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에서 신선 채소를 묵혔다가 흐물흐물해져서 내버릴 때의 찜찜함에 비견할 것이 바로 대출한 책 읽다말고고 반납할 때의 기분. [조지 오웰의 길]은 160여 쪽. 한 손에 쏙 잡히게 얇다. 게다가, 2023년을 조지 오웰 탐색에 쏟았던 내게는 딱히 어려운 내용도 아닌데, 1/2지점에서 반납 알림 메시지를 받았다. 찜찜함을 참느니 다른 우선 순위의 일을 제끼고, [조지 오웰의 길]을 끝까지 읽는다.


글쓴이 아드리앙 졸므 (Adrien Jaulmes)는 종군기자상(2007)을 받은 <르 피가로> 특파원인데, 독특한 작가를 소재로 연재 르포르타주 documentary literature 써달라는 요청을 받자, '조지 오웰(에릭 블레어)'을 떠올렸다. 아드리앙 졸므는 제목 그대로 "흔적 Traces" 을 따라, 즉 작가의 삶에서 주요 사건들이 전개된 장소를 직접 방문하며 소회를 엮었다. 이런 서술 방식은 독자가 '조지 오웰'을 마치 동시대를 치열하게 살았던 인물로 친근하게 느끼도록 실재감을 부여해 준다. 그래픽 노블 [조지 오웰]을 인상 깊게 읽었던 나로서는, [조지 오웰의 길]이 공간화한 자서전처럼 느껴져서 좋았다.


나는 '외모가 뭣보다 중하지!' 했던 어린 시절에, (외모상 호감 느끼기 어려웠던) 조지 오웰의 사진을 보고 작가를 더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 때의 무례함을 몹시 부끄러워한다. 지금 나는 충분히 그를 좋아하고, 더 알고 싶어 한다. 두 대표작 [동물 농장] [1984]과 조지 오웰을 분석한 책을 읽어갈수록 그는 내게 점점 더 매력적인 인간이 된다.



오웰을 추앙하는 분위기를 못마땅히 여겼던 Een Judah는 "나는 왜 조지 오웰이 지겨웠는가"에서 오웰을 "복잡성을 거부하는 사상가"로 깎아내렸렸다. 하지만 역으로 쿠엔틴 코프는 "오웰의 지속적인 영향력은 그가 취한 입장들보다는 언어의 명쾌함과 높은 정직성" 때문이라고 칭송했다. 내가 막연하게 느꼈던 조지 오웰의 매력을 명료하게 정리해준 쿠엔틴 코프가 고맙다.

* *

오웰은 현학적인 문장을 설사하듯 쏟다가 정작 용기를 내야 할 땐 펜을 입에 문 채 웅얼거리는 비겁한 작가가 아니었다. 그는 설사하듯 글만 쏟아내느니 차라리 절필이란 변비를 택했으리라. 조지 오웰은 타협이나 굴종 없는 직진형 인간이다. 무려 이튼 스쿨 출신의 이력에 접시닦이, 서점 판매원 등등 저임금 비정규직이 나열되고, 전장에 나섰을 때 병적 직업란을 "식료품상"이라고 기재했을 정도로 그는 어렵게 살았다. 영국 경찰이라는 번듯한 직업을 그만두고 밑바닥닥 삶을 살면서도 가족들에게 손을 벌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가난이나 소외된 사람들의 세계를 미화하지도 않았다. 조지 오웰은 꾸밈 없이 정직한 작가였다. 나는 수식어 걷어 내고 사는 이 작가가 인간을 보는 눈을 [조지 오웰의 길]을 읽으며 상상해 본다. 두 가지 단서를 찾았다.



