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카락 마담의 숙소 - 할머니의 우아한 세계 여행, 그 뒷이야기
윤득한 지음, 츠치다 마키 옮김 / 평사리 / 202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개인적으로 여행은 나와는 별로 인연이 없다고 생각한다. 어렸을 때부터 집 떠나면 개고생이란 말을 거의 신봉하며 살았고, 나이 들어선 기회도 없거니와(기회는 만들어야 한다고 하더만) 관절이 좋은 편도 아니어서 걷는 게 자신이 없다.(이렇게 쓰고 보니 내가 파파 할머닌 줄 알겠다. 그 정도는 아니고.) 그래도 내 인생 가장 젊은 시절에 사람들과 어울려 몇 군데 다녀봤다는 게 그나마 위로가 된다. 그것조차도 없었다면 쓸쓸해서 어찌할 뻔했나. 이런 내가 여행 에세이라고 좋아할 리 없다. 다 염장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당장 떠날 수 없는데 무슨 대리만족인가. 부러우면 지는 거라고 읽어야 할 책은 차고 넘친다 그런 거에 마음 둘 세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내가 이 책을 읽었다. 단순한 여행 에세이가 아니다. 저자의 나이가 구순이다. 해방을 거친 세대라는 게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내가 좀 개화기, 구한말 이런 쪽에 관심이 많아서. 말하자면 그 시대 신여성이라는 것만으로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특이한 건 저자가 분명 한국 사람임에도 일본어로 쓰고, 번역을 일본 사람이 했다. 왜 그런가 했더니, 저자가 젊을 때 남편 따라 일본에 정착했다. 그리고 지금도 70년 가까이 일본에 산다. 해방 전에도 국어 말살 정책으로 한국말을 쓰지 못하게 했으니 한국어와는 별로 인연이 없어 보인다. 그 점은 저자도 언감생심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이 책은 여행 에세이라고는 하지만 어찌 보면 간략하고 담백하게 쓴 저자의 자서전 같기도 하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게 있다.


저자가 한마디로 당차다. 남편이 재일교포로 사업가로 결혼 초기엔 나름 떵떵거리며 잘 살았다. 하지만 곧 남편의 사업이 망하고 만다. 그땐 이해심이 많은 남편 덕에 미국의 시카고 대학 영화학과에 입학 허가까지 받아놓은 상태였다. 남편의 사업이 망했으니 호구지책으로 단추 디자인 일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의외로 잘 돼 삶의 기반을 다지고 슬하의 자제들도 명망 있는 학자로 키워냈다.


저자는 여행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뭐든 마음먹은 건 해내고야 마는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그도 그럴 것이 2012년 우연히 TV에 안토니오 가우디가 설계한 성 가족 성당(사르라다 파밀리아)에서 미사 드리는 모습을 보게 된다. 알다시피 그 성당은 아직도 건설 중에 있다. 그해 일부가 완성되어 미사를 드렸던 것이다. 보는 순간 저기를 가야겠다고 마음먹는다. 무려 여든셋의 나이에 말이다. 더구나 일본인 며느리가 저길 가야 되지 않겠냐고 부추기기도 했다. 저자는 무턱대고 성당이 있는 바르셀로나로 간다.


하지만 보는 것과 다르게 그때 드려졌던 미사는 그냥 성당 내부의 완성을 축하하는 특별 미사며 헌당식까지는 아직도 멀었다는 말을 듣는다. 순간 왜 주일 날 미사를 드리지 않느냐며 실망에 겨워 항의 아닌 항의를 하자 그곳 관계자도 좀 미안했던지 마침 주일 날 서품식 미사가 있는데 거긴 서품자와 직계 가족만 참석할 수 있다고 한다. 이 하나마나 한 얘기는 저자의 가슴에 활활불을 더 지핀다. 여기까지 와서 그냥 발길을 돌릴 수는 없다. 그런데 정말 궁하면 통하는 걸까. 마침 서품자의 직계 가족 한 사람이 자신은 사정이 있어 참석할 수 없으니 대신 참석하라고 한다. 여기서 교훈은 역시 되든 안 되든 질러는 봐야 한다는 거다.


