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교육 전문가들이 학생들에게

열린 마음을 품고 진리에 대해 나름대로 결정하라고

아무리 열성적으로 격려한다 해도,

수업 시간이 파리가 프랑스의 수도인지

벨기에의 수도인지 물어 보는 교사를 향해,

어떤 학생이 손을 들고 자기는 그 문제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갖고 있다고 응답하면

아무도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 레슬리 뉴비긴,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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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일 교과 하브루타 - 질문 중심 수업으로 바꾼 지아쌤 10년의 기록
김지아 지음 / 비비투(VIVI2)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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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브루타란 고대 유대인들의 독특한 교육/학습 방식을 말한다. 토라를 공부할 때 교실에 앉은 학습자에게 교수자가 일방적으로 지식을 전달하는 방식이 아니라, 학습자가 짝을 이루어 서로에게 질문하고 대답하는 과정에서 해당 내용을 더 깊게 이해하고, 나아가 종종 굉장히 창의적인 방식의 해석까지 낳는 교육방식이다. 탈무드니 학가다니 하는 유대 고전들은 은근 이런 형태의 교육방식을 권장하는 구성을 갖고 있기도 하다.


애초에 랍비들의 가르침이란, 어느 하나의 전통을 오랫동안 물고빠는 식이 아니라, 수많은 랍비들이 앞선 의견들에 이의를 제기하고, 자신의 새로운 해석을 덧붙이고 하는 거대한 해석사적 전통의 모음이다. 그래서 랍비들 사이의 의견도 꽤 차이가 나는 경우가 있다. 이는 기독교 내 정통주의자들처럼, 우리 선생님의 의견을 절대로 바꾸면 안 된다는 식의 태도와는 큰 차이가 있기도 하다.





그런데 요새는 이게 질문, 창의력 같은 키워드가 주목받으면서 종교적 맥락에서 벗어나 일반적인 학습전술로도 수용되고 있는 것 같다. 사실 교실에서 질문이 사라졌다는 지적은 이미 오래 전 다양한 교육학자들에게서 나왔던 문제제기다. 『페다고지』로 유명한 브라질의 교육학자 파울로 프레이리의 책들을 읽으면서도 자주 들었던 질문이고, 미국에서는 마일스 호튼 같은 인물이 비슷한 질문을 제기하고, 나름의 교육윤동을 진행하기도 했다. 확실히 질문은 교육에서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다.


이 책은 초등학교 교실에서 실제 하브루타 방식의 교육활동을 진행해 온 저자가 자신의 경험을 차근차근 정리해 나눈 책이다. 경험 정리 중심이다 보니, 어쩌면 가장 기본적인 하브루타의 정의와 구체적인 방식에 대한 설명이 생략된 느낌이기도 하다. 물론 본문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감을 잡게 되겠지만. 아마도 이 주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과 오랫동안 대화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어쩌면 그건 설명이 아니라 보여주는 게 최선이라는 생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서두에 간략하게 설명을 넣어두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


책은 이론보다는 실제에 집중한다. 어떻게 이런 방식의 수업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실제로 진행했을 때 아이들에게서 어떤 반응이 일어나는지, 예상되는 어려움과 그 대처법이라든가, 지역 교사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이 방식을 연구하는 지 등등. 우선은 초등교사인 독자에게 관심이 갈 만한 내용들이 주가 되지만, 그 사이에서 얻을 수 있는 내용도 분명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비단 교실만이 아니라 교회에서도 질문이 좀 더 늘어나야 한다고 본다. 질문이 없는 교회는 딱딱하게 굳은 돌처럼 돼서 언젠가 깨지고 말 테니까. 적어도 교실에서는 (물론 일부라고 하겠지만) 나름의 고민과 실험이 진작 시작되었다. 교회도 좀 더 분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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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교회, 들어오면 숨 막히고 나가면 그립다 - 복음으로 다시 정의하는 전통 교회 용어 사전
이재면 지음 / 죠이북스(죠이선교회)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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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좀 길다. 하지만 책에서 어떤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매우 구체적으로 담고 있다. 저자는 전통교회의 답답함에 관해 겪은 이야기를 여러 차례 온라인에 나누었던 것 같고, 그걸 책으로 엮은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각 장마다 말미에 해당 글에 대한 ‘댓글’들 일부가 발췌되어 실려 있기도 하다.


책에서 다루는 주제는 다양하다. 예배 순서, 청년부, 새신자에 대한 지나친 관심, 봉사에 대한 압박, 교제라는 이름의 부담(누군가는 준비하고 치우고 해야 하니까), 새벽기도의 압박, 수련회을 둘러싼 고생 등이 2부에, 직분과 목회자의 복장, 설교에 대한 과도한 집착(?), 사명이라는 이름의 압박이 3부에 실려 있다. 와우, 거의 뷔페상처럼 나올 만한 것들은 다 챙겼다.





