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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월드컵 때도 말이 안 나왔던 건 아니었지만, 이번 월드컵은 공정성 문제로 논란들이 많이 생기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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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이란 대표팀은 미국에서 경기를 하기로 배정되었지만, 미국은 전쟁 당사국이라는 이유로 이란 대표님의 입국을 경기 24시간 전부터만 가능하다고 제한을 걸어버렸다. 경기에서 현지 적응의 중요성을 생각해 보면 이란 대표팀은 처음부터 굉장히 불리한 조건을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FIFA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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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직전 소말리아 국적의 심판의 입국 또한 미국은 막아버렸다. 그는 아프리카 올해의 심판으로 뽑히기도 했던 인물이었는데, 미국은 소말리아가 여행금지국가가라는 이유로, 그가 가진 외교관 여권도 인정하지 않고 입국금지를 시켰다. 결국 그는 돌아갈 수밖에 없었고, FIFA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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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미는 어제 경기에서 일어났다. 미국 대표팀의 주전 공격수가 직전 경기에서 레드카드를 받아 16강전 출전이 금지되자, 트럼프가 FIFA 회장에게 직접 전화를 해 출전금지를 1년간 유예시키는 조치를 이끌어 냈다. 트럼프는 또 이걸 자랑스럽게 공유했는데 (반사회성 인격장애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그는 이게 잘못됐다는 생각 자체를 못한다) 당연히 공정성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FIFA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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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이전부터 FIFA의 인판티노 회장은 트럼프의 심기를 살피기 바빴다. 전범이 되어 노벨 평화상을 받기엔 애저녁에 틀려버린 트럼프에게, 자기가 처음으로 만든 "FIFA 평화상"이라는 걸 수여하기까지 했다. 누가 FIFA 따위에 "평화상" 같은 걸 줄 수 있는 권위를 부여했을까? 아니 애초에 FIFA에 그런 걸 심사할 조직이 있긴 했던 걸까?(2회 수상자가 있긴 할까 싶다) 결국 트럼프가 받은 건 문방구에서 멋대로 산 장난감 메달에 불과하지만, 자기애성 인격장애를 갖고 있는 인물에게는 그저 기꺼운 일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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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일을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다는 극단적으로 과장된 품성(성경은 이런 걸 '교만'이라고 부른다)은 이미 외교나 무역 협상에서 드러난 바가 있다. 전 세계는 그의 뜻대로 모든 걸 맞춰주기 급급했고, 그럴 수록 트럼프는 더욱 고압적 자세로 다른 나라들을(심지어 자국의 반대파들을) 대했다. 이제는 스포츠의 룰도 멋대로 바꿀 수 있다고 믿기 시작했나 보다(이 정도야 작은 일이라고 였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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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 중에서 트럼프는, 메시나 호날두가 경기에 빠지면 흥행이 되겠느냐는 말을 했다고 한다. 스포츠의 중요한 축인 공정한 경쟁보다 흥행성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인식이 반영된 건데, 쉽게 말하면 그냥 "쑈 따위"로 여겼다는 말. 물론 규칙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그리고 그 변경은 대체로 상업적인 의도도 고려되는 게 일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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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FIFA는 이번 대회부터 전후반 중간에 물 마시는 시간을 끼워넣었다. 명분은 선수들의 건강이지만, 실은 중간광고를 위한 시간을 확보해 수입을 늘리려는 계획에 가깝다. 나름 3분 정도의 중간광고는 참아줄 수 있기도 하고, 그 규정이 게임의 운영에 미친 변화가 꼭 나쁘지만은 않아서 대충 받아들이는 분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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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과정도 공정해야 한다. 특정인이 특정한 국가에 유리한 방식의 일방적이고 특수한 변경을 한다면 이미 그건 스포츠가 아니다. 사실 미국 대표팀 선수들에게도 그리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 같은데, 결국 경기에서 미국은 벨기에 대표팀에서 4-1로 대패하고 이번 월드컵을 끝냈다. 애초에 치트키를 써서 선수와 심판을 마음대로 끼워넣고 뺄 수 있다면, 굳이 열심히 해야 할 이유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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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말하건대

나사렛 목공소에서는 다리가 휘어진 탁자나

뻑뻑한 서랍 같은 것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누구도 그것이 하늘과 땅을 만드신

그 손으로 만든 물건이라고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일꾼이 아무리 경건하다 하더라도

일 자체에서 진실하지 못한 것을 상쇄할 수는 없다.

