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이전에 저자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전작 <그래도 명랑하라,
아저씨>와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출판 전문잡지 <기획회의>에 연재되는 독서 칼럼을. 처음 저자의 글을 읽었을 때, 참
독특하다는 생각을 했다. 자연히 저자의 글쓰기 방식에 관심이 갔다. 영리하게도, 저자분은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연출'하신다.
많은 독자들이 이 책이 웃기고 재미있다고 한다지만, 내가 보기에 이 책은 엄청 진지하다.
가벼운 말장난 개그 스타일로 웃기는 것이 아니다. 철저히 미리 세팅해놓은 무대배경에서 차근차근 긴장을 고조시키다가 반전을 일으키는 상황으로
웃긴다. 마치 저자는 자신의 글을 읽어갈 관객의 심리를 미리 알고 밀당을 즐기는 것 같다. 아래처럼.
진돗개가 그렇듯 장서는 한 주인만을 섬긴다.
주인을
잃은 장서는 안타깝지만,
애물단지에
지나지 않는다.
(중략)
이런
이유로 헌책이나 희귀본 수집가들에게 최고의 대박 기회는 다른 교양있는 장서가의 죽음이다.
- 본문 20쪽에서 인용.
책은 <독서만담>이라는 제목답게 경쾌하게 일상의 책 이야기를 들려준다. 작가의
전작 <그래도 명랑하라 ~ >처럼 가족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기획회의> 칼럼처럼 책 소개로 끝난다. 이 과정에서 아내와
소소한 일로 다투고 삐졌다가 항복하는 에피소드가 많이 나온다. 저자는 스스로를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가부장으로 정해놓고 그런 자신을 궁지로 몰아
스스로 망가뜨려서 독자에게 웃음을 준다. 일부러 옛 왕조의 유물처럼 이 시대 사람들은 일상 생활에 안 쓰는 한자어를 사용하여 서술한다. 그래야 결말에서 상황이 반전될 때 낙차로
인해 그 웃음의 효과가 증대되니까. 이런 점에서 나는 저자가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연출'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상 설겆이하고 빨래 개고
마트에 장 보러 가면서도 저자는 가부장의 권위 운운하는 것을 빠뜨리지 않는다. 이는 설정이다. 결코 저자가 가부장의식에 찌든 보수 아저씨여서가
아니다. 저자는 이런 허위의식을 간파하는 즐거움까지 독자에게 줄 것을 계산하고 웃음을 준다. 영리하시다. 퇴고를 많이 하시는 걸까, 아니면 타고난 능력일까? 근래에, 이렇게 날 정신줄 놓고 웃게
만들면서 한편 저자의 스타일을 분석해보고픈 학구적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분은 없었다.
책
내용 자체도 즐거웠다. 나 또한 독서광이기에. '표지 디자인의 무성의함을 이데올로기로 삼는 까치 출판사(30쪽)'라는 대목과 '만약 꼭
책을 베게로 삼고야 말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글항아리 책들을 권한다. (69쪽)'라는 대목은 아마 어지간한 책벌레라면 다들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셨으리라. 뭐, 까치 책의 표지 디자인이야 30년 동안 변함없지 않습니까? 글항아리야 돌항아리 아니겠습니까? 뿐만 아니다. 책을 사랑하는
방법에 따라 독서인을'육체파'와 '정신파'로 나누는 대목도 정말 공감이 갔다. 저자에 따르면 책에 밑줄 치고 메모하고 침 묻혀 책장 넘겨가며
책을 읽는 사람은 '육체파'이고, 보물처럼 아껴서 책을 소중하게 읽는 사람은 '정신파'라고 한다. 흠, 저는 줄을 빡빡 쳐가며 읽는데다가 특별히
좋아하는 책은 침대 머리맡에 두고 자다가 깰 때마다 쓰다듬어 보는데요? 저는 육체파 + 변태파인가요? 뭐 이런 생각도 읽어가며 하고, 저자가 맛깔나게 소개하는 책 제목을 메모하기도 하고,,,
그렇게 읽어가는데, 어머나,
김현의 저작은 눈이 좀 아프더라도
누런 구형 종이 위에 오밀조밀 박힌 글씨로 읽고 싶다는 욕구를 느낀 것이다.
이제 막
진지한 독서를 시작한 대학 시절이나 초보 직장인 시절에 나왔던 책은 그 시절의 책으로 읽어야 제맛이 느껴진다.
- 33쪽에서
인용
내 서재는 나와 함께 늙어갈 터이고 언젠가는 아내나 딸에 의해서
묘지(헌책방)로 실려
가겠지.
-
59쪽
위
문단처럼, 통찰력 있고 은근 쓸쓸한 문장들도 리모콘을 들고 쇼파에 누워 티비 채널권을 외치는 가부장처럼 곳곳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것이 아닌가! 대놓고 '사랑해요'라는 말을 못 하기에 어버이날에 어머니께
꽃을 달아드리면서 '꽃에 사랑합니다,
라고 적혀
있네요'라고 말한다니,,, 이런이런. 다만 실컷 웃으려고 주문해 읽은 책인데 감동까지 주다니, 이 저자분 스타일, 정말 독특하시다. 정말이지,
다음 책도 기대가 된다.
서울애들은 '김밥천국'식당을
줄여서 '김천'이라고 부른다. 그동안 나는 외가가 김천이기에 김밥천국 앞을 지나칠 때마다 외삼촌과 사촌들을 그리워했는데, 이제 다른 남자분을
떠올리게 될 것 같다. 직원이 알아볼까봐 매일매일 다른 츄리닝으로 갈아 입고 김밥천국에 가는 어떤 분 말이다.
*** 옥의
티.
1
그리스인들이 알파벳을 발명함으로써 지식의 대중화를
가져왔다는,
다른
역사서에서 간과하고 있는 중요한 통찰을 서두에서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 책이 단지 서양 역사의 입문서나 요약서에 머무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 191쪽
=> 알파벳 발명은 그리스인이 아니라 페니키아인. '그리스 식 알파벳 발명'의 오타가
아닐까 싶다.
(중요한 내용은 아닌데, 그동안 역사책 읽으면서 오류 넣어 쓰는 것이 버릇이 되어서요.
죄송 )
2
젊은 날의 초상, 변경,
태백산맥, 장길산 정도만 곱씹어도 짧은 인생이다.
인터넷과
게임 그리고 알바 세대가 쓴 작품이 내가 곱씹어 읽을 정도로 공감과 추억을 줄 리가 없다.
- 58쪽
=> 저자분의 의도는 알겠는데, 좀 생각해보시고 이 문장을 고쳐 보신다면 책의
완성도가 더 높아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