기본적인 내용은 이런 주제들에 대해 전통적인 교회가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달라진 상황에 맞게 변화의 가능성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는 내용이다. 저자가 언급한 주제들은 사실 ‘진리’ 자체보다는 그것을 담는 형식에 가까운 것들이니까. 상황이 달라진다면 내용을 담는 그릇도 바꿀 수 있다는 데 동의한다.


특히 저자는 예배가 지나치게 많다고 지적하는데, 이 부분은 평소 나 역시 주장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주일예배 뿐 아니라, 수요일, 금요일에 모이는 집회도 예배라고 불리고, 새벽마다 또 ‘새벽예배’를 하기도 한다. 어떤 교회에는 동시에 저녁예배도 진행하고, 365일 쉬지 않고 계속 예배를 이어간다는 걸 메인으로 자랑하는 선교단체도 있는 것으로 안다. 어디 그뿐인가, 이사예배, 개업예배, 장례예배, 신학교에 다닐 때는 무슨 교수 출판감사예배, 은퇴감사예배, 등등 온갖 사사로운 예배도 넘쳐나는 걸 봤다. 그냥 ~~식/예식이라고 부르고 기념하며 감사하면 될 일을 굳이 ‘예배’자를 갖다 붙인다.


그러니 ‘인간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존재’라는 말을, 수요예배 없애면 큰일 나는 이유쯤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나타나는 것이다.(얼마 전 내 유튜브 채널에 실제로 달린 댓글이다) 여기서 말하는 ‘예배’란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앞에서 나왔을 때 당연히, 그리고 자연스럽게 취해야 하는/취하게 되는 자기를 낮춤, 상대를 인정하고 경배하는 태도, 또는 상태에 관한 신학적 설명이다. 수요예배, 주일예배 할 때 붙이는 의식이름이 아니라.


이른바 새벽예배는 성경의 전통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새벽에 기도했다는 몇몇 구절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면, 지난 2천 년 동안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은 다 그걸 알아채지 못하다가 20세기 조선의 신자들만 알았다는 의미가 된다), 20세기 초반 조선의 농경사회의 시간 단위에 맞춘 의식이다. 물론 그렇게 만들어진 의식이라도 우리의 신앙에 유익이 된다면 얼마든지 유지할 수 있다. 다만 바뀐 상황으로 이제 사람을 갈아넣어야 유지되는 수준인데도 계속 고집한다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먹었다고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했던 바리새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기도 한다.





저자는 교회가 “‘새로운 시대의 교회’보다는 ‘과거 유지형 교회’가 되어” 간다고 지적한다. 맞는 말이긴 한데, 어느 정도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모든 조직이 날마다 모든 부분에서 새로운 걸 시도할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의외로 ‘안정감’이라는 요소는 조직을 유지하는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C. S. 루이스는 어떤 예배 형식이라도 좋으니, 제발 자주 형식을 바꾸거나 변화를 꾀하지는 말아 달라고 쓴다. 익숙한 형식은 “훈련된 습관”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너무 자주 바뀌면 그런 훈련을 할 수가 없다. 사실 훈련이라는 것이 같은 작업을 반복적으로 함으로써 몸에 익히는 것이니까. 신앙은 ‘몸으로’ 배워야 하는 부분도 분명히 있다.


다만 이런 안정성/보수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구원자 되심이 아니라, 내가 해 온 신앙 양식의 유일한 기준 됨을 고집하는 데 사용하는 순간, 우리는 중요한 일탈을 겪게 된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예수님을 비난하는 사람과 완전히 겹쳐진다. 이것도 중요하고, 저것도 중요하다. 교단 차원에서의 가이드라인은 필요하지만, 각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원만한 조율과 합의로 얼마든지 수정해 나갈 수 있다. 그것이 교회에게 주신 자유다.


물론 이런 합의가 쉽지는 않다. 책에도 저자가 교인들과 부딪히는 장면들이 종종 등장하기도 한다. 고민이다. 목회자의 생각에 교인들의 습관을 바꿔 맞추는 게 최선일까, 아니면 그 공동체는 또 공동체대로 익숙한 방식의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사람들끼리 모이는 것도 자유의 일환은 아닐까.



