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와 진보는 고리타분하고 모호한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이며,

정의로운 사회를 실현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이다.

명심해야 할 것은 평생 한 가지의 정치적 성향만을 지지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평생 보수이고 평생 진보인 사람은 정치인밖에 없다. 시민은 자유롭다.

인생 속에서 변화하는 개인의 이익과 사회의 이익에 따라

순간순간 가장 적합한 선택을 하면 된다.

이제 미디어나 타인의 말, 혹은 고정관념에 휘둘리지 말고,

나와 사회의 이익을 대변할 정치적 입장을 선택할 때다.


- 채사장, 『시민의 교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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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혁신당의 조국 대표가 한 아이돌 그룹 멤버가 사용한 사투리 표현에 좌표를 찍으며 일베식 표현이라고 몰아가고 있다. 말 끝에 "~노"라는 어미를 붙이는 일베 특유의 조롱 문화(노무현 전 대통령의 말투를 조롱하는 의미가 담겼다)를 그 멤버가 사용했다는 것.


물론 그 비판은 그 멤버가 일베 사용자라는 의미는 아니었고, 일베식 표현이니 사용하지 말라는, 나아가 우리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일베식 조롱 표현/문화에 대한 경고로 보인다. 며칠 전에는 노무현재단의 이사까지 맡고 있는 조수진 변호사(지난 총선에서 민주당 공천을 받았다가 자진 사퇴했다)까지 여기에 한 마디를 보탰다. 나도 경상도 사람이지만 그런 표현은 쓰지 않는다고.


차근차근 따져보자. 해당 아이돌 그룹은 이른바 '중소 기획사'에서 만든 그룹이었다. 데뷔한지 1년이 넘었지만, 최근에서야 입소문을 타고 인기를 끌어올리고 있다. 이른바 역주행 중. 그 가장 주된 이유는 유튜브 채널을 통한 친근감 어필이었다. 멤버 중 거제시와 경주시 출신이 있었고, 오늘은 한 번 사투리를 원없이 써 보자는 콘셉트로 영상을 찍었는데, 이게 대박이 난 거다. 도도해 보이는 외모에 친근한, 시골 할머니나 쓸 법한 사투리로 대화를 하니 그 갭이 재미있었던 거다.


당연히 이들이 사용한 사투리에는 어색한 부분도 있다. 아무리 지방 출신이라지만 표준어 사용을 오랫동안 익혀왔을 것이고, 서울 공화국에서 활동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고친 부분도 있었을 것이다. 또 말은 그것을 사용하는 삶의 정황과도 깊은 연관을 갖는데, 어르신들의 상황과 지금 상황에는 차이가 있으니, 애초에 어떤 표현을 사용해야 할 상황이 오지 않을 수도 있고, 반대로 의도적으로 특정한 사투리 표현을 사용해야 할 상황을 만들 수도 있다.


조국 씨('씨'는 경칭이다. 그 진영에서 예전에 자주 주장했던 내용이다)의 사투리 저격은 이런 모든 정황을 무시한 채, 그저 본인 귀에 거슬리는 표현을 문제 삼는 느낌이다. 물론 나 역시 일베는 우리 사회의 곰팡이 같은 존재라고 본다. 그건 혐오를 먹이 삼아 사회를 부패시키는 집단적 광기다. 그러나 곰팡이를 이 세상에서 어떻게 없앨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심각하게 곰팡이가 핀 것들은 내다 버리는 식으로 처리를 할 수 있겠지만, 공기 중에 수없이 떠 다니는 균을 완적히 박멸하는 건 불가능하다. 특정한 영역에서 특정한 기간 동안은 어찌어찌 가능할 지 모르겠지만, 우리 모두가 무균실에서 살 수는 없는 법이니까.


이번 저격은 일차적으로 사투리 사용자 일반을 일베로 몰아가는 대단히 정치인답지 못한 공격이었다. 이건 너무나 쉬운 계산 결과다. 당장에 경남권 사람들이 들고 일어났다. 사투리를 사용하는 것이 죄인가? 당연히 아니다.


