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파리 - 정지돈의 20세기 파리 다시 쓰기 FoP Classic
쥘 베른 지음, 김남주 옮김 / 알마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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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는 자신의 묘비명을 남기지 않는다. 『20세기 파리』의 마지막 장면인, 수많은 현재의 죽음을 기리는 부분에서 작가는 쥘 베른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 부분이 나에게 꽤나 흥미로웠다. 실존 인물들을 애써 기억하려고 이름을 나열하지만, 정작 자신이 들어갈 자리는 없다는 것이 말이다. 물론 이 작품이 쥘 베른이 과학 소설을 시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초창기의 것이라고 해도, 자신의 이름이 기억될 기회를 주지 않은 것은 사뭇 자조적이다. 물론, 시가 멸종한 시대에 시를 쓰려고 하며 사라진 시대의 문인과 음악가들을 찬미하는 주인공 미셸이야말로 베른 자신의 초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한 열정의 소유자도 추위 속에 사그라지는 운명이 서글프다.


 19세기의 격변하는 시대에 쥘 베른은 100년 후의 미래를 상상했다. 그리고 작품이 쓰인 지 15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그의 예측이 어느 정도 들어맞았다. 몇 가지 구절은 섬뜩할 정도이다. "사람들의 바쁜 듯한 태도, 서두르는 몸짓, 미국인들 같은 성급함을 보면, '자본의 악마'가 휴식도 감사도 허락하지 않고, 그들을 끊임없이 앞으로 떠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는 구절은 실로 정확했다. 과학 기술의 발전은 사람들의 안식은 커녕 빠른 속도에 자신을 내맡긴다. 뛰어가는 것으로도 모자라, 버스와 지하철, 자동차와 비행기에 몸을 던지지 않으면 뒤처지는 존재가 된다. 보험과 저축 제도가 어느 때보다 발달했지만, 안정적인 생활에 대한 불안은 어느 때보다 크다. 그렇기에 마음은 점점 '실용적'으로 변한다. 효율과 이익이 발생하지 않으면, 그것의 가치는 전혀 인정받지 못한다. 마치 미셸을 비난하는 탁월한 실용주의 가족처럼, 모든 것의 쓸모를 따진다. 


 빅토르 위고, 뒤마 등의 대문호들이 한 세기만에 잊혀지고, 실용적인 제목의 책들과 시들이 유행하는 것은 꽤 유쾌하다. 한편으로는 씁쓸한 마음도 든다. 이제 사람들은 책도 읽지 않기 때문이다. 베른은 자신이 예견한 미래의 암울한 면이 확대되는 모습을 보고 얼마나 통탄해 할까? 마침내 인간조차 실용적인 면으로 분석되어, 제 몫을 다하지 않으면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존재로 인식되는 세상이다. "오늘날에는 여러 분야에서 기계가 훨씬 유리한 조건으로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고 있었다"는 구절에서 우리는 절망을 느낀다. 일평생을 가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 끝에는 극복할 수 없는 인간과 기계의 차이가 있다. 신체적 역량과 기술적 탁월함에서 기계에게 밀린다면, 무엇이 나의 인간됨을 보장할까? 쥘 베른은 사랑과 연대의 가능성을 암시하지만, 뤼시와의 사랑 역시 이루어지지 못한다. 젊은이의 열정은 강추위 속에 그대로 매장된다. 


 많은 것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아마 21세기가 끝날 즈음에는, 기존의 가치관과 사상은 완전히 옛 것이 되리라. 어쩌면 나는 지금의 세상조차 '사라진 시대'로 분류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더 이상 돌아볼 필요도 없는, 차라리 잊어버리는 것이 나은 세상 말이다. 그렇게 시대는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다. 아니, 달려가는 것은 속도에 뒤처진다. 유례 없는 진보로 솟구쳐 오르는 로켓 또는 다시 떠오를 수 없는 잠수함에 탑승한 상태다. 이 시대에 개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대단한 능력보다는 살아가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 어떻게 이 세상을 견뎌내야 하는지는 각자에게 달린 것이다. 어떠한 지식도, 다른 누군가의 조언도 생존을 장담하기 어렵다.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설령 모두에게 구식이라고 비난을 받는다 해도, 미셸과 위그냉은 자신의 신념을 지켰다. 사라진 시대의 독자들이여, 다가올 미래를 떠올려 보자. 그 끝에서 당신은 어떤 표정으로 서 있을까?