나 같으면 어떻게 했을까. 말도 잘 안 통하니 일찌감치 포기하고, 기왕 왔으니 성당 앞에서 기념사진이나 찍고 주변이나 돌아보고 갔겟지.더구나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남에게 아쉬운 잘 못하고 사정하는 게 익숙한 체질도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일부러라도 질러보면 의외의 길이 열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럴 것이다 미리부터 예단하고 가둘 필요가 없는 것이다. 저자가 서품식 미사에 참여할 확률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훨씬 낫은 확률이다. 0.00001% 확률도 안 된다. 하지만 이건 모세가 홍해를 가르는 기적과 같은 것이다. 미리부터 포기할 일이 아니다.


저자가 얼마나 당차냐면, 1965년 나이 서른여섯에, 평소 일본에 살면서 일본에 한국의 좋은 점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단다. 그해 한일협정으로 두 나라의 교류가 활발해질 거라고 생각하고, 그 유명한 도쿄 미쓰코시 백화점 6층 전층에 한국관을 한시적으로 열어 한국 문화의 우수성을 알려야겠다고 마음먹는다. 당시 전층을 빌린다는 건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또 그런 만큼 언젠가 우리나라에 와서도 비슷한 전시를 했었는데, 그때 우리는 일본에 대한 인식이 안 좋은 때라 (지금도 좋은 건 아니지만) 우리가 뭐 그런 쪽바리의 문화까지 알아야 하느냐고 소극적이었단다. 그랬을 때 저자는 물러서지 않고 역사적으로 우리나라 도공들이 일본에 가서 기술을 전수한 걸 생각해 보라며 일침을 가했단다. 대단하지 않는가.


사실 그런 저자가 누구냐면, 고 육영수 여사의 영어 교사로 한때 의자매처럼 지내기도 했다. 이만하면 인생 견적 나오지 않는가. 대대로 이어 온 소위 빼대있는 양반 가문의 여식이다. 저자의 어머니 또한 예사 분이 아니다. 분명 뼈대 있는 가문의 여식으로 자라지만 아버지가 가난한 양반 가문의 집으로 시집을 보낸다. 결혼생활이 행복하지 못했고 남편의 무능함에 죽을 결심을 하지만 그즈음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고 자식의 교육과 남에게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삶을 살게 된다. 저자나 저자의 어머니나 퀄리티가 남다르다 싶다.


이 책은 여행 에세이라고는 하지만 시차의 구애받음이 없이 자유롭게 썼다. 그럼에도 뭔가의 삶의 궤적이 느껴진다. 아무리 가볍게 말해도 참 교양인다운 삶이 느껴진다. 더구나 저자는 여행을 마칠 때마다 일본의 짧은 시 '하이쿠'를 남긴다. 예를 들면 1971년 저자의 나이 마흔둘에 프랑스를 여행하면서 굴을 먹고 이런 하이쿠를 읊는다.

   얼음덩이리

   부딪치며

  굴을 먹었네

  달팽이 가득

  담겨 서늘한

  은쟁반


또 앞서 미사 한 번 드리겠다고 스페인 바르셀로나를 여행하고 가우디의 삶을 소개하고는,

  가우디의 꿈

 그대로 이루어진

  성당의 바람

  가을 날 햇빛

  가우디의 기도가

  이 미사에


몇 년전 이사카와 다쿠보쿠의 손바닥만 한 크기의 책 <한 줌의 모래>란 단카집을 읽은 적이 있다. (단카는 우리나라 시조 같은 것으로 하이쿠와 형식이나 분위기가 비슷하다 .) 좋긴 하지만 별 감흥이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확실한 상황과 분위기를 알고 읽으니 뭔가의 감흥이 전해져 오는 것 같다.