1. 에릭 블레어의 단편 <수행인 A Hanging>에서 작품 속 화자는 사형수를 교수대로 데려가던 중, 사형수가 물웅덩이를 피하는 걸 보고 곧 사형당할 그 역시 경관인 자신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이라는 걸 깨닫는다(46쪽)


2. 에릭 블레어는 스페인 내전 당시, 적군의 전령이 손으로 바지를 움켜쥐고 참호 밖으로 달려가는 걸 보았으나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 그 이유를 이렇게 적었다. "내가 방아쇠를 당기기 않은 이유 중 하나는 그의 바지 때문이었다. 나는 파시스트들을 사살하러 왔으나 자기 바지를 붙잡고 있는 남자는 파시스트가 아니다. 그는 인간이다. 우리와 같은 개인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방아쇠를 당길 마음이 들지 않는다." (120)



[동물 농장]으로 조금씩 유명세를 치르고 있을 때, 에릭 블레어가 주라 섬(Jura)으로 요양을 떠난 이유로는 폐렴으로 인한 요양 목적뿐 아니라 작품 집필을 위한 시간 확보도 있었다. "언론이 난리를 쳐대서 말이야... 다른 책을 한 권 쓰고 싶은데, 그러자면 사람들이 나에게 전화를 할 수 없는 장소에서... 조용하게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적어도 6개월은 필요하다네."라고 친구에게 편지를 적었다고 한다. 그 외딴섬에서 조지 오웰은 [1984]를 썼고, 탈고하고 몇 년 안 되어 숨을 거두었다. 결혼한지 채 100일이 안 된 아름다운 신부, 소니아 브라우넬과도 안녕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서 기쁘다. 내가 어떤 작가를 신뢰하는지 뚜렷하게 알게 되어 더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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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3-05-22 00: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작가가 점점 더 좋아져요!
정직한 직진형 인간! 정말 멋진 말이네요~~

얄라알라 2023-05-22 00:31   좋아요 1 | URL
은하수님^^ 반가운 말씀이신데요 고맙습니다

조지 오웰이 몸도 좋지도 않은데, Jura섬에서 보트 뒤집혔을 때 아이들을 살려내고 신속하게 돌보았던 일화 역시, 이 분의 성품을 보여주는 것 같아요.

마음에 없는 말씀을 안 하셨을 것 같은 작가님이라 더 좋은 거 있죠^^

새파랑 2023-05-22 07: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좋아하는 작가가 있다는건 너무 좋죠~!
그런데 조지 오웰 와모 정도면 호감형 아닌가요? ^^ 저 흑백사진 멋진데 ㅋ

은하수 2023-05-22 09:25   좋아요 2 | URL
멋진데다 얼굴에 장난기도 보이지 않나요?~~~ 그리고 정원가꾸기를 매우 사랑했단 것도 저와 같아서 더 좋아요^^

얄라알라 2023-05-23 09:59   좋아요 2 | URL
은하수님, 초록이들 돌보는 거 좋아하시는 군요?^^ 와, 저도 그래요.

조지 오웰은 조용히 강한 분 같아요 그래서 좋아요^^

자목련 2023-05-22 09: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얄라알라 님 페이퍼 보며 책장에 읽어야 할 조지오웰의 책이 있다는 게 떠오르네요.

얄라알라 2023-05-23 10:01   좋아요 0 | URL
이웃님들 서재 마실다니다 보면
그래서 책욕심이 더 무거워지는 것 같아요.
자목련님께서도 또 읽을 거리를 생각하셨네요^^ 즐독하실 기회가 찾아오기를 바라며

행복한 화요일 오전 보내시기를

은오 2023-05-22 20: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린 시절에 ”외모가 뭣보다 중하지!“ 하시면서 오웰을 거르셨단 말씀을 읽으니까 갑자기 민음사판 이방인 표지가 떠오릅니다. ”작가 얼굴을 표지에 박으려면 민음사 이방인의 카뮈 정도는 되어야지!“라고 생각해요 저는 ㅋㅋㅋㅋㅋ 정말 손이 가게 만드는 표지 아닌가요?
좋아하는 작가가 생긴다는 거 정말 좋지요 ㅠㅠ 그 작가 작품 하나하나 섭렵하고 알아갈 생각 하면 정말 신나고 기쁩니다!!

얄라알라 2023-05-23 10:02   좋아요 0 | URL
네, 은오님.

좋아하는 작가가 생겨야 진정 본격 공부도 시작되는 듯 해요

제 친구는 좋아하는 프랑스 철학자의 원전을 읽기 위해 불어 자격증도 따고 프랑스어와 좌르좌르좌르....

좋아서 하다보니 힘들어하지도 않더라고요^^

기쁨을 공유할 수 있어 행복합니다. 여기 이곳 책 좋아하시는 분들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