애초에 이런 비판을 하려면 해당 아이돌이 해당 표현을 사용했을 때, 혹은 이전에라도 그 그룹이 보여주는 분위기가 일베스러웠을 때에야 조금이라도 공감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최소한 그 표현이 조롱의 의미를 담기라도 했어야 했다. 그러나 이 경우는 그 어느 것도 아니다. 이런 면에서 최근 불거졌던 배제고의 일베응원 사태와도 차이를 보인다. 그쪽에서는 명백하게 상대팀은 광주일고를 자극하고 도발하기 위해 해당 구호를 집단적으로, 경기와 직접 상관없이 무맥락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질이 나빴다.


여기에 나도 경상도 사람인데 '무섭노' 따위의 표현은 사용하는 걸 들어보지 못했다는 조수진 변호사의 말은 그냥 무너지는 배에 식량이라며 짐을 실은 격이었다. 해당 표현은 사투리를 기반으로 조금은 과장되게 상황을 표현하는 콘셉트였다. 실생활에서 해당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 건 중요하지 않다. 웃자고 한 말이니 잘못이 아니라는 의미가 아니라, 사투리를 가지고 창의적인 표현으로 사람들을 재미있게 하려 했다는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들은 자신의 발언을 철회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나는 잘못하지 않는다는 인식의 발로일까? 개인적으로 문재인 정부의 실패는 바로 이런 오만함 때문이었다고 본다. 윤석열이 그렇게 문제가 많다고 비판했을 때도, 자신이 임명한 사람이니 (어쩌면 자신의 판단이 틀렸음을 인정하기 싫었던 것인지) 끝까지 두었다가 그 사달이 났다. 비슷한 케이스는 당시 기획재정부 장관도 있었고. 정부 정책을 건건히 딴지 걸고, 아예 항명을 하는데도, 내가 임명했으니 틀렸을 없다는 고집으로만 비춰졌었다.


선거에 패배하고 나서 실망과 충격이 적지 않았으리라 짐작은 되지만, 이런 식으로라면 혁신당은 다음 총선에서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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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창세기 12장의 말씀을 근거로 “이스라엘을 축복해야 복을 받고, 이스라엘을 비판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 구절을 현대 이스라엘 국가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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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은 단순한 영토 소유권의 선언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땅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하고, 그 땅에 사는 백성에게 정의와 언약의 책임을 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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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는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성경의 일부 구절만 떼어 현대 정치적 주장을 정당화하는 것은 과연 바른 신앙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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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경기를 드문드문 보면서 느낀 건, 참 흑인 선수 비율이 높구나 하는 점이다. 아프리카 대표팀의 경우는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유럽 대표팀들에도, 북유럽 팀들에도 흑인선수 비율이 적지 않다.


당장 프랑스만 하더라도 무려 21명의 흑인 선수들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니, 대표팀 대다수가 흑인인 셈이다. 음바페도, 뎀벨레도 다 흑인이다. 흥미로운 건 그런 프랑스에서 당장 인종차별주의 정당이 높은 지지율을 보이고 있다는 점인데... 인종주의 정당에 표를 주면서, 자국 대표팀에서 활약하는 흑인 선수들을 보면서 프랑스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프랑스만이 아니다. 어지간한 유럽팀에는 흑인선수들이 잔뜩 포진해 있다. 스포츠의 미래는 흑인들에게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한편 남미 국가들의 경우에는 애초에 축구를 잘 하는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흑인 비중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긴 하다. 그리고 이런 쪽에서 아직도 좀 벽 같은 게 느껴지는 건 역시 아시아 국가들. 카타르처럼 귀화자 중심으로 대표팀을 꾸리는 나라가 아니면, 흑인들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뭐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을 게다. 당장 흑인들의 이민이나 귀화가 굳이 거리가 먼 아시아쪽으로 향하지 않는다는 점(언어적 문제도 있고), 특별 귀화 같은 경우는 그에 맞는 직접적인 재정적 보상이라든지, 국제대회의 좋은 성적을 바탕으로 높은 연봉을 받을 수 있는 팀으로의 이적이라든지 하는 게 기대되어야 하는데, 아시아 국가들은 이 조건들을 충족시키기가 쉽지 않으니까. 그래도 일본만 해도 주전 골키퍼가 흑인 혼혈 선수인 걸 보면 조금씩 달라지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긴 한다.


