구나했다. 모르긴 해도 이 괴물에 진다면 그땐 이미 선생은 늙은 것이며, 어쩌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될지도 모르겠단 강한 암시를 받기도 했다. 그래서 '청년 작가'란 수식어가 붙는 것이기도 하고.
하지만 선생은 책에서 공히 말했거니와, 당신은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세 가지는 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첫째, '아버지'가 되지 않을 것이고, 둘째, '작가'가 되지 않을 것이며, 셋째, 남편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142~146p) 난 그 말에 충분히 공감한다. 남자로 태어나 한 가정의 가장이 되고, 아버지로써 살아 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나는 여자지만 나이가 먹으면 먹을수록 오래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절실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니 선생도 얼마나 힘드셨을까? 독자인 나는 어느새 딸의 심정이 되어서 선생의 마음을 헤아라게 되었다. 하지만 어찌하랴? 또 그것이 인간의 길인 것을. 그러므로 필시 선생은 인간으로 태어난다면 성(性)만 바꿔서 어머니로 살게 될지도 모른다.
어디 그뿐인가? 작가로 살기는(특히 우리나라에서) 얼마나 어려운가? 하지만 선생은 다시 태어나면 뭐가 되고 싶은지 밝혀놓지 않으셨다. 나라면,(주제 넘게도 내가 정말 작가로 살다가 다시 태어난다면) 나는 음악가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것도 클래식 연주가. 물론 그렇게 되기도 쉽지는 않지만 작가만 할까? 작가의 창작은 정말 고통스럽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나 다를바 없는, 맨땅에 헤딩하는 직업이다. 물론 경력은 쌓이겠지만 작가의 작업은 매번 새로운 것이어야 한다. 얼마나 피곤한가? 오죽했으면 가장 일찍 죽는 직업군 속에 작가가 들어가 있으려고? 하지만 클래식은 새로운 해석이다. 그 해석도 물론 쉽지 않지만 일정한 틀과 질서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니 견딜만한 직업이 아닐까? 그것이 무엇이건 너무 좋아서 다음 생에도 똑 같은 직업을 갖겟다고 한다면 그건 벌써 거짓말을 하는 것일게다.
아무튼 선생의 글은 소박하다. 그리고 그 속에 가감없는 진실과 속 깊은 사유가 들어있어 좋다! 마치 소주는 내 입엔 여전히 쓴 술이긴 한데 소주가 맛있어지면 인생을 아는 것이라고도 하지 않던가? 그때 캬~!란 소리가 절로 나오는 것처럼, 선생의 글은 쓴데 캬~!란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읽고나면 허기진 배를 든든한 무엇으로 채운 느낌이고 위로 받는 느낌이다. 가까이 두고 힘들 때나 무료할 때 아무대나 펴서 읽으면 위로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이미 말했지만, 존재의 안부를 묻는다잖나? 작가 박범신의 안부의 인사를 한 번 받아 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