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매일 단 두시간만 머리를 쓰는 활동을 하시오.

살아 있는 한 펜이나 붓, 연필을 쥐지 마시오."p.114


요즘 누가 이런말을 한다면 듣는 사람은 이 사람이 정신이 나갔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황당한 말을 했던 사람은 다름아닌 정신과 의사였다. '누런 벽지'로 잘 알려진 작가 샬롯 퍼킨스 길먼은 산후우울증으로 고생한 적이 있는데 당시 나름 저명했던 정신과 의사 위어 미첼(Weir Mitchell)이 그녀에게 이와 같은 조언을 했다. 하긴 이런 어처구니없는 조언은 이 의사 개인의 잘못만은 아니다. 누구도 자신의 세계를 초월할 수 없다. '여성과 광기'에도 나와 있듯 당시(뿐만 아니라 그 후에도) 여성에 대해서 이런식의 태도가 사회에 만연했었고 대부분의 신경증 환자는 여성들이었으니까.(1900년대) '200년 동안의 거짓말'에도 길먼에 관한 언급이 있는데 길먼과 제인 에덤스 같은 경우는 병이 회복되어 활발하게 활동한 편이었다. 샬롯 퍼킨스 길먼이 의사의 조언을 따르지 않은 것, 그녀가 오히려 연필을 쥐고 글을 쓴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편두통","신경증",그리고 언급하기 곤란한 다양한 "여성적 질병"을 가지고 침실에 드러눕는 것은 받아들여질 만했고, 심지어 유행이었다. 정의 내릴 수 없는 신경성 질병"신경쇠약증"은 어떤 집단에서는 지성과 감수성의 표식으로 여겨졌다. p.164 , 200동안의 거짓말




메리울스턴 크래프트와 그녀의 딸이자 '프랑켄슈타인'의 작가 메리 셸리의 소설을 담은 '메리 마리아,마틸다'를 읽으면 남편에 의해 강제로 사립 정신병원에 갇힌 여성이 등장한다. 그녀는 자기 아이를 만날 수도 없었고 자유롭게 외부로 나갈 수도 없었다. 그녀는 훗날 남편을 고발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 작품을 읽을 때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가 떠올랐었다. 거기에 등장하는 다락방의 미친 여인도 어쩌면 실제로는 미치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거다.  


여인 중 그 누가 자신의 감정을 생각했는가? 경험으로 더 훌륭한 판단력을 지닌 부모와 가족이 정해준 남자를 사랑하고, 그에게 복종하는 것이 여자의 의무였다. 남편을 고발한 것에 대해서는 불분명하고, 사립 정신병원에 감금당한 것 이외에는 아무런 증거가 없었다. p.301 , 메리.마리아.마틸다 


'누런 벽지'속 주인공은 남편과 함께 오래된 저택에서 3개월간 휴가를 보내게 된다. 주인공은 이 저택을 '유령의 집'으로 표현하는 등 미신적인 느낌을 받았지만 의사인 남편에게는 말하지 않는다. 현실적,상식적인 그가 이해하지 못할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머물게 된 3층에는 칙칙하고 누런 벽지가 군데군데 찢기고 해져 있었는데 주인공은 무늬에서 점차 어떤 형상을 발견하게 된다.


색깔은 역겨웠다, 거의 비위가 상할 만큼. 서서히 물들이는 햇빛으로 괴상하게 빛바랜, 그을음이 있는 불결한 누런색이었다. 군데군데 칙칙하면서도 야한 주황빛도 있고, 또 다른 부분은 역한 유황빛도 띄었다. p.21


남편에 의해 가족들에 의해 '히스테리 증상'이 있다고 판단된 주인공은 기분나쁜 누런 벽지가 둘러져 있는 방안에서 '안정'을 위해 대부분의 시간을 누워지내며 스스로에 대해서도 생각을 자제하라는 조언을 듣는다. 그녀는 남편 존의 말을 따르지만 모든 말을 사실상 다 납득하는 것은 아니다. 남편과 하녀 '제인'에게 어린아이취급당하고 감시당하면서 누런 벽지의 형상은 익숙한 모습을 갖춰나간다. 샬롯 퍼킨스 길먼은 이 작품에 자전적 경험을 담았다. 남편과 누런 벽지에 대한 묘사와 절묘하게 어우러진 고립감과 공포. 그리고 남녀의 이분법을 표현하는 각종 상징들로 여성으로써 자신의 잃어버린 주체성의 혼란을 의미심장하게 담아냈다. 