무슨 일이든 그에 준하는 솜씨가 누락돼 있다면

그 자체로 살아 있는 거짓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by 도로시 세이어즈


- 벤저민 T. 퀸,월터 R. 스트릭랜드, 『다만 일에서 구하옵소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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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사람이 음모론에 빠졌습니다 - 음모론의 위협으로부터 우리의 관계와 민주주의를 지키는 법
정재철 지음 / 원더박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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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우리 사회에도 ‘음모론’이라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사회적으로 큰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사건에 대한 공식적인 설명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때 사람들은 배후의 무엇을 떠올리게 된다. 음모론 자체는 꼭 정치에 한정되지 않지만, 요새 이 개념이 더 큰 문제처럼 느껴지는 건, 역시나 정치세력과 결합해서 사람들을 선동하며 사회를 극렬한 분열로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음모론에는 보수와 진보, 좌우를 가리지 않는다. 요새는 극우 진영에서 부정선거론을 단골 소재로 우려먹고 있지만, 내 기억에 근래 들어 최초로 이런 주장의 음모론을 주장한 건 김어준이었다. 자비로 영화까지 만들어서 선거조작 의혹을 제기했었고, 비슷한 일은 세월호 사건 때도 반복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앞서 말한 대로 정 반대 진영에서 관련 음모론을 외치고 있다.





책은 음모론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음모론이 생겨나고, 사람들은 왜 그걸 믿는지, 음모론이 일으키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차근차근 살펴나간다. 그리고 아직 얼마 지나지 않은 12.3 계엄 사태를 “음모론이 촉발한 최초의 쿠데타”라고 정의하면서(이건 뉴욕타임스에서 해당 사건을 “알고리즘 중독이 촉발한 세계 최초의 반란”이라고 보도한 것에서 나온 표현인 듯하다) 음모론이 국가를 뒤흔들 수도 있음을 아울러 경고한다.


책의 말미에는 음모론에 빠진 사람들을 어떻게 되돌릴 수 있을까 하는 방법론이 제시되어 있다. 저자는 그들을 설득하려 하지 말고, 공감과 같은 감성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공감이란, 그래 네 말이 맞아 하는 식의 우쭈쭈를 하라는 뜻이 아니다. 음모론에 빠진 사람들은 점차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끊어지면서, 그들만의 커뮤니티에 빠져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 힘들어지는데, 그럴 때 그에게 심리적 의지가 될 수 있는 존재가 있어야 음모론에서 나올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 될 거라는 말.


하지만 책에도 실려 있는 실제 예들을 보면, 그렇게 해도 좀처럼 음모론에서 빠져나오도록 만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책에 나온 사람들도 벗어났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수준이다) 마치 불법약물처럼, 음모론도 일단 한 번 빠지면 계속해서 금단증상에 시달리며 더 자극적인 음모론을 찾아 나서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그런 차원에서 음모론에 처음부터 발을 내딛지 않을 수 있는 정보 리터러시를 기르기 위한 교육이 필요하다. 책의 마지막 장에는 이 내용이 약간 실려 있는데, 사실 뭔가 뾰족한 수가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정도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건강한 몸을 위해서는 매일 골고루 영양소를 섭취하고 적당한 운동을 규칙적으로 해야 한다는 말이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지만 다른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원래 건강하고 건전한 일을 위한 작업은 평범하게 느껴지는 법이다.





