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파리 - 정지돈의 20세기 파리 다시 쓰기 FoP Classic
쥘 베른 지음, 김남주 옮김 / 알마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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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는 자신의 묘비명을 남기지 않는다. 『20세기 파리』의 마지막 장면인, 수많은 현재의 죽음을 기리는 부분에서 작가는 쥘 베른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다. 그 부분이 나에게 꽤나 흥미로웠다. 실존 인물들을 애써 기억하려고 이름을 나열하지만, 정작 자신이 들어갈 자리는 없다는 것이 말이다. 물론 이 작품이 쥘 베른이 과학 소설을 시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초창기의 것이라고 해도, 자신의 이름이 기억될 기회를 주지 않은 것은 사뭇 자조적이다. 물론, 시가 멸종한 시대에 시를 쓰려고 하며 사라진 시대의 문인과 음악가들을 찬미하는 주인공 미셸이야말로 베른 자신의 초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한 열정의 소유자도 추위 속에 사그라지는 운명이 서글프다.


 19세기의 격변하는 시대에 쥘 베른은 100년 후의 미래를 상상했다. 그리고 작품이 쓰인 지 15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그의 예측이 어느 정도 들어맞았다. 몇 가지 구절은 섬뜩할 정도이다. "사람들의 바쁜 듯한 태도, 서두르는 몸짓, 미국인들 같은 성급함을 보면, '자본의 악마'가 휴식도 감사도 허락하지 않고, 그들을 끊임없이 앞으로 떠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는 구절은 실로 정확했다. 과학 기술의 발전은 사람들의 안식은 커녕 빠른 속도에 자신을 내맡긴다. 뛰어가는 것으로도 모자라, 버스와 지하철, 자동차와 비행기에 몸을 던지지 않으면 뒤처지는 존재가 된다. 보험과 저축 제도가 어느 때보다 발달했지만, 안정적인 생활에 대한 불안은 어느 때보다 크다. 그렇기에 마음은 점점 '실용적'으로 변한다. 효율과 이익이 발생하지 않으면, 그것의 가치는 전혀 인정받지 못한다. 마치 미셸을 비난하는 탁월한 실용주의 가족처럼, 모든 것의 쓸모를 따진다. 


 빅토르 위고, 뒤마 등의 대문호들이 한 세기만에 잊혀지고, 실용적인 제목의 책들과 시들이 유행하는 것은 꽤 유쾌하다. 한편으로는 씁쓸한 마음도 든다. 이제 사람들은 책도 읽지 않기 때문이다. 베른은 자신이 예견한 미래의 암울한 면이 확대되는 모습을 보고 얼마나 통탄해 할까? 마침내 인간조차 실용적인 면으로 분석되어, 제 몫을 다하지 않으면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존재로 인식되는 세상이다. "오늘날에는 여러 분야에서 기계가 훨씬 유리한 조건으로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고 있었다"는 구절에서 우리는 절망을 느낀다. 일평생을 가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 끝에는 극복할 수 없는 인간과 기계의 차이가 있다. 신체적 역량과 기술적 탁월함에서 기계에게 밀린다면, 무엇이 나의 인간됨을 보장할까? 쥘 베른은 사랑과 연대의 가능성을 암시하지만, 뤼시와의 사랑 역시 이루어지지 못한다. 젊은이의 열정은 강추위 속에 그대로 매장된다. 


 많은 것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아마 21세기가 끝날 즈음에는, 기존의 가치관과 사상은 완전히 옛 것이 되리라. 어쩌면 나는 지금의 세상조차 '사라진 시대'로 분류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더 이상 돌아볼 필요도 없는, 차라리 잊어버리는 것이 나은 세상 말이다. 그렇게 시대는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다. 아니, 달려가는 것은 속도에 뒤처진다. 유례 없는 진보로 솟구쳐 오르는 로켓 또는 다시 떠오를 수 없는 잠수함에 탑승한 상태다. 이 시대에 개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대단한 능력보다는 살아가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 어떻게 이 세상을 견뎌내야 하는지는 각자에게 달린 것이다. 어떠한 지식도, 다른 누군가의 조언도 생존을 장담하기 어렵다.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설령 모두에게 구식이라고 비난을 받는다 해도, 미셸과 위그냉은 자신의 신념을 지켰다. 사라진 시대의 독자들이여, 다가올 미래를 떠올려 보자. 그 끝에서 당신은 어떤 표정으로 서 있을까?

"자신의 글을 써서는 안 된다는 거야!"
"그건 왜죠, 삼촌?"
"그건 말이다, 얘야, 책을 읽다 보면 이 위대한 작가들을 본받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되거든."
"그게 왜 나쁜가요?" 청년이 분개해서 소리쳤다.
"길을 잃게 되거든." - P173

과학은 벼락을 다스리고 거리를 뛰어넘고 시간과 공간을 여유 있게 넘나들고 신비한 자연의 힘을 통제하고 우주를 지배하는 듯했지만 추위라는 무적의 강적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 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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