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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의 딸 ㅣ 조지 오웰 소설 전집 (무선)
조지 오웰 지음, 이영아 옮김 / 현암사 / 2023년 2월
평점 :
죽어가는 불씨에 숨을 불어넣는 일은 정녕 무익한가? 그것이 언젠가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모든 노력이 잿더미로 돌아갈 것을 알면서도 누군가는 그 일을 계속한다. 세상은 묵묵히 작업하는 이들에 의해 작동된다. 하지만 누구도 그 실체를 파악하지 못하겠지. 여기 한 신부의 딸이 있다. 도러시 헤어라는 이 젊은 처녀는 성 애설스턴 교회의 담임 사제인 찰스 헤어의 외동딸이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교회에서 벌이는 구호 활동이나 소규모 모임을 주도하는 한편, 교회를 관리하고 신부인 아버지를 모시고 살고 있다. 교구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기에 가족은 언제나 재정적인 어려움에 시달린다. 그래도 도러시는 꿋꿋이 맡은 바를 해낸다.
그랬던 그녀가 별안간 기억을 잃고 런던 한복판에 떨어진다. 신문을 보니 '신부의 딸'이라 불리는 도러시 자신이 워버턴 씨와 사랑의 도피를 했다는 소문이 퍼져 있다. 낯선 곳에 던져지고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해야 하는 도러시의 상황에 감정을 이입하면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지만, 이러한 장르의 매체를 워낙 많이 접한 독자들에게는 흥미로운 이야기의 시작일 뿐이다. 소설이 쓰여진 당시 간혹 존재했다는 단기 기억상실증은 앞으로 그녀에게 어떤 모험이 펼쳐질까, 라고 기대하게 만든다. 당장의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도러시는 노비 일행과 함께 홉 농장에서 노동을 하며 돈을 번다. 이러한 생활에 만족하던 찰나에, 노비는 도둑질로 인해 잡혀가고 그녀는 런던으로 돌아간다.
이번에 도러시에게는 새로운 과업이 주어진다. 링우드 기숙학교의 교사로 채용되어, 도무지 수업에 관심이 없는 아이들을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처음에 그녀는 아이들의 무지를 개선하고 예절을 주입해야겠다는 야심찬 기대로 수업을 주도한다. 아이들도 그녀의 색다른 수업 방식에 동화되어 적극적으로 따른다. 하지만 교장인 크리비 부인의 개입과 학부모들의 원성을 받아 수업 방식을 바꿔야 했고, 예전과 똑같은 수업에 지루함을 느낀 학생들은 점점 도러시에게 반항한다. 어디에도 편이 없던 도러시는 결국 아이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크리비 부인은 이용 가치가 사라진 그녀를 가차없이 해고한다. 갈 곳 없는 그녀에게 불현듯 평판이 회복되는 기회가 마련되어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온다. 도러시가 없던 교회는 엉망이 되어 있었고, 그녀는 다시 하던 일을 계속한다. 변화가 있다면, 그녀에게 더 이상 신앙이 남아 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책을 끝으로 조지 오웰의 여섯 편의 장편소설을 다 읽은 나로서는, 『신부의 딸』이 조지 오웰의 소설들에 나타난 요소들이 잘 배치된 작품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첫 번째 소설인 『버마 시절』에서 보여준 왜곡된 사랑이 이번에는 여자의 시점으로 제시되고, 『엽란을 날리게 하라』에 담긴 강박에 가까운 심리 묘사가 꽤 잘 드러나 있다. 『숨 쉬러 나가다』처럼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주인공이 모험을 떠나고 고향에 돌아왔을 때, 그 충격적인 변화가 담겨 있다. 그리고 조지 오웰을 상징하는 두 작품, 『동물 농장』과 『1984』에 나타난 날카로운 문제 의식과 인간 본질에 대한 탐구가 도러시의 모험 속에 함축되어 있다. 기억을 잃고 고향을 상실한 도러시는 필연적으로 낯선 존재들과 교류해야 한다. 어떤 이들은 호의로, 어떤 이들은 적의로 대했고 도러시는 그 사이에서 자신을 지켜내야 했다. 