그렇다면 저자는 어떻게 하이쿠를 알게 되었을까. 그건 마쓰오 바쇼(1644~1694에도 막부 전기의 시인이다. 아명은 긴사쿠(金作). 홋쿠라 불린 하이쿠의 명인.)를 좋아해서 하이쿠를 시작했다고 한다. 하이쿠의 주요한 특징은 열일곱 자의 엄격한 전형의 틀에 시적 긴장감을 최대한 이끌어 내는 것이다. 저자는 하이쿠 선생을 직접 찾아가 배웠다고 한다. 그건 머리가 좋거나 문학적 감각이 뛰어나지 않으면 접근이 쉽지 않다고 한다. 그때그때 사물을 관찰하는 센스가 있어야 하고, 공감 능력도 뛰어나야 한다. 무엇보다 하이쿠는 요즘으로 치면 스마트폰 카메라고 순간을 찍어두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고.


그러면서 일본의 소화의 정서를 소개하기도 한다. 하이쿠가 소화 시대 때 꽃을 피웠으니. 저자는 소화의 정서를 대표하는 것으로는 다도와 이케바나라는 일본식 꽃꽂이와 토키와즈란 일본 전통음악 등을 빼놓지 않고 소개하기도 한다. 특히 다도 하면 센노 리큐(1522~1591)를 빼놓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난 이 책에서 그를 발견하고 좀 반가웠다. 오래 전, <리큐에게 물어라>(문학동네)라는 그의 전기소설을 읽은 적이 있는데 얼마나 좋던지. 이 책 읽어봤다는 사람을 만나기 쉽지 않았는데 말이다. 저자는 그렇게 다도를 접하면서 우리나라 도자기의 우수성을 알릴 수 있는 것을 큰 기쁨으로 여겼다. 알겠지만 신라시대 때부터 우리나라 도공들이 대거 일본으로 끌려가 도자기 문화를 꽃피우지 않았던가.


우리나라 사람들 한국말 못 하는 경계인들을 은근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저자는 한국말을 잘 못했다 뿐이지 알고 보면 우리 보다 더한 (찐)한국인이다. 외국 나가살면 다 애국자가 된다고 하지 않던가.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깨닫는 건 요즘 일본과 우리나라가 정치적으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지 않은가. 역시 양국 간의 문제는 문화교류가 아니면 방법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읽으니 나는 저자보다는 아직도 젊은데 생각은 젊지 못하구나 싶다. 여행도 여행이지만 저자의 그 꺾기지 않는 의기와 호기심에 경이와 존경을 표하고 싶어졌다. 물론 난 저자같이 살 수는 없을 것이다. 평범하게 태어나 평범하게 살고 있고 저자만큼 여행을 다닐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술과 문화에 대한 호기심과 사랑하는 마음은 늙어서도 언제나 간직하고 싶다. 


사실 이 책은 작년에 마지막으로 읽은 책이다. 어찌 보면 세밑이라 여러 가지로 마음이 싱숭생숭할 수 있었는데 읽을 수 있게 돼서 얼마나 다행인지. 읽는 내내 즐거웠다. 나는 이 책으로 모토가 생겼다. 그건 '늙어도 우아하게'다. 잘 살고 잘 늙어 가야겠다.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레이야 2022-01-06 21: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세밑에 딱 좋은 책 읽으셨네요 ^^
저도 읽고 싶어져 담아갑니다.
윤득한 처음 들어본 이름인데 내공이 상당한 분인 것 같아요. 제목만으로는 어떤 책일지 전혀 가늠이 안 되는데 스텔라 님 리뷰로 완전 궁금해졌습니다.
예술과 문화에 대한 호기심과 사랑을 놓지 말고 우아하고 팔팔하게 나이들어갑시다요. 수시로 전시도 챙겨 보고 여행도 가고. 센노 리큐는 들어 보았는데 리큐에게물어라,가 있군요. 그것도 찜요.

stella.K 2022-01-06 22:05   좋아요 2 | URL
그러니까요. 제목이 좀... 근데 내용은 정말 좋아요. 담백하고 군더더기 없고. 편하게 읽혀요. 개화기 어머니나 저자나 양반가문에서 자랐다는데 그래도 그닥 행복했던 건 아닌 걸 보면 참 짠해요. 여자가 행복해야 진짜 좋은 나라라는데 이견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나마 신앙이 버팀목이었다는게...😥