"자신의 글을 써서는 안 된다는 거야!"
"그건 왜죠, 삼촌?"
"그건 말이다, 얘야, 책을 읽다 보면 이 위대한 작가들을 본받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되거든."
"그게 왜 나쁜가요?" 청년이 분개해서 소리쳤다.
"길을 잃게 되거든." - P173

과학은 벼락을 다스리고 거리를 뛰어넘고 시간과 공간을 여유 있게 넘나들고 신비한 자연의 힘을 통제하고 우주를 지배하는 듯했지만 추위라는 무적의 강적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 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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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지 위의 집
루이즈 글릭 지음, 정은귀 옮김 / 시공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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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야생 붓꽃』이라는 시집이 인상 깊어 다른 작품을 찾아보았다. 과연, 자연물을 이용한 심상 묘사에 탁월하다. 영어시를 번역하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문학에 대한 열정이 세상을 바꾸는 가능성을 조금이나마 엿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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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 - 보급판
칼 세이건 지음, 홍승수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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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 시대마다 대표적인 교양 서적이 있는 것 같다. 2000년대 초반에는 재레드 다이아몬드『총, 균, 쇠』가 있었고, 최근에는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가 그렇다. 아마 시간이 조금 흐르고 나면 기준이 되는 도서도 바뀌겠지만, 2018년 당시 『사피엔스』를 처음 읽었을 때 받은 신선한 충격과 좋은 인상은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을 보아, 2010년대를 대표하는 베스트셀러들 중 하나에 당당히 이름을 올릴 만하다. 그리고 불현듯 나는 그 이전에 필수 교양이었던 『코스모스』를 떠올렸다. 그리고 이 방대한 분량의 서적을 펼치는 순간, 생각 이상으로 놀라운 여정이 날 기다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원래 이 책은 방송 원고에 기반하여 작성되었고, 그 덕분인지 풍부한 시각 자료들이 이해를 도왔다. 그래서 나는 한결 편하게 칼 세이건이 이끄는 코스모스 이야기에 귀 기울일 수 있었다. 


 왜 공간으로서의 우주(space)도, 세계로서의 우주(universe)도 아닌 코스모스(cosmos)인가? 그것은 이 우주를 이끄는 원리가 균형과 조화이며, 여전히 우주는 거대한 질서 아래에서 운행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인간은 분명 『코스모스』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이다. 어쩌면 우주 공간에 남아 있는 지적 생명체는 인간이 유일할 수도 있기에, 우주적 관점에서 지구는 지극히 작고 연약한 행성이지만, 그곳의 거주민들은 특별한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사피엔스가 있기 전부터 코스모스는 존재했다. 그리고 인류의 시대가 지난 후에도 그것은 존속할 것이다. 코스모스 이전의 모습, 코스모스 이후의 세계는 이 책에서 다룰 주제가 아니다. 지금 펼쳐진 무한에 가까운 우주 공간, 그리고 바로 옆(이라고 표현했지만, 수천만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에 있는 행성들에 대해 알아보는 것도 인류에게는 커다란 숙제이기 때문이다. 


 『사피엔스』와 잠깐 비교해 보자면, 아무래도 시대의 관심사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칼 세이건이 염려한 것은 자기 파멸의 가능성이었다. 핵무기의 가공할 파괴력과 우주 탐사선의 원동력은 동일하다. 인간의 의지가 어디로 향하느냐에 따라 문명의 여정은 종말을 고할 수도,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유발 하라리도 비슷한 측면에서 접근하지만, 그 소재는 사뭇 다르다. 그는 인공지능이 낳게 될 새로운 인류에 대해 탐구했다. 어쩌면 세상을 떠난 물리학자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인류보다 뛰어난 지성'은 이미 탄생했는지도 모른다. 다른 어떤 공간도 아닌, 작은 컴퓨터 속에서 말이다. 사피엔스도, 코스모스도 시간의 연장선 상에 있다. 그것에게 현재, 과거, 미래의 기준점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피엔스는 단지 진화할 뿐이며, 코스모스는 계속 흘러갈 뿐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무수히 많은 질서가 파괴되고, 또 새로 세워진다. 이 놀라운 신비를 잊고 살기에는 이 우주가 너무나 아름답다.