교구 안의 세상에 스스로를 가두었던 도러시에게 워버턴 씨와의 추문은 모험의 기회를 제공했고, 많은 가치관의 변화를 이끌어 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험을 떠나기 전과 후의 살아가는 방식이 변함없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나에게도, 도러시에게도 가장 인상적인 체험은 링우드 기숙학교에서의 경험이었을 것이다. 오웰은 3부에서 도러시가 동료의 도움 없이 스스로 생활을 이어나가고, 교육직을 맡아본 적도 없는 그녀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을 천직이라고 여기는 모습을 묘사한다. 그리고 이것은 도러시가 반복적으로 해 왔던 교구 일의 영향 때문이기도 하다. 그녀는 늘 집안일에, 교구 일에 무관심한 아버지를 대신해 모든 일을 떠맡았고, 그 사이에서 소외되고 결핍된 이들을 돌보아 왔다. 도러시는 누군가를 섬기는 일이 습관화되어 있었고 그래서 홉을 따는 일,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도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꿋꿋이 견딜 수 있었다. 그녀가 기숙학교의 아이들에게 특히 충격을 받은 부분은 이러한 것이었다.
더 큰 문제가 있었으니, 아이들은 아는 것이 없을뿐더러, 질문을 받는 것에 익숙지 않아 도통 대답을 하려 들지 않았다. 모든 걸 기계적으로 배운 탓에 스스로 생각해보라고 하면 당황해서 멍하니 입만 벌리고 있었다. 하지만 배우려는 의지는 있어 보였고, '좋은' 학생이 되려고 마음먹은 듯했다. (p.308)
도러시의 교육 방식은 지도를 보여주며 세계 지리를 가르치고, 문학을 교육에 활용하여 아이들이 암기가 아닌 흥미 위주로 학습하게 하는 것이었다. 처음에 이것은 효과가 있었지만, 일종의 금기어가 아이들의 입으로 나오게 되었고, 학부모들은 발칵 뒤집혀 크리비 부인과 도러시를 질책한다. 당연히 교장은 그녀를 제지했고, 신입 교사는 현실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은 이토록 기대와 좌절을 수반하는 것임을, 그녀는 절실히 깨달는다.
확실히 이 작품은 조지 오웰의 초기 소설이 가지고 있는 분명한 단점들을 상당히 상쇄했다. 작가는 흥미로운 소재 및 치열한 묘사, 경험을 녹여낸 글쓰기로 한 편의 멋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었다. 그렇지만 의문점은 남는다. 왜 도러시는 기억을 잃어야 했을까? 본인의 의지로는 도저히 이 현실을 떠날 수 없었기 때문일까? 독자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도러시와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엄청난 공포에 시달리지 않을까. 물론 도러시가 떠난 일련의 여정이 그녀 인생에 가치 있는 시간이었지만, 이후의 삶에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한다면, 그것이 정말로 가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확실히 여러 가지 질문이 떠오르는 접근이었다.
도러시의 인생 여정에서 기억을 잃은 시간들은 무익한 시간이 아니었다. 기억을 잃은 이후 고향에 돌아오기까지의 꿈 같은 시간은 하나의 모험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그 과정들로 인해 도러시는 동일한 일을 하고 있지만, 부재한 신앙심으로 살아간다. 다른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 그녀의 삶에는 전혀 변화가 없다고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녀는 경건한 마음으로 몰두"한다. 항상 신부의 딸로, 누군가의 신붓감으로, 교구 사람들의 이야깃거리로 존재했던 도러시는 마침내 자기 자신의 삶을 되찾는다. 그녀의 선언은, 종교의 이름 아래 인내를 강요하고 억압을 정당화하는 사람들에 대한 묵묵한 저항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때가 되면 그녀의 삶은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 것이다. 그때의 도러시는 기억을 잃지 않아도 어디로 가야 할지 알고 있는 사람이 되어 있겠지. 우리가 할 일은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일뿐이다. 그래도 삶은 계속되어야 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