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https://image.aladin.co.kr/product/25852/12/coveroff/k902737368_1.jpg)
"매일 단 두시간만 머리를 쓰는 활동을 하시오.
살아 있는 한 펜이나 붓, 연필을 쥐지 마시오."p.114
요즘 누가 이런말을 한다면 듣는 사람은 이 사람이 정신이 나갔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황당한 말을 했던 사람은 다름아닌 정신과 의사였다. '누런 벽지'로 잘 알려진 작가 샬롯 퍼킨스 길먼은 산후우울증으로 고생한 적이 있는데 당시 나름 저명했던 정신과 의사 위어 미첼(Weir Mitchell)이 그녀에게 이와 같은 조언을 했다. 하긴 이런 어처구니없는 조언은 이 의사 개인의 잘못만은 아니다. 누구도 자신의 세계를 초월할 수 없다. '여성과 광기'에도 나와 있듯 당시(뿐만 아니라 그 후에도) 여성에 대해서 이런식의 태도가 사회에 만연했었고 대부분의 신경증 환자는 여성들이었으니까.(1900년대) '200년 동안의 거짓말'에도 길먼에 관한 언급이 있는데 길먼과 제인 에덤스 같은 경우는 병이 회복되어 활발하게 활동한 편이었다. 샬롯 퍼킨스 길먼이 의사의 조언을 따르지 않은 것, 그녀가 오히려 연필을 쥐고 글을 쓴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https://image.aladin.co.kr/product/11328/75/coveroff/8962914166_1.jpg)
"편두통","신경증",그리고 언급하기 곤란한 다양한 "여성적 질병"을 가지고 침실에 드러눕는 것은 받아들여질 만했고, 심지어 유행이었다. 정의 내릴 수 없는 신경성 질병"신경쇠약증"은 어떤 집단에서는 지성과 감수성의 표식으로 여겨졌다. p.164 , 200동안의 거짓말
![](https://image.aladin.co.kr/product/13881/2/coveroff/8968176124_1.jpg)
메리울스턴 크래프트와 그녀의 딸이자 '프랑켄슈타인'의 작가 메리 셸리의 소설을 담은 '메리 마리아,마틸다'를 읽으면 남편에 의해 강제로 사립 정신병원에 갇힌 여성이 등장한다. 그녀는 자기 아이를 만날 수도 없었고 자유롭게 외부로 나갈 수도 없었다. 그녀는 훗날 남편을 고발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 작품을 읽을 때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가 떠올랐었다. 거기에 등장하는 다락방의 미친 여인도 어쩌면 실제로는 미치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거다.
여인 중 그 누가 자신의 감정을 생각했는가? 경험으로 더 훌륭한 판단력을 지닌 부모와 가족이 정해준 남자를 사랑하고, 그에게 복종하는 것이 여자의 의무였다. 남편을 고발한 것에 대해서는 불분명하고, 사립 정신병원에 감금당한 것 이외에는 아무런 증거가 없었다. p.301 , 메리.마리아.마틸다
'누런 벽지'속 주인공은 남편과 함께 오래된 저택에서 3개월간 휴가를 보내게 된다. 주인공은 이 저택을 '유령의 집'으로 표현하는 등 미신적인 느낌을 받았지만 의사인 남편에게는 말하지 않는다. 현실적,상식적인 그가 이해하지 못할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머물게 된 3층에는 칙칙하고 누런 벽지가 군데군데 찢기고 해져 있었는데 주인공은 무늬에서 점차 어떤 형상을 발견하게 된다.
색깔은 역겨웠다, 거의 비위가 상할 만큼. 서서히 물들이는 햇빛으로 괴상하게 빛바랜, 그을음이 있는 불결한 누런색이었다. 군데군데 칙칙하면서도 야한 주황빛도 있고, 또 다른 부분은 역한 유황빛도 띄었다. p.21
남편에 의해 가족들에 의해 '히스테리 증상'이 있다고 판단된 주인공은 기분나쁜 누런 벽지가 둘러져 있는 방안에서 '안정'을 위해 대부분의 시간을 누워지내며 스스로에 대해서도 생각을 자제하라는 조언을 듣는다. 그녀는 남편 존의 말을 따르지만 모든 말을 사실상 다 납득하는 것은 아니다. 남편과 하녀 '제인'에게 어린아이취급당하고 감시당하면서 누런 벽지의 형상은 익숙한 모습을 갖춰나간다. 샬롯 퍼킨스 길먼은 이 작품에 자전적 경험을 담았다. 남편과 누런 벽지에 대한 묘사와 절묘하게 어우러진 고립감과 공포. 그리고 남녀의 이분법을 표현하는 각종 상징들로 여성으로써 자신의 잃어버린 주체성의 혼란을 의미심장하게 담아냈다.
벽지 안에는 나 밖에 모르는 것들이 있다. 아마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테지만. 겉에 도드라진 문양 뒤로 희미한 형체가 나날이 또렷해지고 있다는 사실. 늘 똑같은 형체인데, 수가 점점 늘어난다. p.53
'제인에어' 속 다락방의 미친여자는 미치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은 '여성과 광기'를 읽으며 더 분명해졌었는데 이번에 '누런 벽지'를 읽으니 아마도 그런 암시를 주는 듯한 몇몇 장치들이 좀 더 분명하게 보였다. 작품해설에도 나오지만 길먼은 제인에어의 그런 측면을 염두해 두고 그 입장에서 쓴 것일 수도 있다. 작은 의문을 소재삼아 또 다른 시각에서 이런 소설을 창작한 거라면 정말 놀랍지 않은가! 길먼은 여성을 광기로 몰아가는 상황에서도 오히려 글쓰기를 통해 상황을 이겨냈을 뿐만 아니라 여성들에게 영감을 주는 지적인 작품을 완성했다.
다음에 읽을 작품들
![](https://image.aladin.co.kr/product/26625/30/coveroff/8954677525_1.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