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사람은 살지 - 교유서가 소설
김종광 지음 / 교유서가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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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022년 2월 3일. 단 하루 만에 나는 소설가 김종광을 좋아하게 되었다. [산 사람은 살지]를 읽고. 심지어 작가가 "갚을 수 없는 덕분"이라며 감사를 올린 출판사 "교유서가"까지 좋아졌다. 덩달아, 김종광 소설가더러 "꾸준히 쓰기는 했는데, 한 방이 없었다"라고 평했다는 '그 누구'에게 욱했다. '뭐야! 김종광 소설가의 꾸준함을 폄하하는 당신은 한 방 날렸어?'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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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활자로 세상 접해온 나는 어쭙잖게 "시골 쥐와 도시 쥐" 우화를 들먹이며 농촌 낭만화를 경계하라는 설교도 해봤다. 정작 나는 참깨와 들깨를 구별할 줄도 모른다. 농촌 체험한답시고, 8월 불볕 더위 땡볕에 논에 놀러 갔다가 동네 분들 그림자도 보지 못하고 올라왔던 경험도 고백할 수 있다. "고대로의 시골 이야기"인 [산 사람은 살지]를 읽으며 '무식해서 용감했음'을 부끄러워한다. 이 작품은 뭐랄까, 로빈슨 크로소의 이야기를 비틀어 쓴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처럼 TV 드라마 [전원일기]를 안방 아랫목으로 오그라진 할머니의 시점에서 다시 조명한 작품이라 할까? 22살에 가난한 시골 농가로 시집와서 땔감 모으러 산을 타고, 시집살이 하고, 농사 지으며 평생 살아오신 할머니의 일기를 토대로 시골에서의 삶과 가족 이야기를 한다. 아마도, 김종광 작가의 어머님 일기장이 [산 사람은 살지]의 기초 뼈대 세우는 데 기여했을 것이다. "작가의 말"에서 보았던 똑같은 문장을 [산 사람은 살지] 주인공 할머니의 일기장에서 만났으니까. 다복한 할머니는 자나 깨나 자식들의 행복과 안녕을 기원하시는데, 특히 글 쓰는 큰 아드님의 책이 잘 팔리기를 손이 닳도록 기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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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주의는 만능 열쇠가 아니겠지만, [산 사람은 살지]를 읽으며 '김종광 작가의 시골 삶이 작품의 진실성을 더해주는구나, 이건 흉내 낼 수 없겠다' 싶다. 어떤 대상이든 글로 재현하는 과정에서 취사선택된 스펙트럼 안에 갇히겠지만, 이왕이면 가까이 다가가본 대상을 재현하는 게 더 진솔한 작업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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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았던 문장이 너무도 많다. 이 작품, [산 사람은 살지]



범골 노인네들 태반이 시경리 육묘씨에게 못자리를 맡긴다. 허나 움직일 힘이 남은 농부에겐 못자리는 마지막 줏대나 다름없었다.

"기계꾼이 다 농사짓는 세상에 못자리까지 남에게 맡기면 그게 농사인가. 농사꾼 체면에 못자리만큼은 직접 해야지. 꼭 돈이 문제가 아니라 농민의 자존심이라는 게 있잖아." 남편이 하던 말이었다. (49)




못자리들 하는 걸 보니, 눈물이 난다. 박사조카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한다. 못자리 철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구경이나 하다니... 은퇴한 건가, 은퇴당한 건가. 밭농사가 무슨 농사인가. 논농사를 지어야 진짜 농민이지. 나는 더이상 농민이 아니다. 남편이 없으니 농민의 아내도 아니다. (305)



면 차원으로 유명한 노씨넥 심청댁이었다...아들만 여섯이었다...그 중에 5남이 중풍, 치매 쌍으로 걸린 지 엄마를 15년 동안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이 동네가 없어져도 그 효자 얘기는 남을 거다 (269).



