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 모임을 가입할 때부터 걱정되었던 건 새로운 사람들과 어울려야 하는 점이었는데 나는 사람을 사귀고 싶어서 가입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냥 등산이 좋은데 혼자 다니긴 무섭고 길도 잘 모르니까 섞여서 다녀보고 싶었다. 그러다가 혹 마음 맞는 친구가 생기면 좋은 거고. 그렇다고 굳이 친구 만들려고 가입한 것은 아닌 그런 마음. 해당 사이트에는 함께 찍은 사진들, 개인 별로 찍힌 사진들, 멤버들이 함께 산을 오른 뒤 도시락을 나눠 먹는 사진, 큰 양푼에 밥을 비벼 나눠 먹는 사진들이 보란 듯이 올라와 있었다. 운영자와 몇 명의 리더가 있고 각 리더가 산행 공지를 올리면 참여하고 싶은 날짜에 신청을 하고 따라가는 식이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지원자가 적은 코스만 몇 개 신청해두었었다.
인상도 좋고 친절한 분이었다. 마음이 놓였다. 사생활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지도 않았다. 중간중간 어색한 침묵도 굳이 깨뜨리지 않는 분이었다. 나에게는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런데.....자꾸만 인증사진을 찍게 했다. '저기 서봐라' '거기서 뒤돌아 봐라' 요구 사항이 이어졌다. 나는 그냥 등산하려고 만난 건데? 사진 찍는 거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예민하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 웃으면서 말한 탓인지 묵살당했다. 피톤치드도 풍부하고 걷기에도 힘들지 않은 코스였는데 자꾸만 사진 찍느라 멈춰 서야 했다. 상.중.하로 난이도를 나누면 '하'인 완만한 코스임에도 어쩐지 괴로움은 '상'이 되어있었다. 다섯 번은 말했던 걸로 기억한다. '찍고 싶지 않다고.'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남편에게도 인증사진을 보내줘야하지 않겠냐, 이렇게 찍어 올리지 않으면 이 코스 왔다고 사람들이 믿어주지 않는다, 농담 반 웃으며 이야기해서 거부할 수가 없었다.
최근에 등산을 자주 갔었는데 이번에 다녀오고 난 뒤 가장 지쳤다. 멧돼지 나올까 봐 조금 서둘러 걷더라도 혼자 하는 등산이 최고였다. 어떤 말은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즐거웠지만 사진 찍어야 하는게 부담스러워 탈퇴한다고 문자로 간략히 알렸다. 억지로 안 찍어도 된다고 답신이 오고 전화가 왔다. 부탁하지 않았는데 나를 찍었던 사진들을 보내며 본인 스맛폰에서도 지우겠다고 했다. 세어보니 내 사진만 40장이 넘었다. 좀 더 친해지고 찍었더라면 어땠을까, 이런 걸 좋아 하는 사람도 많겠지, 누군가 내 사진을 찍어 준다는 걸 원하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모임을 즐겁게 유지하게 하려는 서비스 차원이었겠지...나는 디폴트를 벗어난 인간임을 종종 이렇게 실감한다. 역시 소통이라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에미와 레오는 정기구독을 해지하려던 메일이 잘못 보내져 인연을 맺게된다. 초반 둘 사이에 오고 가는 실랑이가 재밌고 꽤나 설득력이 있었다. 두 사람은 성향이 무척 달랐지만 2년 가까이 그렇게 메일을 주고 받으니 호감이 커져갔다. 레오는 커뮤니케이션 카운슬러이자 언어심리학 쪽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런 배경 탓인지 자신과 성격이 다른 에미를 잘 이해해 주었고 변덕스럽게 굴 때에도 숨은 진심을 헤아려주었다. 문제가 없진 않았다. 그는 싱글남이었지만 에미는 유부녀인데다 아이 둘을 키우고 있었던 것. 그래서 레오에게 친구를 소개해 주기도 하고 몇 번이나 거리를 두려 하지만 감정이 이미 깊어질 대로 깊어져 번번이 실패한다. 조금씩 자신의 오랜 상처를 상대에게 드러내면서 오해도 하고 싸우기도 하는데 그 모든 과정은 일곱 번째 파도를 향해 점점 상승한다.
경고 하나 할게요. 모든 에미를 염두에 두시는 게 좋을 거예요. 삶이라는 게 저 바깥세상에서 어떤 장난을 치는지, 이 안에 그 삶이 어느 정도나 반영되는지, 그걸 누가 알겠어요? 40
그러던 어느 날 에미의 남편이 두 사람이 주고받은 메일을 보게 되어 둘 사이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남편은 에미가 모르게 레오에게 의외의 제안을 한다. 그 제안은 두 사람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다주었을까? 궁금하신 분들은 직접 읽어보시길. 말을 한다는 것도 글을 쓴다는 것도 오독을 각오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특히 소설가들은 직감적으로 아는 것 같다. 자신을 이해해 주는 단 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 기적이라는 사실을. 소설이라는 세계는 얼마나 신비롭고도 안전한가. 그러나 안전한 파도가 휩쓸고 지나갈 때마다 내면의 세계는 조금씩 바뀌어 있다.
일곱번째 파도는 조심해야 해요. 일곱번째 파도는 예측할 수 없어요. 오랫동안 눈에 띄지 않게 단조로운 도움닫기를 함께 하면서 앞선 파도들에 자신을 맞추지요. 하지만 때로는 갑자기 밀려오기도 해요. 일곱번째 파도는 거리낌 없이, 천진하게, 반란을 일으키듯, 모든 것을 씻어내고 새로 만들어 놓아요. 일곱 번째 파도 사전에 '예전'이란 없어요. '지금'만 있을 뿐. 그리고 그 뒤에는 모든 게 달라져요. 더 좋아질까요, 나빠질까요? 그건 그 파도에 휩쓸리는 사람, 그 파도에 온전히 몸을 맡길 용기를 가진 사람만이 판단할 수 있겠지요. 256
그가 말했다.
"당신이 언젠가 이런 만남을 되돌아보며 나를 미워하게 될까봐 두려워요."
나는 그를 보았다.
"내가 두려운게 뭔지 알아요, 로버트?"
나는 그의 손을 만지며 말했다.
"나는 내가
당신을 미워하지 않게 될까봐 두려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