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학생 때에도 나는 연휴를 좋아했다. [아라비안 나이트]나 [삼국지]를 방해 받지 않고 읽을 수 있으니까.

람 잘 안 바뀐다. 이번 연휴에도 나는 책탑 쌓았다. 5월 5일, 어린이날에는 두 권을 읽었다. 사회인류학자 토머스 힐란드 에릭슨의 [인생의 의미]와 스테판 츠바이크의 에세이 모음집, [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였다. 두 저자 모두 유럽인이자 PhD라는 점 외에, 공명하는 인간관을 보인다. 바로 "사람끼리의 온기와 신뢰"를 인간 삶의 핵심으 보는 관점이었다. 에릭슨은 21세기에 기술이 발전할지언정 인간은 정서적 결핍과 불신에 시달릴 것으로 예견했다. 츠바이크도 마찬가지이다.




칠전 일이다. 길을 걷는데, 가로수 가지치기를 위해 시에서 파견된 분들이 작업 중이셨다. 그 중 한 분이 전기톱을 든 채로, 산책로로 이동하셨다. 순간 나는 몸이 뻣뻣해질만큼 놀랐다. 아마 바로 그 며칠 전에, '미아동 마트 흉기 난동 살인 사건'이 연상되어서일지 모르겠다. 여느 마트 방문객으로 보였던 범인 태연자약하게 마트에 진열된 칼의 포장을 뜯고 범죄를 저지르는 장면은, 반복되는 뉴스 보도를 통해 내 머릿속에서 영화속 한 장면처럼 각인되었다. 그런 비인간적 사건들이 누적되면서, 사람이 사람을 믿기 어려운 세상이 되어간다.

물론 내게는 전기톱을 들고 이동하시는 분을 모욕하려는 의도가 없다. 토머스 힐란드 에릭슨이나 슈테판 츠바이크가 암시했던 "신뢰 상실한 시대" 떠올라 글을 남긴다. 세상이 어찌나 각박해져가는지, 소임을 다하려 애쓰시는 분을 보고도 경계이 올라온다. 그 마음이 부끄럽지만, 어쩌면 불신은 이렇게 바이러스처럼 번져나가는 게 아닐까.

아무리 낙관하고 싶어도 인간간 신뢰도와 교감이 현상유지나 되면 다행인 시대다. 이런 시대에, [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는 귀한 교훈을 건넨다. 미공개 에세이 9편을 수록한 이 책에서 가장 울림을 크게 준 글은 "걱정 없이 사는 기술"이었다. 어려운 용어로 이야기하자면 '도덕경제' 실현 가능성에 대한 사유 될 것 같다.

이 에세이에 등장하는 '안톤'은 슈테판 츠바이크의 동네에 실제 살았던 무소유의 인물이다. 그는 마땅한 거처도, 직업도 없이 살아가는 가난한 청년이었지만 동네 사람들과 선의의 순환고리로 만들어다. 돈이 매개되지 않더라도 서로 돕고 베풀며 살아갈 가능성을 보여주는 예시이. '미아동 흉기 난동 살인사건'에서 보이는 끔찍한 비인간성과 대조된다.


정말 기이한 일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살기 위해서는 누구나에게 돈이 필요하고, 돈이 없으면 일을 해서 벌어야 한다고 믿어 왔다...그런데 구겨진 바지를 입은 그 작고 마른 청년은 어떻게 이 법칙을 어길 수 있을까?

(...)

나는 곧 깨달았다. 면도도 잘 안 하고 후줄근해 보이는 이 말라깽이 청년은 자신을 위해 철저히 반자본주의적인 새로운 시스템을 발명했다. 그는 사람들의 인성을 믿었다. 그는 은행에 적금을 넣는 것보다 이 작은 도시의 거의 모든 사람의 마음에 도덕적 의무라는 유동자산을 저축하기를 더 좋아했다.

[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15-16쪽


그 외, 이 에세이집에는 슈테판 츠바이크의 넉넉한 마음과 날카로운 지혜를 담겨 있다. 특히 각 글마다 곁들여진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낭만적 회화는, 독자에게 덤의 선물이 된다. 천천히 음미하는 독서할 여유가 있는 분들에게도 권한다.

Landscape with rainbow

Caspar David Friedrich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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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05-06 10: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연휴라곤 하지만 책을 두권이나 읽으셨다니 대난하셔요^^

cyrus 2025-05-06 13: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쉬는 날에 책을 쉬지 않고 계속 읽을 수 있어서 좋긴 한데, 시간이 엄청 빨리 지나가네요...🥲

transient-guest 2025-05-07 00: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가해지만 책을 많이 읽겠다고 다짐하지만 사실 적당히 바쁠때 책이 더 잘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ㅎㅎㅎ

고양이라디오 2025-05-07 17:13   좋아요 1 | URL
맞아요ㅠㅋㅋ 이번 연휴에 책 많이 읽어야지 했는데... 또르륵.

고양이라디오 2025-05-07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얄라님 하루에 2권이나 읽으셨다니 대단합니다ㅎ 츠바이크 에세이 읽어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