며칠 전, 국내 고교 야구 대회에서, 서울의 한 고등학교가 광주 소재의 학교와 시합을 하던 중, 5.18를 조롱하는 것으로 읽힐 수 있는 응원(혐오) 구호를 외친 것이 중계에 잡혀 큰 물의가 일어났다. 해당 학교는 6개월간 대회 출전 금지라는 징계가 내려졌는데 나름 합리적인 처분이었다고 본다. 문제는 그런 종류의 음모론에 기초한 혐오 정서가 진작 어린 아이들 수준으로까지 퍼져 있음이 공개적으로 드러났다는 부분이다.


심지어 어제는 대통령 직속 위원회의 총리급 부위원장이 해당 뉴스를 가리켜 표현의 자유 운운하는 멍청한 소리를 했다가 결국 자진 사퇴 형식으로 경질되는 일도 있었다. 표현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는 민주 국가에서 참 중요한 요소지만, 그 자유가 명백히 허위이고 나아가 혐오를 위해 조작된 내용이라면 그것까지 보장해 주어야 한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결국 그런 사회에서 ‘진실’은 그 존재가 무의미해질 것이고, 결국 더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집단에 의한 약육강식의 문화가, 착취와 지배의 분위기가 퍼지게 될 테니 말이다.


오늘도 여전히 음모론에 빠진 적지 않은 무리들이 어딘가에서 자기들이 뭔가 대단한 걸 지키고 있다며 길에 나와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쉽지는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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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수훈 언덕에서 말씀 듣기 - 삶의 자리를 바꾸는 예수의 말씀 13
권종렬 지음 / 샘솟는기쁨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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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에는 예수님의 다양한 강론들을 한 데 모아놓은 본문이 있다. 이른바 산상수훈이라고 부르는 본문들이다. 다른 복음서들에는 여기 나온 교훈들을 다른 장소에서, 혹은 다른 사람들에게 하시는 모습들도 나오는지라, 일부에서는 여기 나온 교훈들이 그 순서가 편집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다만 예수님이 한 가지 교훈은 오직 한 번만 가르치셨다고 볼 때야 문제가 되는 거고, 비슷한 교훈을 여러 자리에서 여러 사람들에게 하셨을 가능성도 적지 않은 만큼 절대적인 견해는 아니다.


굳이 이런 논의들까지 나오는 이유는, 그만큼 산상수훈이 밀도가 높은 본문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 아는 팔복으로 시작되어서 ‘열매로 알리라’로 끝나는 이 본문은 복음서의 백미 가운데 하나다. 이 책은 그 산상수훈의 본문에서 열세 개의 키워드를 뽑아 본문 설명과 적용으로 풀어낸다.





오래 전 신대원에 다니면서 지금은 돌아가신 신약학 교수님에게 배웠던 내용들이 새삼 떠오르는 부분들이 보인다. 팔복에서 복을 받을 사람들로 언급되는 이들은, 그것을 듣고 읽는 우리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자리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설명이라든지, 빛과 소금 역시 그들이 되어야 할 이상적인 모델을 말하는 게 아니라, 제자들 자체가 이미 빛과 소금이라는 것이라는 설명 등이 그것.


전반적으로 견실한 설명과 적용이 담겨 있다. 딱 교회에서 가르치기 좋게 쓰였달까. 안전한 내용들을 안전한 방식으로 풀어놓는다. 지나치게 위협적으로 들어가지도 않고. 오랜 시간 한 교회에서 목회를 한 저자라는 게 느껴지는 부분. 물론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교훈이 그렇게 말랑말랑하기만 한 것이었을까 하는 질문이 살짝 들긴 하지만, 책이라는 게 집필 목적과 예상 독자에 따라 내용이 만들어지는 것이긴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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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하나님 설계의 비밀 ㅣ 하나님 설계의 비밀
티머시 R. 제닝스 지음, 윤종석 옮김 / 도서출판CUP(씨유피)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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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서의 제목이 “The God-Shaped Heart”다. 하나님이 만드신 마음 정도로 번역이 가능할 것 같은데, 이 책에서 다루는 것이 우리의 마음, 그리고 그 마음의 이상적인 상태에 관한 내용일 것이라는 짐작이 되게 만드는 제목이다. 그런데 책을 읽을수록, 정작 마음에 관한 이야기보다는, 기독교는, 기독교인은 이래야 한다는 내용이 더 많이 보인다.


