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 시인이 말했다고 한다.
시는 나이테만 보여주는 것이고
산문은 나무 전체를 설명하는 것이라고.
어쨌든 시도 산문도 나에게는 그늘이고 휴게소다.
분투하듯 살아가고 세상을 읽어가는 내게
시와 산문은 잠시 쉬어 가라며 나를 붙잡는다.
뭐가 그리 급하냐고 뭐가 그리 분주하냐고
숨을 돌리라고 잠시 앉아 가라앉히라고
다독이고 다독인다.
사전에서 ‘저녁‘ 이라는 말을 찾아보았습니다. '저녁: 해가질 무렵부터 밤이 되기까지의 사이.‘ 사전적 정의라고 하기에는 다소 추상적인 풀이를 보고 친구와 저는 동시에 웃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봐도 저녁은 오지 않을 듯 머뭇거리며 오는 것이지만, 결국 분명하게 와서 머물다가 금세 뒷모습을 보이며 떠나갑니다. 물론 저녁이 아니더라도 오고가는 세상의 많은 것들이 이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P17
야한 장면 없이 야한 소설. 무서운 장면 없이 무섭던 영화가 그러했듯 야한 장면 없이 야했던 옌롄커의 소설은 나의 상상력을 마구 자극해주었다. 읽기 쉽게 쓰였다고 해서 쉽게 쓴 것이라 단정할 수는 없다. 명료한 글일 수록 수많은 고민과 번민이 나름의 해탈에 이른 결과가 아닐까? 소도 뒷걸음 치다 쥐를 잡지만 쥐를 여러번 잡는다면 능력이다. 옌롄커는 자신이 시대를 잘 만났다고 하지만 솔직히 누구든 피하고 싶은 시대 아니던가? 그의 용기에 건배를! 영화는 망한것 같지만 어쩌면 그것 역시 이 작품을 가벼이 본 결과다. 이 문장을 어떻게 스크린에 옮긴단 말인가! 불가능한 것을 시도했다. 이안 감독이라면 훨씬 시(詩)적으로 살려냈을지도 모른다. 어떤 것은 텍스트 그대로 두어야 한다.
두 사람은 초조함과 애정의 목마름, 원한의 욕념을 품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동자에는 마른 땔나무 한 무더기가 불붙고 있었다. 두 사람의 호흡이 잠시 힘겨워졌다. 거대한 불길에 사방이 온통 짙은 연기로 뒤덮인것 같았다. 마른 나뭇가지에서 불꽃이 명멸하면서 짙은 연기가 하늘을 덮을 기세로 피어올랐다. 그때 류롄이 상황에 가장 잘 어울리는 한마디를 내뱉었다. "정말 인민을 위해 복무하는군. 잘했어. 아주 잘했어."- P119
룸살롱,비즈니스 룸,클럽, 단란주점, 온라인상의 N번방과 음란 단톡방에 이르기 까지 여성에 대한 혐오와 멸시가 남성성으로 기능하는 '남자들의 방'을 들여다본다. 우리나라의 유흥업은 '여성'없이는 존재할 수 없을만큼 '여성착취적'사업으로 성장해왔다. 타자의 성을 돈으로 사고 희롱하는 놀이공간, 남성성을 과시하는 장소, 때로는 비즈니스 하는 공간으로 기능하는 유흥업이 국가와 사회로부터 묵인되고 수용되는 부조리함을 아프게 읽어냈다.공동체가 인간 존엄성에 대한 확고한 인식과 합의를 가지고 있다면 이런 상태가 과연 가능할까?
내가 유흥업소의 특수성에 집중한 이유는 특히 이 공간에서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 ‘일‘로 당연하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나는 유흥업소 여성 종사자의 경험을 곱씹을 때마다 성희롱, 성추행, 성폭력이 무화되는 이 공간의 특수성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중략) 유흥산업을 비롯한 성매매산업은 여성을 멸시하고 혐오하는 행위가 돈을 지불했다는 이유로 평범하게 여겨지는 특정한 장소이고, 그 특정한 장소가 평범한 일상이되어버린 게 한국 사회다.ㅡP223
이 책은 제목대로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라캉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무섭고 머리아픈 구조주의 4인방을 쉽게 설명했다. 일본에서 교수로 활동하고 있는 저자는 시민강좌에서 활용한 노트를 이 책으로 엮은 것이라고 한다. 읽어본 바로는 기대만큼 쉽진 않았지만 이해 안가는 대목은 두 세번 반복하는 식으로 조금 노력하다보면 대체로 납득할 수 있게 꾸며져 있다. 구조주의 입문서에 가깝다. 나는 이런 일이 있었는줄도 몰랐는데 사르트르는 카뮈에게 사망선고를 내리고 레비스트로스는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에게 사망선고를 내렸다는 부분이 가장 재미있었다. 어떤 사망선고였는지 궁금하신 분들은 직접 읽어보시기를 추천한다. 바르트가 극찬한 일본의 '하이쿠'를 더는 미루지 말고 조만간 꼭 읽어봐야겠다.