한편 프랑스에는 공식적으로 인종에 따른 선수 분류 자체를 하지 않는다는 말도 있다. 눈 가리고 아웅하는 꼴인데, 세지 않으면 문제가 없어질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인종차별은 그 어느 나라 못지 않게 심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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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6-07-09 11: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뭐 꼭 백인만이 아니라 전 세계 모든 나라 사람들은 인종차별을 하는 편이라고 생각합니다.다만 인종차별은 특히 구미권에서는 민감한 문제고 법적 제재가 있기에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인들은 살살 돌려까면서 인종 차별을 하고 미국은 좀 대놓고 하는 편이죠.
프랑스의 경우 흑인들의 경우 오랜 식민 통치를 해서 자국내 흑인들이 이민온 역사가 길어서 흑인들과 결혼하는 백인들도 많을 정도로 흑인들에게 그나마 관대한 편이고 프랑스인으로 인정하는 것 같습니다.다만 그외의 유색인종에 대한 노골적이 차별은 있는데 특히나 이슬람권 난민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종교 문화적 갈등및 범죄를 일으킴으로써 유색 인종에 대한 인종 혐오가 확실히 는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다만 프랑스는 인종차별이 심한 나라라고 말하는 것보다 국가 차별이 심한 나라라고 말하는 것이 더 맞을 듯 싶은데 자국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강해서 그런지 몰라도 유색 인종뿐만이 아니라 같은 백인이라고 해도 프랑스어궈이 아닌 백인들 예를 들면 같은 유럽권인 영국이나 독일 특히나 미국인에 대한 차별이 은근히 많다고 하네요ㅋㅋㅋ
 
복음 안에서 발견한 참된 자유
팀 켈러 지음, 장호준 옮김 / 복있는사람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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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한 편의 설교문 정도 될까 싶은 얇은 책이다. 저자는 인간의 왜곡된 본성이 기본적으로 공허함을 느끼고 있으며, 이를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과의 비교우위를 찾기 위해 애쓰고 있다고 말한다. 이런 노력의 종착점은 교만이다. 당연히 그것으로는 우리 삶이 본질적으로 채워질 수 없다.


그리고 여기에서 바울의 예가 사용된다. 그는 사람들의 눈도, 심지어 자기 자신의 눈도 의식하지 않았다. 그건 자신이 완전하기 때문이 아니다. 무엇보다 그는 스스로를 죄인의 괴수라고 소개한 인물이지 않던가. 그는 아예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판단)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이건 다른 말로 ‘겸손’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이 그런 삶을 살 수 있었던 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그에 대한 평가를 끝내셨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그 평가가 우리가 누구인가를 결정한다.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게 된다. 그리고 이럴 때 비로소 “복음 안에서의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천국과 지옥의 이혼”에서 C. S. 루이스도 비슷한 내용을 강조한다. 책 속에 등장하는 여러 캐릭터들이 끝내 천국으로 향하지 않는 이유는 자기 자신에게 너무 몰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천국의 초입에서 한 영혼은, 살인을 저지른 생전의 자기 부하직원이 천국에 있는 것을 보고는 그가 인도하는 천국에는 가지 않겠다고 외면하기까지 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은 사람만 천국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 그에게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느껴진 것이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천국에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얼마나 자주 나를(혹은 나만) 신경 쓰고 있는지 모른다.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이런 실수에서 좀처럼 벗어나기 힘든데, 교회 내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갈등 상황도 결국 여기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의 시선을 나에게서 하나님에게로 돌릴 수 있을까? 아쉽게도 책에는 이 부분에 관한 실천적 도움은 그리 보이지 않는다. 저자는 우리가 바르게 깨닫기만 하면(인식론적 전환) 그런 사람이 될 것(존재론적 전환)이라는 기대인 듯하다. 물론 바른 앎은 진리를 따르는 삶에 있어서 참 중요한 일이지만, 결국 구체적인 방법론이 없다면, 극단적으로 그저 무엇을 아는 것으로 어떤 사람이 된 것인 양 착각할 수도 있다.



복음의 중심 주제에 대한 간명한 설명이 인상적이었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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