저자는 오늘날 기독교가 중요한 문제를 안고 있다고 진단한다. 기독교인임에도 다양한 범죄와 문제 행동에 있어서 비기독교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핵심에는 (도덕적 행위와 관련된)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있다는 것.


책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구조가 하나 있다. 옳고 그름을 이해하는 방식을 7단계로 나눈 것인데, 상벌에 따라 행동하는 1단계, 주고받음에 기초한 2단계, 다른 사람들을 따라하는 3단계, 법에 따라 행동하는 4단계까지는 ‘저차원적인 방식’으로 분류된다. 5단계는 사랑에 기초한 결정이고, 6단계는 그것이 순리이기 때문에 따르는 것, 그리고 7단계는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며 결정하는 것이다. 당연히 이쪽이 좀 더 고차원적인 방식으로 여겨진다.





저자는 오늘날 교회가 저차원적 방식으로만 판단하는 것 같다고 강하게 의심을 하고 있다. 사랑보다는 규칙을, 하나님의 마음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더 본다는 것. 그런데 저자가 여기에서 초반에 가지고 나오는 주제는 ‘대속’이다. 저자는 이 신학적 개념에 대한 일반적인 해설을 상당히 불편하게 여기는데, 그것이 하나님을 무시무시한 응징자, 난폭한 폭군으로 떠올리게 만든다는 이유에서다.


저자가 대신 가지고 나오는 건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이라는 이미지이다. 그리고 이런 관점은 성경의 율법을 비롯한 다양한 명령들에도 해석의 기준으로 사용된다. 문제는 그냥 부정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성경의 ‘강한 메시지들’이다. 그리고 속죄에서 징계의 개념을 부정한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과격한’ 방식이 왜 필요했는가 하는 질문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름에도 별다른 대답을 하고 있지 않기도 하고.


또, 문제의 원인을 찾기 위한 노력은 필요하지만, 이 문제를 단순히 저차원적 기준을 가진 이들과 고차원적 기준을 가진 이들로 지나치게 선명하게 나누는 모습은, 자칫 영적 엘리트주의로 빠질 위험도 있어 보인다. 전반적으로 기독교를 윤리적 종교로 바꾸려는 느낌도 받는다.


저자는 극구 “죄”라는 문제를 “질병”이나 “장애” 정도로 치환하려고 하는 듯하다. 물론 어떤 부분에서는 분명 그런 면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모든 종류의 죄를 그렇게 보는 것이 정말로 하나님의 이해일까? 저자가 애써 인용하지 않고 무시하는 상당한 분량에서 죄는 죽음, 사망, 심지어 사형선고와도 연결된다. 저자는 자신의 주장에 대한 반박을 대체로 저차원적 기준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라고 치부하지만, 그건 좋은 응답 방식은 아닌 것 같다.





물론 저자가 이런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던 답답함을 아울러 고려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인이라는 명찰을 달고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어처구니없는 짓들을 하는지. 이른바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는데도 왜 그렇게 사람이 바뀌지 않는지 말이다. 다만 그 답이, 너희는 저차원적 이해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에서 끝난다면, 뭔가 제대로 된 해결책이라기엔 조금 아쉽다.


이런 조금은 강한 어조를 배제하고 본다면, 책은 오늘날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이 보여주는 도덕적 실패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7단계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단계는 상황을 파악하는 데 꽤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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