큰 아들은 몸이 야위었다. 작은아들은 병원에서 비만이라고 했단다. 큰며느리는 몸이 아픈 곳이 많단다. 걱정 안되는 자식이 없다. 딸은 손마디가 아픈 게 장모 닮았다고 사위가 말한다. 키가 작은 것도 내 탓, 아픈 것도 내 탓, 부족한 엄마는 원망투성이다. 나도 이렇게 살고 싶은 게 아닌데, 나도 하고 싶은 일, 꿈이 있던 젊음이 있었다. 늙고 병들고 망가진 모습, 나 자신도 싫다. (281)




고3 손자는 집에서 공부하느라 힘들고, 중학교 입학식도 못 치른 외손자, 학교 개학 연기된 초5 외손녀, 초2손자는 종일 게임하느라 바쁘고, 유치원 손녀는 유치원 가고 싶다고 난리란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아이구, 손자손녀들이 학교에 가야 내 자식들이 덜 힘든데 (301)




큰 아들 걱정을 해서인지 다시 배가 아프다. 신경성인가보다. 정신을 차리기로 했다. 내가 아파서 입원하면 작은 아들이 고생하고 돈이 들어간다. 큰 아들 걱정한다고 작은 아들 고생시키면 안 되지. 마음을 독하게 먹고 밥을 했다. 아무 탈 없이 검사 결과가 나왔으면 좋겠다. (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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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2-04 00: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꾸준함이 얼마나 큰 힘인데 말이죠. ~ 마지막 문장 할머니의 자식걱정에 울컥하네요. 왜 그리 아파도 참으시는지 ㅠㅠ

얄라알라 2022-02-04 08:23   좋아요 2 | URL
mini74님. 할머니의 큰 아드님이 대학 시간 강사인지라 자식들 중 가장 빈곤하게 살거든요. 그래서 맞벌이하는 둘째네가 할머니 편찮으시면 돈을 많이 쓰게 될 텐데, 그것까지 염려해서 몸 챙기시는 할머니 마음에 저도 맘으로 울면서 읽었네요...

아프셔서 우울한 마음이 할머니 일기 종종 드러나는데,
조금이라도 덜 아플 때 더 많이 읽고 써요. 우리.^^

psyche 2022-02-04 02: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밑줄 친 문자에 울컥했어요. 예전에는 엄마들이 왜 그러는지 몰랐는데 저도 이제 점점 그렇게 되어 가네요. ㅜㅜ

2022-02-04 08: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2-04 13: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2-04 13: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22-02-04 16:4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뽑으신 글만 봐도 체험적 글로 느낄 수 있네요. 살아 있는 글이랄까요.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만 산 저는 농촌의 얘기를 낯설게 느낄 수도 있겠으나
독서를 통한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검색해 보겠습니다.^^

얄라알라 2022-02-05 06:49   좋아요 1 | URL
페크님, 도시에서만 살아오셨군요?^^
이 책 읽으며 농촌 마을 단위의 삶에서 ‘숟가락 갯수‘까지 서로 세는 삶의 장단점을 생각했어요. 코로나 때문에 한국 사회도 가족친족 관계의 끈끈함과 여러 의무들이 많이 약화되었지요. 이 또한 장단점이 있을터인데, 전 홀가분해진 게 더 좋더라고요.

제가 올린 사진말고 실제 표지가 더 예뻐요^^ 혹 기회되신다면 즐독하시리라 믿습니다!

Meta4 2022-02-06 03: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장바구니에 키핑합니다. 농촌 배경 소설에 관심이 많아, 찾아 읽는 편인데.. 그리고 쓰고 싶은 리뷰를 만지작 거리던 중인데.. 읽고 함께 얘기해볼게요.

얄라알라 2022-02-06 03:45   좋아요 0 | URL
Meta4님 반갑습니다.
저는 농촌 배경 소설을 따로 찾아 읽거나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 소설, 푹 빠져 읽었기에 리뷰를 올렸네요. 작성 중이신 리뷰가 어떤 작품에 대한 걸까, 서재 찾아뵙도록 할게요.

저는 [산 사람을 살지]읽으며, 주인공 할머니 ˝기분˝의 둘째 아드님, 극진한 효성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저만 ‘평균치‘를 다르게 보는가, 제 야박한 시선을 반성하기도 했고요. 동시에 ˝기분˝ 할머니를 비롯, 이 소설에 등장하는 많은 할머니들은 특히나 자녀의 효/불효에 따라 삶의 질(?)이 크게 갈리는 것을 보고, 농촌적 삶의 특징일까? 김종광 작가의 세계관인걸까? 얕은 호기심도 품어보았습니다. Meta4님께서도 관심 두신 부분이면 함께 이야기해보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