기억의집 2022-01-06 22:3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우와 이분 대단하시네요. 나이 아흔에.. 게다가 적극적이시네요. 한국문화를 알리겠다고 홍보도 적극적이고.. 츠치다 마키는 한국어 전공 일본인인가요??? 오사카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유튭 있는데.. 거기 마츠다 부장이 한국어를 엄청 잘해요. 한일 혼혈인데.. 처음에는 아버지가 일본인이라 일본 국적인데 한국에서 살았던 적이 있어서 오랜 세월 일본 살면서도 한국인같더라고요. 할머니 소개들 읽으니 마츠다부장 생각나네요!!

stella.K 2022-01-07 10:03   좋아요 1 | URL
뒤에 보면 저자가 역자를 어떻게 만났는지도 나와요. 아마 기억님이 알고 있는 게 맞을 거예요. 요즘엔 뒤돌아서면 기억이 흐릿해져서 말이죠.ㅠ 전 힘들어서 이분처럼은 못 살것 같고 이분의 정신은 참 존경할만한 것 같아요.🤩

기억의집 2022-01-07 10:11   좋아요 2 | URL
ㅎㅎ 번역가 모르는데.. 저자은 한국인인데 한국어를 못 하고 번역가 보니 일본인이라… 특이하네 생각했어요!!!

mini74 2022-01-06 22: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표지 그림처럼 작가님 저런 멋진 패션으로 다니셨을 듯 해요 당차고 나이따윈을 시전하는 추진력에 감탄하고 갑니다. ~

stella.K 2022-01-07 10:14   좋아요 2 | URL
그 시대에 미국 유학까지 갈 생각을 했다면 뭐. 사실 공부 때문에 결혼도 안하려고 했는데 남편이 공부하게 해주겠다고 해서 결혼한 거라더군요. 남편도 그 약속을 지키려했는데 그만ᆢ 교포로 사업가였다면 그 남편도 대단한 집이었을 것 같다능. 👍

초란공 2022-01-06 23:3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여든 셋에 마음먹은 걸 하는 분이라니요!!! 제가 가장 부러워하는 성격을 가지신 분 같습니다. 몸이 가벼운 분들이요. 여행 좋아하는 아내에게 보여주어서는 안되는 책이군요. ㅋㅋ 저는 집돌이...게다가 무슨 일을 하려고 생각하면 부채도사가 됩니다. 이걸 할수 있을까? 할까 말어? ㅜㅜ

stella.K 2022-01-07 10:16   좋아요 2 | URL
그니까요. 저는 관절이 안 좋아 어디 잘 못 다니는데.ㅋ
아내님껜 보여주지 마시고 몰래 숨어 읽으세요.😅

페크pek0501 2022-01-10 19: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자가 정신만은 전혀 늙지 않는 멋쟁이 분이시네요. 게다가 용기도 대단하시고요.
여행을 많이 다니면 좋긴 할 거예요. 그런데 점점 집 떠나기가 싫으니 문제예요.
여행 좋아하는 이들은 여행을 위해 계도 하고 그러더라고요.
중요한 건 대범해지고 그리고 용기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죠. 나이들수록 저는 소심해져가는 것 같아요. 안전제일주의자가 되어 버리고 모험을 즐길 줄 모르게 되어요.
저자 같은 분이 멋지게 사는 것 같다고 느끼면서도 말이죠. ^^

stella.K 2022-01-10 19:23   좋아요 1 | URL
그러게 말이어요. 저는 다리가 안 좋아서 어디 다니는 게 자신이 없더라구요.
지난 가을에 가족 여행 간 것도 언니가 차 렌트한다고 해서
간 거거든요. 막상 떠나면 좋은데 떠나기까지의 과정이 좀 그렇죠?ㅎ
하도 안 가니까 그때는 뒤도 안 돌아보고 가게 되더라구요.
근데 생각해 보면 힘이 없어 못 가는 것 보다 돈이 없으면 못 가겠구나
싶은 생각이 더 많이 들더군요. 그 잘난 1박2일 갖다오는 것도
수억 깨졌어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