벽지 안에는 나 밖에 모르는 것들이 있다. 아마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테지만. 겉에 도드라진 문양 뒤로 희미한 형체가 나날이 또렷해지고 있다는 사실. 늘 똑같은 형체인데, 수가 점점 늘어난다. p.53


'제인에어' 속 다락방의 미친여자는 미치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은 '여성과 광기'를 읽으며 더 분명해졌었는데 이번에 '누런 벽지'를 읽으니 아마도 그런 암시를 주는 듯한 몇몇 장치들이 좀 더 분명하게 보였다. 작품해설에도 나오지만 길먼은 제인에어의 그런 측면을 염두해 두고 그 입장에서 쓴 것일 수도 있다. 작은 의문을 소재삼아 또 다른 시각에서 이런 소설을 창작한 거라면 정말 놀랍지 않은가! 길먼은 여성을 광기로 몰아가는 상황에서도 오히려 글쓰기를 통해 상황을 이겨냈을 뿐만 아니라 여성들에게 영감을 주는 지적인 작품을 완성했다.









다음에 읽을 작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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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2-01-06 07:4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누런벽지라는 제목,소재자체가 고립감 ,공포같은 감정과 바로 연결이 되네요. 기분 나쁘고 기괴하고 계속 생각이 나는...

원제는 누런을 뭐라했나보니 그냥 yellow 네요. 새삼 우리나라 말의 표현이 참 다양함을 다시 느끼네요.

미미 2022-01-06 07:52   좋아요 6 | URL
저도 왜 굳이 ‘누런‘이라고 번역했을까 의문을 가졌었는데요. 소설을 읽고보니 오래되고 낡은 분위기를 표현하려 한것 같아요.

100페이지 정도인데 한쪽은 영어라 한글 페이지는 50페이쯤 될텐데 인상적이었어요!^^*

mini74 2022-01-06 08:41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히스테리아의 어원이 돌아다니는 자궁이라는걸 읽고 헉 했어요. 불완전하고 아이같다 취급해야 재산도 뺏고 권리도 억압할 수 있었겠죠. ㅠㅠ 예전 책들 읽음 열받을때가 많아요 ㅠㅠ

미미 2022-01-06 08:55   좋아요 4 | URL
네 지난번 미니님 리뷰에서 본 기억이 나요. 실제로는 남자가 많은데도! 진짜 마녀는 과연 있기나 했을까요? ㅠ.ㅠ메두사나 판도라에 대해서도 달리 생각하게 되더라구요.

책읽는나무 2022-01-06 08:4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누런 벽지랑 허랜드 제목 많이 봤었는데 길먼 동일 인물이었군요?
음....또 담아가야 겠네요^^
산후 우울증이 광기였다니....ㅜㅜ

미미 2022-01-06 09:00   좋아요 4 | URL
책도 많이 남겼는데 번역된 책들이 좀 있어요. 다 읽어보고 싶어요! 이 단편소설은 ‘실크 스타킹 한 켤레‘에도 들어있어요. 그 책 있는데도 모르고 샀는데 주석과 작품해설이 잘 되어 있어서 만족입니다.^^

얄라알라 2022-01-06 09:0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첫 문장 읽고 바로 알았어요. [누런 벽지]
작가의 자전적 체험과 실제 상류층 여성을 위한 처방에서 나온 것이라는 해설을 읽고 어찌나 분노했던지....

미미 2022-01-06 09:19   좋아요 4 | URL
저 당시 그저 묵묵히 그런 상황을 수용한 여성들이 더 많았을텐데 이런 도발?적인 작품을 썼다는게 멋있고 놀라워요! 다락방님이 알려주셨는데 길먼이 이 작품을 그 정신과의사에게 보냈대요ㅎㅎ👍

얄라알라 2022-01-06 10:21   좋아요 3 | URL
오호! 제가 읽고도 잊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강제적 ˝멍 때리기˝ 고문을 처방이라고 쥐어준 정신과의사에게 작품을 보냈다고요! 통쾌합니다.

새파랑 2022-01-06 09:08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여기서도 등장하는 깨알같은 다락방님이네요 ㅋ 제인에어를 모티프로 쓴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도 한번 읽어보세요. 좋아하실거 같아요 ㅋ 저도 가방에 <실크 스타킹 한 켤레> 들어 있는데 ^^

미미 2022-01-06 09:22   좋아요 4 | URL
다락방님은 소중하니까요ㅋ 오! 그 책 꼭 읽어봐야겠군요. 아니 그런데 새파랑님 가방에 왜 스타킹을 갖고 다니세요!!ㅋㅋ(장난)

새파랑 2022-01-06 09:35   좋아요 3 | URL
앗 😅 그책이랑 휴먼스테인 두권이 가방안에 있습니다~!!

