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윤필 기자의 <어느 날 나는 바깥으로 들어갔다>란 책을 읽고 있다. 거기 보면, '잘 가게 40원어치 폐지로 남은 인연들-절판되는 책'이란 쳅터가 있는데, 읽다보면 책도 사람의 일생만큼이나 초라하고 서글프다는 생각이 든다.
화려한 헌사를 휘장처럼 두르고 세상에 등장했을 책도, 교과 과정에 뒤쳐진 학습참고서도(144p)도 일단 폐지가 될 운명이라면 그 안에서는 대등하다는 걸 나는 생각해 보지 못했다. 학습 참고서의 운명이야 그럴 수 있다 쳐도, 잘난 책은 그렇게 영원히 잘난 체하고 있을 줄만 알았다.
경기도 파주시 백석리라는 곳에 가면 책 파쇄공장이 있다고 한다. 거기에 쌓아 놓은 파쇄를 기다리는 책들을 두고 작가는 참 처절한 표현을 썼다.
오래 손을 탄 책들에서 느껴지는 포슬포슬한 정겨움 대신, 단 한 번도 펼쳐진 적이 없는 새 책들은 으레 정결한 위엄을 지닌다. ......아마도 그 책들은 책공장에서 출판사 창고로 옮겨진 뒤 해마다 조금씩 후미진 곳으로 밀려나다 결국 이곳, 책의 도살장으로 보내졌을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정결했으나 그들이 지닌 위엄은 권력을 찬탈당한 어린 임금의 눈빛처럼 애잔했다.(145p)
마치 엄마의 몸에서 낙태당하는 모양새라고나할까? 그런 운명이라면 몸을 던지듯 뛰어들어 이것들을 끌어 안고 나오지 않을까? 거기에 혹시 내가 찾는 또는 내가 읽을 만한 책이 들어있다면 어찌할 것인가? '권력을 찬탈당한 어린 임금의 눈빛이라니...흑.
작가는 그 파쇄공장에서 차로 40분 남짓 떨어진 곳의 어느 출판사를 방문해 거기서 책 한권을 발견한다. 작가가 10년전쯤에 읽었다던 일본 소설 <시귀(屍鬼)>.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오싹한 이야기일 듯하다. 외전 산골마을의 몽환적 분위기와 애잔한 결말이 감동적이어서 가지고 있다던 소설.
역시나 조회를 해 봤더니 절판으로 나온다. 책소개를 좀 더 살펴보면, 선과 악의 대립 및 반전에서 벗어나 기독교적인 정조와는 달리 동양적 정조를 풍기는 일본의 공포소설. 공동체 의식의 해체 과정에서 파생되는 갈등과 반목, 정당화되는 집단의 폭력성과 강요받는 개인의 정체성 문제, 나아가 인간의 편협된 시각이 아닌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저자의 구체적 관점이 자유롭게 드러나는 소설이다.
토장 풍습이 남아 있는 작은 마을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갑자기 불어닥친 재앙과 그 속에서 펼쳐지는 숨막히는 상황 전개, 인간에 대한 고민 등이 전개된다. '시귀'는 인간이 아니면서 인간과 같은 존재. 이 소설은 인간이 동물을 사냥하듯 시귀는 살아남기 위해 사람을 습격할 수 밖에 없다는 관점에서 시작한다.
결국 시귀는 인간의 삶에 대한 끝없는 욕망과 갈등을 대변한다. 과학, 철학, 종교 등 다양한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뒤얽힌 호러작품.이라고 나온다.
이렇게 절판이 됐다고 하면 괜히 사 보고 싶은 건 또 뭐냐? 그나마 만화책은 계속 나오고 있는가 보다.
보통 출판 계약이 5년을 단위로 맺어진다고 하는데, 판권 계약이 만료가 되었고 최근 임원회의에서 재계약을 안하기로 했단다. 안타까운 일이다. 혹시 어느 독자의 노력으로 살리는 방법은 없을까? 이런 것도 서명운동 같은 거 하면 안 되는 건가? 이책을 찾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물론 아직 헌책방 같은데 가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단 절판된 책이라도 찾는 독자가 있으면 소규모라도 다시 찍어 낼 수 있는 뭐 그런 (법적으로도 깨끗한) 시스템이 없어 아쉽다. 적어도 절판될거란 소식만 입수해도 개떼같이 달라붙지 않았을까? 어떻게 소리 소문없이 절판될 수 있단 말인가?
또한, 아직도 분서 박해가 있는가 보다. 그건 80년대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때는 주로 이념 서적이었겠지만 오늘 날엔 그것 가지고 분서하지는 않는가 보다. 세상 많이 좋아졌달까? 하지만 지배 이념, 풍속 보호라는 명분하에 판매를 금지하는 행위는 여전하다고 한다. 그중 대표적인 예가 고도 출판사의 사드가 쓴 <소돔 120일>!
이책은 나도 들어서 알고 있는 책이다.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을테니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다. 이책의 저자 사드 자신의 '패덕의 유형학'이라고 했다니 더 말해 뭐하랴? 더구나 번역자 조차도 자기 이름을 싣지 말아달라고 부탁할 정도였단다.
하지만 이책은 출판되자마자 판금이 되었고, 그래도 살 사람은 사고, 읽을 사람은 읽는다. 읽어 본 사람의 서평에 의하면 "이성의 세기에 합리주의를 전복시킨 문제작"이라고 했다나 뭐라나.
이책은 당시 8000부를 찍었고, 회수되기 전 짧은 유통기에 얼마간 팔렸고, 회수 과정에서 또 얼마간 유출됐을 것이라고 한다. 지금은 인터넷 중고서점에서 10만원을 호가한다고 하는데, 제일 비싼 게 그렇고, 아직 알라딘 중고샵에선 6만5천원에서 9만원을 상회하는 것으로 나오고 있다. 얼마전 법정 스님의 <무소유>와 묘한 대조이긴 하다.
저자는 18세기 저작인 만큼 저작권은 없을테고, 번역만 새로해서 다시 살려 볼 계획이 없냐고 고도 관계자에게 물으니 그는, 그 책 판금시킨 게 국민의 정분데 현 정부가 그때보다 더 진보적이라고 보느냐고 반문을 하더란다.
그러고 보면 참 책의 운명도 왕권을 지켜내기 위한 운명 만큼이나 어렵고 힘든가 보다. 그러니까 작가가 그런 말을하지.
아, 근데 잊을뻔 했다. 어쨌거나 책 한 권의 무게는 450그램 정도 된다고 한다. 코팅되서 재활용이 힘든 부위를 뜯어내면 300그램쯤 남는데, 요즘 패지 단가가 120원 정도니까 책 한 권 값이 40원쯤 된다고 한단다. 그래서 제목이 잘 가게 40원어치 폐지로 남은 인연들 인 것이다. 아, 슬픈 책의 운명이여.
이런 걸 알면 정말 책을 아껴줘야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어떻게 해야 아껴주는 건지 잘 모르겠다. 책 만드느라 우리가 베어 냈던 나무는 또 얼마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