 <인터스텔라>라는 영화에서 우주 연구에 대한 지원이 멈춘 까닭이 '지구에서의 삶'이 더 중요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라는 언급이 나온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과학자들이 세운 계획 두 개(지구를 포기하는 대신 대안이 될 수 있는 행성으로 이주하거나 정거장을 세우는 일)가 동시에 실현되는 결말을 통해, 미지의 세계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더불어, 중력 방정식을 풀게 해준 장본인이 곧 미래의 인류라고 암시함으로써 끊임없이 그 희망을 다음 세대에 넘겨야 한다고 말한다. 아무리 지금의 세상에 희망이 남아 있지 않는 것 같아도, 칼 세이건이 예측했듯이, 코스모스는 계속될 것이다. 불확실한 시간과 공간에 대해 무작정 낙관하거나 비관기보다 정확한 분석과 기술로 그 질서의 흐름에 동참해야 한다. 우리의 작은 말과 행동 하나하나도 우주의 균형의 일부이니까.


 거대한 이야기는 있는 그대로 남겨놓아야 한다. 나는 우리가 쓰레기를 길거리에 버리는 행위나, 반대로 물을 아껴쓰는 습관이 세상을 결정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일상의 소중함은 그 자리에 머무를 때 가치를 지닌다. 인간은 코스모스를 조율할 만큼 현명하지도, 강력하지도 않다.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다스릴 수 있는 여유가 있을 때, 비로소 다음의 세상으로 향하는 문이 열린다. 여전히 우주는 팽창하고 있고, 빛의 한계를 넘어서기에 우리는 너무나 느려 보인다. 하지만 사피엔스는 코스모스와 비례하는 존재이다. 코스모스의 시간과 공간이 확장되는 속도에 사피엔스는 맞추어 간다. 아니, 어쩌면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이 보잘 것 없고 스러질 육신이 담고 있는 정신은 모든 우주를 품을 만큼 거대하다. 작음 속에 위대함이 숨어 있고, 위대함 속에 작음이 담겨 있다. 이것이 코스모스가 보여준 신비한 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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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때와 죽을 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6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지음, 장희창 옮김 / 민음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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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은 망각의 반대편에 서 있다. 잊힘은 두려움의 대상이다. 누구나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싶어 한다. 죽음은 망각으로의 지름길이기에, 그것을 피하고자 하는 욕망은 당연한 것이다. 전방의 최전선에서 매일의 죽음을 목격하는 병사에게 간만의 휴가란 얼마나 달콤할까! 선전 속에서 늘 승리하는 조국의 품에 돌아가는 것, 아니 솔직해지자면 2년 만에 가족을 볼 수 있다니, 그래버가 느낄 환희란 엄청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파괴된 고향과 실종된 부모였다. 그의 가족은 전쟁의 폭격 속에서 소실된다. 이야기가 경과되면서 그래버의 가족도, 그래버 본인도 망각의 물결에 휩쓸린다. 누가 그들을 기억해 줄까? 


 나는 유럽 문학이 너무도 좋다. 돌이켜 보면, 내가 문학을 사랑하기 시작한 계기도 유럽 작가의 소설들이었다. 영국의 조지 오웰, 프랑스의 카뮈와 생텍쥐페리, 아일랜드의 제임스 조이스, 포르투갈의 주제 사라마구 등이 떠오른다. 어렸을 때 읽었던 레마르크의 『개선문』이 준 인상이 여전히 선명하다. 전쟁 속에서도 꽃피우는 사랑은 늘 강렬한 느낌을 준다. 역경을 뚫고 희망을 꿈꾸는 것은 그 자체로 멋진 일이다. 레마르크가 독일 작가였다는 사실은 이번 작품을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반전 소설의 대가인 것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나치 세력으로부터 탄압을 받고 국적을 박탈당했다는 사실 역시 『사랑할 때와 죽을 때』를 통해 알게 되었다. 


