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이 깨져서 피가 철철났었다고 했다. 하지만 손가락따위 모두 잘려나간대도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 같은 기분이였다고 했다. 그녀만 잡을 수 있다면. 지금 내 앞에서 이제 그만 끝내자고 말하는 그녀만 잡을 수 있다면 이까지 손가락 아니 발가락까지 전부 잘려나간대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고 했다. 그가 주저 앉아서 주먹이 깨지도록 땅바닥을 때리는 곳은 서울역 한복판이였었댄다.
"배운거 없고, 못생기고, 가진거 없는 놈은 사랑도 못해요? 그런거야?"
무릎을 꿇고. 펑펑 울면서 소리쳤다고 한다. 처음으로 사랑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한탄 스러웠다고 한다. 왜 나는 부모님이 안계시는걸까? 왜 나는 배우지 못한거지? 난 왜 부자가 아닌걸까? 다른 사람에게 부끄러운 짓은 안하고 살았다고 자신했던 자신의 삶이 모두 구겨져 쓰레통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고 했다. 가진게 너무 없어서 부모님의 심한 반대에 결국은 헤어지자고 말하는 여자를 보면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바닥을 주먹으로 치는 일 밖에 없었다고... 그녀가 결국은 떨리는 손으로 그를 일으켜 세우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더 불편해 지긴 하겠지만, 당신과 함께라면 불행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그에게 그녀가 첫사랑이였다. 그녀에게도 그는 첫 사랑이였다. 그리고. 그에게는 마지막이 아니였지만 그녀에게는 마지막 사랑이였다. 서른 셋.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 그녀의 가슴에 유일한 남자는 그 뿐이였으니까.
햇볓이 따갑게 내리 쬤다. 폭우가 온다더니 정말 비가 쏟아지려는지 바람한점 불지 않는 일요일 오후에 어느 봉긋한 무덤가에서 나는 그에게 이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잠시도 손을 멈추지 않고 쉽없이 무덤가의 잡초를 뽑고, 주위를 정리하고 손으로 몇번이나 비석을 쓸어 내렸다. 알 수 있었다. 그는 아직도 그녀를 사랑했다.
살아 있는 동안 삶의 유일한 희망이였던 그녀는 죽어서도 그에게는 여전히 희망이라고 했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희망이 되냐고 묻는 내게 그런게 사랑이라고 했다. 그녀를 위해서 글을 다시 배우고, 그녀를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그녀를 위해서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젊은날을 보냈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도 역시 그녀를 위해서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으로 산다고. 그러니 유일한 희망이라고. 그는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다만 그저 '희망'이라고 했다. 문득 사랑은 잔인하다고 했던 엘군의 말이 생각났다. 그야말로 사랑의 잔인함 앞에 여러번 힘들어 했던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를 원할때부터 잔인하게 굴었던 사랑은 끝끝내 그녀를 데려가 버렸으니까. 나는 조심히 물었다.
"아빠도 사랑이 잔인하고 생각해?"
그제서야 잠시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더니 아니라고 대답한다.
"엄마가 원망스러웠던 적, 없었어?"
"전혀. 한번도. 살아 있으면서 받은게 너무 많아서 내가 뭘 받았구나 하고 생각하는 시간도 모자라서 원망할 시간이 없었어. 게다가 먼저 간걸 원망하면 그때는 내 마음에서도 떠날 것 같아서.."
그에게 사랑은 잔인하지 않았다고 한다. 힘들고 어렵게 자신을 시험하긴 했지만 사랑으로 결국 그녀를 얻었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고. 그리고 그 기억으로 지금도 행복하니까. 진정으로 사랑하면 사랑은 잔인한게 아니라고 한다. 남겨지고 버려지고 찢겨지더라도 또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것도 사랑이란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그가 옮겨 가는 곳마다 양산을 받치고 따라가는 여자가 있다. 그렇다면 그녀에게는. 저토록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그의 곁을 살아가는 그녀에게는 사랑이 잔인하지 않을까? 나는 다시 조심히 물었다
"그럼 엄마는. 저런 아빠 옆에 있으면서 엄마도 사랑이 안 잔인해?"
그제서야 그를 안쓰러운 눈길로 바라보던 눈길을 거두고 나를 보더니 아니라고 한다.
"아빠가 원망스러웠던 적 없었어?"
"전혀. 한번도. 나는 살아 있고 그래서 받고 있는게 이렇게 많은데 뭘 더 원망해."
그녀는 만약에 그가 예전 감정따위 쉽게 버리는 사람이였다면 그토록 애틋한 가슴을 모르는 사람이였다면 지금처럼 그를 사랑하기 어려웠을 꺼라고 한다. 그런 사랑을 아는 사람이라서. 그 아픔을 안고도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서 그가 좋단다. 그래서 그런 그를 사랑하게 됐단다. 인생의 희망이였던 여자를 가슴에 묻고 남은 세상을 살아가는 그에게도. 그런 그를 사랑하는 그녀에게도 사랑은 잔인한게 아니랜다.
젠장. 이양반들 산속에 집짓고 사시더니 도닦으셨나. 완전 세상 통달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신다. 알 수 있다. 두사람은 서로를 사랑한다. 믿고. 의지하며. 사랑한다. 할 수 없다. 내가 쓴 글을 좀 정정해야 겠다. 사랑은 잔인하지만. 누군가에게만 잔인하다. 세상 모든 사람에게 사랑이 잔인하게 굴더라도 이 두사람은 피해 갈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로맨스는 해피엔딩이 제맛 이니까. 이사랑은 내가 아는 최고의 로맨스니까.
덧붙임 - 언젠가 돌아가신 울 엄마가. 그러니까 그의 희망이였던 그녀가 전화통화로 "그놈의 정이 웬수지. 그때 내가 그냥 갔었어야 했는데. 정으로 결혼하는게 아니였어"라고 말했던건 그에게는 말하지 않기로 했다. 왜냐면 언젠가 말했듯이 나는 해야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구분하는 현명한 여자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