우리는 모두 자기가 사용하고 있는 어법의 진리 속에, 즉 그 지역성속에 붙들려 있다. 나의 어법과 이웃 사람의 어법 사이에는 격렬한 경쟁관계가 있고 우리는 그곳으로 끌려 들어간다. 왜냐하면 모든 어법(모든 픽션)은 패권을 다투는 투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번 어떤 어법이 패권을 손에 넣으면 그것은 사회생활의 진역으로 퍼지고 징후가 없는 ‘편견doxa‘ 이 된다. 정치가나 관료가 말하는 비정치적인 언어, 신문이나 텔레비전, 라디오가 떠드는 언어, 일상의 수다. 그것이 패권을 장악한 어법이다. 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에서 - P133
'호밀밭의 파수꾼'이 떠오르는 성장 소설. 화자가 다니는 이 명문고는 문학적 재능을 높이 평가한다. 학기마다 유명 작가들이 초대되는데 시나 소설,수필을 써낸 학생들 중에 1등을 뽑아 작가와의 특별한 시간을 보낼 기회를 준다. 마지막에 이 학교에 헤밍웨이가 방문하기로 하는데 늘 기회를 얻지 못했던 주인공이 당선되지만 그 과정에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른다. 이 '실수'라는것이 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작가의 이력을 읽고나서 이런식의 자기합리화는 아무래도 좀 아니라는 결론을 지었다. 3분의 2 지점까지는 썩 나쁘지 않다.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이란 아직까지 나에게 흥미로운 영역인것 같다.
글을 만들어내는 삶은 글고 적을 만한 삶이 아니다. 작가의 삶이란 작가 자신도 모르게 이어지는 인생이고, 정신이 하는 일과 거기서 나는 모든 소음으로 덮여 있는 인생이며, 불조차 밝히지 않은 수직 통로, 유령들이 저마다 메시지를 가지고 분투하며 우리를 향해 오다가 서로를 죽이고 마는 그 수직 통로 저 깊은곳에서 벌어지는 인생이다. 어쩌다 그 유령 중 몇몇이 살아남아 작가의 관심이 미치는 곳까지 뚫고 나오면, 작가는 그 유령을 커피를 더 채워주러 오는 종업원처럼 덤덤히 맞이하는 것이다. P.276
첫 페이지부터 별5개로 시작한다. 두껍지만 기대된다. 전시강간은 꽤 오래된 일이다. 관심갖고 찾아보면 지금도 벌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영화와 다큐가 계속 만들어지고 출판물로 나오고 있다는 점이 그나마 긍정적이라고 생각된다.'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는 용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들에게는 꾸준한 사회적 지지와 공감이 필요하다. 서양 최초의 역사책인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여성을 납치한 이야기로 시작한다고 한다. 읽어야 할 책들은 하루하루 늘어가고 서재는 점점 좁아진다.
우리는 우리의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겼고 속으로 여러 번 죽었지만 우리의 이름은 어느 기념비에도, 어느 전쟁기념관에도 새겨지지 않을 것입니다.
ㅡ 아이사,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강간 생존자 - P5
원서 읽는 쏠쏠한 재미
옥스포드 북웜 읽기는 계속된다. '오즈의 마법사'는 역시 줄거리를 몰라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 기억력이 나쁘다는건 이런면에서 꽤 장점이다. 허리캐인에 휩쓸려 온 도로시와 겁쟁이 사자, 허수아비, 양철나무꾼. 모두가 자신이 원하는 걸 이미 다 가지고 있는데 그 사실을 몰라 마법사에게 요구한다. 짧아서 아쉽기도 했다. 이제 2권만 더 읽으면 레벨 2로 진입할 수 있다. 어제 도서관에 다녀왔는데 내가 보는 시리즈의 가짓수가 늘어나있어 반가웠다. 누군가 기증했거나 추가로 구매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