 이 소설의 줄거리와 전개는 여느 전쟁 소설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전선에서 벌어지는 전투의 생생한 묘사는 레마르크의 특기이며, 그로 인해 상실되는 인간성과 참혹함은 많은 전쟁 문학에서 봐 왔던 것이다. 그들은 인류의 역사를 통째로 바꾸어놓은 전쟁의 한복판에 고립되어 있음을 알지 못한다. 그리하여 나에게 기억에 남는 부분은 중간 장면들이었다.『사랑할 때와 죽을 때』의 구성은 '러시아-독일-러시아'로 이루어져 있는데, 오히려 그래버를 절망과 위기에 몰아넣는 공간은 전장 한복판이 아닌 그의 고향 일대이다. 특히 엘리자베스와 결혼을 작정한 그래버가 그녀의 아버지가 수용소에 있다는 사실이 들통날까 봐 노심초사하는 부분은 전쟁이 다른 나라뿐만 아니라 독일의 시민들까지 불행하게 만들었음을 보여준다. 히틀러의 독재 체제는 독일 군인들과 국민들을 가해자로 만드는 동시에 피해자로 바꾸었다. 그들은 서로를 불신하고 비밀 경찰에 폭로하며 전국민적 세뇌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불편한 진실까지 고발하는 것이 반전 문학의 의무임을 생각한다면, 레마르크는 제 역할에 충실한 셈이다.


 나는 이 소설을 삶과 망각 사이를 누비는 그래버의 여정으로 받아들였다. 그에게 삶이란 언제 끝나도 이상하지 않은 위태로운 순간의 연속이자,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가치였다. 그는 부모님의 존재를 기억해야 했고, 파괴된 옛 집을 간직해야 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와의 사랑을 통해 미래를 기약하고 싶었다. 전쟁에서 돌아왔을 때 아무도 그를 기억해주지 않는다면, 그 모든 수고가 무슨 보람이란 말인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겠지만, 조국의 영광이니 총통의 인정 따위는 아무렴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엘리자베스가 그래버에게 아이를 낳자고 설득하는 부분은 이 소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들 중 하나인데, 여기에서도 그녀의 숨은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아기라고! 우리가 이 전쟁에 적응한 것처럼 그 애도 자라면서 새로운 전쟁을 맞이하게 될 테지. 그 애가 태어날 세상이 얼마나 비참할지 한번 생각해 봐. (…) 평화로운 시대라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지금까지 거기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우리 주위는 온통 황폐해졌고 대지는 오랫동안 독으로 가득할 거야. 그런데 어떻게 어린애를 가질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바로 그래서 필요한 거예요."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왜?" 

 "애들을 그런 환경에 맞서 싸우도록 교육하기 위해서죠. 만일 현재와 같은 사태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모두 아이를 낳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야만스러운 사람들만 아이를 낳게 된다면 어찌 되겠어요? 그렇게 된다면 누가 이 세상에서 정의를 다시 실현할 수 있겠어요?" (p. 478~479)


 논쟁적인 주제에 대해 엘리자베스는 확고한 입장을 띤다. 그리고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그래버를 기억하고자 하는 의지도 숨어 있다. 이번에 휴가가 끝나서 전장으로 떠나면 부모님을 잃은 그래버를 누구도 기억할 수 없다. 엘리자베스가 기억하지 않겠냐고? 하지만 죽음은 너무나 가혹한 것이어서, 남아 있는 자를 과거에 남겨두기만 할 뿐이다. 그녀는 그래버의 자식을 낳음으로써 그를 기억하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훗날 그 아이가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였는지, 지금은 어디 있는지 물었을 때, 자연스럽게 전쟁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엘리자베스의 기억 방식은 아주 대담하고 거친 일이다. 그러나 그녀는 망각 대신 삶을 택했다. 그래버가 자신을 지켜주기 위해 노력했듯이, 엘리자베스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를 지켜준다. 