미미 2022-01-06 09:38   좋아요 3 | URL
한 권도 멋진데 두권이나👍👍

persona 2022-01-06 09:50   좋아요 4 | URL
저도 읽어봐야겠습니다. ㅎㅎㅎ

persona 2022-01-06 09:4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윌키 콜린스의 우먼 인 블랙에도 강제로 정신병원에 갇히는 여성이 나와요. 정신이 너무 또렷한데 갇히는 경우가 흔했던 건지;;
바네사가 미쳤든 안미쳤든 로체스터 경이 어린 여자 꼬셔서 새장가 드는 거는 내내 공감은 잘 못했죠. ㅠㅠ 바네사가 파멸하고 제인에어와 로체스터 경의 결혼에 정당성이 생기는 것도 정말 해피엔딩이라고 읽기 어려웠고요.

미미 2022-01-06 10:49   좋아요 3 | URL
우먼인블랙 영화는 본것도 같아요! <여성과 광기>에 보면 많은 여성들이 미치지 않고 정신병원에 입원했다는걸 알 수 있어요.ㅠㅠ 네!! 제인에어에서 가장 이상한 부분이었어요. 어딘가에서 그녀가 재산이 많았던 부분도 한가지 의혹점이라고 하더군요. 저는 아직 <제인에어>영화만 봤는데 소설이 읽어보고 싶어요.🤔

persona 2022-01-06 11:03   좋아요 4 | URL
아 죄송합니다. 제가 더우먼인화이트랑 우먼인블랙을 같이 읽어가지고 실수했네요. 윌키콜린스 책은 화이트입니다. 아 죄송해요.
우먼인블랙은 Susan Hill이라는 분 책이고 이건 귀신과 예감과 저주에관한 책이에요. 죄송합니다. 콜린스 책에서 ‘흰옷 입은 여인’ 첫번째가 정신병원에서 탈출해 월터가 만난 그 여성인데요. 아 색을 바꿔 말하다니 죄송합니다. 저는 제인에어를 어릴 때 한번 읽고 커서 한번 더 읽었는데요. 브론테 자매의 책들은 다시 읽어도 참 어둡고 찜찜하군. 이런 느낌이었어요.

미미 2022-01-06 11:19   좋아요 4 | URL
헷갈리실만 해요.ㅋㅋㅋ페르소나님 글쎄 우먼인 윈도도 있어요!!^^*

persona 2022-01-06 11:24   좋아요 4 | URL
감사합니다. ^^;;; 윈도도 있군요. 참 여러가지에 둘러싸인(?) 여자들이 많군요. ㅋㅋㅋ

기억의집 2022-01-06 11:0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지위은 말할 것도 없겠죠. 우리가 위대한 과학자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도 여성 문제에 있어서는 엄청엄청 추잡한데 이게 여성의 지위를 낮게 봐서 그런 것 같아요. ㅠㅠ

미미 2022-01-06 12:04   좋아요 3 | URL
네 <여성과 광기>에도 나오는데 정신병동의 여성비율과 그녀들이 처한상황등이 남성중심주의를 그대로 반영한다고요. 프로이트는 후배에게 그가 담당했던 환자랑 결혼하라고 했고 칼융도 자신의 환자랑 사귀었대요. 의사로써 기본적 윤리의식조차 없던거죠.

프레이야 2022-01-06 11:0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여자는 아픈 사람이라고 규정한 가부장적 말도 있어요 어르신들 말에.
너무 놀랍지요 아직도. 분하기도 하고.
미쳐서 미치는 게 아니라 억압적 환경에서 미치지 않고 배길 수 있을까요.
오래전에 히스테리아, 보면서 분개했던 기억이....ㅎㅎ
미미 님 계속 읽어주세요. 아쟈!

미미 2022-01-06 11:27   좋아요 4 | URL
그러게나 말입니다. 여성 모두가 거대한 감옥에서 살아간다는 표현도 수긍이 가더라구요. 미치는게 오히려 당연한듯해요. 계속 읽겠습니다! 아자아자^^*

페넬로페 2022-01-06 16:0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그 어떤 직업을 가져도 시대의 영향을 받지 않을수는 없는듯 해요.
그 정신과 의사도 그 시대를 살았으니까요.
미미님의 글이 이미지화 되어 제가 누런벽지 속에 갇혀 있는듯한 느낌이 듭니다. 저절로 우울해지네요^^

미미 2022-01-06 16:21   좋아요 3 | URL
아무래도 그렇겠죠? 막상 소설은 굉장히 짧고 코믹한 부분도 있어서 재밌게 금방 읽었어요! 해설,주석 너무너무 좋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