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많이 꾼 꿈에는 어릴때 우리 가족이 살던 아파트가 등장하곤 했다. 어쩌면 가장 나빴던 기억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라고 짐작된다. 그 기억 중 하나는 그곳에 살던, 몇번은 나와 마주쳤을 5~6살쯤의 아이가 엘리베이터 출입문 고장으로 추락했고 그애 엄마가 바로 뒤에서 따라와 잡다가 함께 떨어진 사건이었다. 마치 그 장면을 내가 직접 본 것처럼 당시 일은 큰 충격이었고 수없이 내 머릿속에서,이후에는 내 꿈에서 여러방식으로 재생되었다. 친구들과 그 아이의 집에 가봤는데 그집 현관에는 혼자남은 아버지가 남긴 편지가 붙어 있었다. 또 하나의 기억은 우리 가족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 이야기는 차마 여기에 꺼낼 수 없는 나의 개인적인 비극이다. 사건이 있던 날 내 안에서도 그 아이처럼 무언가가 추락했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나는 그 때 일을 아직 쓸 수가 없다. 그래서 자신의 고통을 드러내는 작가들의 글에 늘 놀라움과 대리만족, 슬픔을 동시에 느낀다. 루시는 글쓰기로 자신의 삶에 드리워진 그 어두운 베일을 서서히 걷어냈다. 그녀만의 방식으로, 만나는 사람들을 사랑하면서. 그건 사랑받지 못했던 자신을 스스로 사랑해주는 방법이기도 했다. 이런 사랑은 끝없이 갈구하게 된다는 면에서 욕망과 비슷하다. 캐서린이 향수로 과거의 냄새를 지웠다면 루시는 사랑하며 삶에 향기를 더했다. 그 향기는 그녀의 글에도 은은히 베어있다. 맡을 수 있는 사람들을 언제든 위로하기 위해서.
캐서린이 그에게 미친듯이, 되돌릴 수 없게 빠져든 것이 이때였다. 그녀는 그날 빌헬름의 연주만큼 아름다운 연주는 들어본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계절은 여름, 창문이 조금 열려 있고 바람이 불어와 커튼을 부드럽게 들칠 때 그는 피아노 앞에 앉아연주를 시작했다. 브람스의 곡이었는데, 그건 그녀가 나중에 안사실이었다. 그는 연주하고 또 연주했고, 그저 한두 번 그녀를슬쩍 올려다보았을 뿐이었다. 그러고는 일어서서 캐서린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인 뒤-그는 짙은 금발에 키가 컸다-그녀옆을 지나 다시 들판으로 나갔다. - P77
나는 스스로에게, 어머니가 나를 사랑했다고 말해준다. 어머니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나를 사랑했을 것이다. 언젠가 그 사랑스러운 여자 정신과의사는 이렇게 말했다. "소망은 결코죽지 않아요." - P108
그가 쇼팽의 에튀드 C#단조를 연주하는 것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생각했다. 이게 내가 원하는 전부야. 심지어 내가 그 생각을 하기는 했는지조차 모르겠다. 그저 그의 연주를 듣는 것 말고 세상에서 내가 원하는 다른 것은 없었다는 말이다. - P283
『오 윌리엄!』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의 후속작이다. 첫 남편 윌리엄과의 오랜 결혼생활을 청산하고 첼리스트인 데이비드와 예순이 넘도록 살아오던 루시는 병으로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다. 과거 그녀에게 유일하게 집이 되어주었던 윌리엄과 계속 친구처럼 지내오던 루시. 어느 날 윌리엄의 세번째 아내가 어린 딸을 데리고 집을 나간다. 거실에 있던 러그까지 챙겨서. 충격에 빠진 윌리엄은 아내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았던 '조상찾기'를 통해 이미 고인이된 자신의 모친 캐서린의 숨겨진 과거와 이복 누이의 존재를 알게된다. 그는 루시와 함께 이복누이를 찾아간다. 이 여정을 통해 루시는 시어머니 캐서린의 숨겨진 과거와 자신의 과거가 비슷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아니, 캐서린은 루시보다 더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늘 풍족하고 충만한 삶을 살아왔던 것처럼 행동했다. 늘 아들의 옆자리에 앉고 루시를 은근하게 자신과 구분짓곤 했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숨기기 위해 다른 것에 몰두하고 결국 스스로마저 속일 수 있을거라 믿는다. 하지만 도망칠수록 진실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달리는 길을 점점 더 무겁게 만든다.
상처가 아니라면, 왜 쓰겠는가? 상처가 없으면 쓸 일도 없다. 작가는(학자도 마찬가지다)죽을 때까지 '팔아먹을 수 있는'덮어도 덮어도 솟아오르는 상처wound가 있어야 한다. 자기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경험을 쓰는 것이 아니다. 경험에 대한 해석,생각,고통에 대한 사유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그 자체로 쉽지 않은 삶이고, 그것을 표현한다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산을 넘는 일이다. ㅡ정희진,록산 게이의 『헝거』추천사 중에서.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범죄자들의 심리를 분석해주는 범죄심리학자 박지선교수가 SBS에서 『지선씨네마인드』라는 프로그램을 맡았다. 기존 영화평론에서 읽지 못했던 심리를 분석하는 방송이다. 최근 이 방송에서는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이란 영화가 선정되었다. 미국의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윌스미스가 시상자였던 크리스록이 윌의 아내를 두고 한 농담에 분노. 무대에 난입해 록의 뺨을 때린 일이 있었다. 당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수군댔을테고 누구도 윌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는데 오직 한 사람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의 남주였던 브레들리 쿠퍼만이 윌을 안아주고 그에게 뭔가 위로의 말을 건네주었다고 한다. 『지선씨네마인드』에서 박지선 교수가 이 이야길하며 브레들리가 윌을 포옹하는 장면이 곧이어 방송화면에 나왔다. 박교수는 '이건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브레들리 쿠퍼가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에서 맡은 역할 때문에 윌의 감정을 이해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물론 브레들리 쿠퍼는 '연기'를 통해 조울증,분노조절 장애를 간접체험했지만 역할에 몰입함으로써 어느정도 그 슬픔,분노의 고통을 이해한것이다. 결코 실제 그런 일을 겪은 사람의 감정을 완벽하게 알 수는 없었겠지만 그 경험은 분명 그를 바꾸어놓았다.
꾸밈없는 담백하고 서정적인 글쓰기는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강점이다. 우리는 그녀의 글을 읽어내려가며 맥을 짚듯이 우리의 과거를 함께 떠올린다. 그곳에는 들춰보고 싶지 않던 고통도 있고 햇살처럼 영롱하고 따사로운 좋은 추억도 있다. 시간의 무게에 그저 흘려보냈던 일들이 스트라우트의 온건한 이야기와 함께 떠올라 의미를 되찾는다. 스트라우트의 글이 좋은 건 무엇보다 이런 점이다. 자신의 글을 쓰고 싶게 만들어준다. 용기를 북돋워준다. 자기 내면과 마주할 수 있는 용기를. 어쩌면 상처입은 자기 자신, 외면했던 자신과 화해할 수 있는 용기를 말이다. 자기 자신의 문제와 화해할 수 있는 사람만이 타인의 결점을 이해하고 그 자체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우리는 우리 삶의 시인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신화이며 미스터리다.
니체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자기 삶이라는 시를 짓는 시인이 되어야 하며, 모든 개인은 자신의 특정한 운명의 범위 내에서 "스스로 법칙을 부여"(삶의 방향을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우리가 저지르는 실수, 심지어 우리의 잘못된 선택조차도 자아 형성에 도움이 될 수 있다. - P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