 기억하는 일은 단순히 지식과 정보를 간직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존재를 지금의 삶에 끌어들이려는 빠듯한 노력이다. 나는 그래버와 엘리자베스 부부처럼 전쟁을 겪은 사람도 아니고, 큰 상실을 겪은 적도 없다. 그렇지만 누군가의 인생을 기억해야 하는 책임감을 느낀다. 자신을 위해서라도, 타인을 위해서라도, 기억의 행위는 아주 중요한 일이다. 그 기억이 지금 내 삶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 돌이켜 볼까? 아, 우리는 기억으로 구성된 존재임을 잊고 있었나 보다. 제목은 바뀌어야 마땅하다. 기억과 잊힘 사이를 누비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다. 나의 마음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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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의 딸 조지 오웰 소설 전집 (무선)
조지 오웰 지음, 이영아 옮김 / 현암사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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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어가는 불씨에 숨을 불어넣는 일은 정녕 무익한가? 그것이 언젠가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모든 노력이 잿더미로 돌아갈 것을 알면서도 누군가는 그 일을 계속한다. 세상은 묵묵히 작업하는 이들에 의해 작동된다. 하지만 누구도 그 실체를 파악하지 못하겠지. 여기 한 신부의 딸이 있다. 도러시 헤어라는 이 젊은 처녀는 성 애설스턴 교회의 담임 사제인 찰스 헤어의 외동딸이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교회에서 벌이는 구호 활동이나 소규모 모임을 주도하는 한편, 교회를 관리하고 신부인 아버지를 모시고 살고 있다. 교구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기에 가족은 언제나 재정적인 어려움에 시달린다. 그래도 도러시는 꿋꿋이 맡은 바를 해낸다. 


 그랬던 그녀가 별안간 기억을 잃고 런던 한복판에 떨어진다. 신문을 보니 '신부의 딸'이라 불리는 도러시 자신이 워버턴 씨와 사랑의 도피를 했다는 소문이 퍼져 있다. 낯선 곳에 던져지고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해야 하는 도러시의 상황에 감정을 이입하면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지만, 이러한 장르의 매체를 워낙 많이 접한 독자들에게는 흥미로운 이야기의 시작일 뿐이다. 소설이 쓰여진 당시 간혹 존재했다는 단기 기억상실증은 앞으로 그녀에게 어떤 모험이 펼쳐질까, 라고 기대하게 만든다. 당장의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도러시는 노비 일행과 함께 홉 농장에서 노동을 하며 돈을 번다. 이러한 생활에 만족하던 찰나에, 노비는 도둑질로 인해 잡혀가고 그녀는 런던으로 돌아간다. 


 이번에 도러시에게는 새로운 과업이 주어진다. 링우드 기숙학교의 교사로 채용되어, 도무지 수업에 관심이 없는 아이들을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처음에 그녀는 아이들의 무지를 개선하고 예절을 주입해야겠다는 야심찬 기대로 수업을 주도한다. 아이들도 그녀의 색다른 수업 방식에 동화되어 적극적으로 따른다. 하지만 교장인 크리비 부인의 개입과 학부모들의 원성을 받아 수업 방식을 바꿔야 했고, 예전과 똑같은 수업에 지루함을 느낀 학생들은 점점 도러시에게 반항한다. 어디에도 편이 없던 도러시는 결국 아이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크리비 부인은 이용 가치가 사라진 그녀를 가차없이 해고한다. 갈 곳 없는 그녀에게 불현듯 평판이 회복되는 기회가 마련되어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온다. 도러시가 없던 교회는 엉망이 되어 있었고, 그녀는 다시 하던 일을 계속한다. 변화가 있다면, 그녀에게 더 이상 신앙이 남아 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책을 끝으로 조지 오웰의 여섯 편의 장편소설을 다 읽은 나로서는, 『신부의 딸』이 조지 오웰의 소설들에 나타난 요소들이 잘 배치된 작품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첫 번째 소설인 『버마 시절』에서 보여준 왜곡된 사랑이 이번에는 여자의 시점으로 제시되고, 『엽란을 날리게 하라』에 담긴 강박에 가까운 심리 묘사가 꽤 잘 드러나 있다. 『숨 쉬러 나가다』처럼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주인공이 모험을 떠나고 고향에 돌아왔을 때, 그 충격적인 변화가 담겨 있다. 그리고 조지 오웰을 상징하는 두 작품, 『동물 농장』과 『1984』에 나타난 날카로운 문제 의식과 인간 본질에 대한 탐구가 도러시의 모험 속에 함축되어 있다. 기억을 잃고 고향을 상실한 도러시는 필연적으로 낯선 존재들과 교류해야 한다. 어떤 이들은 호의로, 어떤 이들은 적의로 대했고 도러시는 그 사이에서 자신을 지켜내야 했다. 교구 안의 세상에 스스로를 가두었던 도러시에게 워버턴 씨와의 추문은 모험의 기회를 제공했고, 많은 가치관의 변화를 이끌어 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험을 떠나기 전과 후의 살아가는 방식이 변함없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나에게도, 도러시에게도 가장 인상적인 체험은 링우드 기숙학교에서의 경험이었을 것이다. 오웰은 3부에서 도러시가 동료의 도움 없이 스스로 생활을 이어나가고, 교육직을 맡아본 적도 없는 그녀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을 천직이라고 여기는 모습을 묘사한다. 그리고 이것은 도러시가 반복적으로 해 왔던 교구 일의 영향 때문이기도 하다. 그녀는 늘 집안일에, 교구 일에 무관심한 아버지를 대신해 모든 일을 떠맡았고, 그 사이에서 소외되고 결핍된 이들을 돌보아 왔다. 도러시는 누군가를 섬기는 일이 습관화되어 있었고 그래서 홉을 따는 일,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도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꿋꿋이 견딜 수 있었다. 그녀가 기숙학교의 아이들에게 특히 충격을 받은 부분은 이러한 것이었다.


 더 큰 문제가 있었으니, 아이들은 아는 것이 없을뿐더러, 질문을 받는 것에 익숙지 않아 도통 대답을 하려 들지 않았다. 모든 걸 기계적으로 배운 탓에 스스로 생각해보라고 하면 당황해서 멍하니 입만 벌리고 있었다. 하지만 배우려는 의지는 있어 보였고, '좋은' 학생이 되려고 마음먹은 듯했다. (p.308)

 

 도러시의 교육 방식은 지도를 보여주며 세계 지리를 가르치고, 문학을 교육에 활용하여 아이들이 암기가 아닌 흥미 위주로 학습하게 하는 것이었다. 처음에 이것은 효과가 있었지만, 일종의 금기어가 아이들의 입으로 나오게 되었고, 학부모들은 발칵 뒤집혀 크리비 부인과 도러시를 질책한다. 당연히 교장은 그녀를 제지했고, 신입 교사는 현실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은 이토록 기대와 좌절을 수반하는 것임을, 그녀는 절실히 깨달는다. 


 확실히 이 작품은 조지 오웰의 초기 소설이 가지고 있는 분명한 단점들을 상당히 상쇄했다. 작가는 흥미로운 소재 및 치열한 묘사, 경험을 녹여낸 글쓰기로 한 편의 멋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었다. 그렇지만 의문점은 남는다. 왜 도러시는 기억을 잃어야 했을까? 본인의 의지로는 도저히 이 현실을 떠날 수 없었기 때문일까? 독자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도러시와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엄청난 공포에 시달리지 않을까. 물론 도러시가 떠난 일련의 여정이 그녀 인생에 가치 있는 시간이었지만, 이후의 삶에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한다면, 그것이 정말로 가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확실히 여러 가지 질문이 떠오르는 접근이었다. 


 도러시의 인생 여정에서 기억을 잃은 시간들은 무익한 시간이 아니었다. 기억을 잃은 이후 고향에 돌아오기까지의 꿈 같은 시간은 하나의 모험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그 과정들로 인해 도러시는 동일한 일을 하고 있지만, 부재한 신앙심으로 살아간다. 다른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 그녀의 삶에는 전혀 변화가 없다고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녀는 경건한 마음으로 몰두"한다. 항상 신부의 딸로, 누군가의 신붓감으로, 교구 사람들의 이야깃거리로 존재했던 도러시는 마침내 자기 자신의 삶을 되찾는다. 그녀의 선언은, 종교의 이름 아래 인내를 강요하고 억압을 정당화하는 사람들에 대한 묵묵한 저항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때가 되면 그녀의 삶은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 것이다. 그때의 도러시는 기억을 잃지 않아도 어디로 가야 할지 알고 있는 사람이 되어 있겠지. 우리가 할 일은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일뿐이다. 그래도 삶은 계속되어야 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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