전반적으로 쉽게, 그리고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선명하게 잘 쓴 글이다. 여기 실린 내용들이 딱히 새롭게 나온 건 아니라는 사실은 우리가 과연 변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 조금은 회의적인 예상을 하게 만드는 요인이긴 하지만, 사실 교회는 지난 2천 년 동안 이미 쉴 새 없이 변해왔다.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예배의 양식과 신앙생활의 모습도 100년 전에는 상상하지 못한 모습이었을 것이고, 1세기 기독교인들에게도 굉장히 생소한 모습일 것이다. 그러니 우리 단순히 옛 것을 반복하기만 하지 말고, 그 뜻을 한 번 곰곰이 새기며 함께 대화를 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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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가 정치권력과 손잡으면 기독교적 가치가 더 잘 지켜질까요? 『정치와 종교, 그 위험한 관계에 대하여』 4장을 바탕으로, 특정 종교가 공적 광장의 중심을 차지하는 ‘신성한 공적 광장’이 왜 해결책이 될 수 없는지 살펴봅니다.
​
오늘날 정치적 논쟁은 설득과 대화보다 조롱과 비난, 피해자 의식과 진영 대결로 흐르기 쉽습니다. 그 과정에서 교회가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과 동일시되면, 정치적으로는 승리하더라도 복음의 신뢰를 잃을 수 있습니다. “기독교를 지켜주겠다”는 권력의 약속이 어떻게 교회를 이용하고 신앙을 정치화할 수 있는지, 미국의 문화전쟁과 독일 교회의 역사적 사례를 현재 한국 교회의 현실에 비추어 풀어봅니다.
​
정치는 중요하지만 가장 우선적인 것은 아닙니다. 교회가 공적 광장에 참여하면서도 권력과 거리를 유지하고, 적대가 아닌 설득과 사랑으로 기독교적 가치를 드러내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함께 고민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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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말들 - 군자를 버린 논어 ㅣ 임자헌의 가까운 고전
임자헌 지음 / 유유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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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인가 논어를 읽어본 기억이 있다. 물론 한자를 다 읽고 이해할 수는 없으니, 우리말로 해설된 책들이다. 전주에 여행을 간 김에 헌책방에서 구입한 이 책도 그런 논어의 우리말 번역서다. 그런데 제목이 독특하다. “군자를 버린 논어”라니, 군자는 논어의 핵심 단어가 아닌가. 그걸 빼고 논어 읽기가 가능해?


언뜻 안티 논어, 혹은 논어 비틀기로 느껴지기도 하는 제목이지만, 실은 그런 것들과는 상관없다. 역자는 논어가 지나치게 어렵게만 번역되어 심각한 내용으로 받아들여지는 상황에서 탈피하고자, 현대어로 번역하는 재미있는 시도를 했다. 물론 그렇다고 대충 번역한 것은 아니고, 역자는 조선왕조실록 현대화 사업에 참여할 정도로 실력이 인정받은 인물.





책 전반에 걸쳐 현대적 번역이 눈에 띤다. 수레는 자동차로, ‘인(仁)’이라는 개념은 ‘사람다움’으로, 문제의 ‘군자’는 ‘지성인’ 등으로 번역된다. 말투도 ~니라 같은 예스러운 어미가 아니라 상황에 따라 ~요(대중 앞에서), 또는 예사 낮춤(제자들에게) 등으로 바뀌어 있다.


예를 들어 논어에서 내가 좋아하는 구절 중 하나인 이인편 8절은 “아침에 내가 참답게 살 길을 깨달았다면 저녁에 죽어도 괜찮지 뭐.”라고 번역되어 있다. 정말 가까운 제자들과만 있을 때, 스스럼없이 풀어놓는 속마음이라는 느낌이다.


역자는 모든 항목은 아니지만 일부 항목들에는 역자가 나름의 주석을 달아놓았는데, 관련된 역사적 배경이라든지, 또른 단순히 자신의 감회 등을 적어놓았다. 대체로 읽을 만했는데, 일부 내용은 지나치게 개인적인 감상들이 가볍게 적혀 있다. 그런 건 일기장에 적었더라면 더 좋았겠다 싶었지만. 대표적인 구절이 양화편의 “여자와 소인은 다루기 힘들다”는 구절인데, 역자는 시대착오적인 내용이라는 일방적인 투정(?)을 적어놓고 넘어간다.





성경 또한 매우 자주 새로 번역되는 책 가운데 하나다. 요새 읽고 있는 번역은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인데, 성경 전체를 현대어로 번역하기 위해 노력을 한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딱 메시지 성경이 떠올랐다. 비슷한 취지니까.


리뷰를 쓰다가 “공자의 말들”이라는 제목으로 개정판이 나왔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다. 목차를 보니 일부 부록의 순서가 뒤에서 앞으로 옮겨진 것 같다. 논어를 케케묵은 옛날 성인들의 말씀으로 두고 멀리하는 것보다는 이런 식으로 좀 더 쉽고 가까이 두고 읽고 새겨보는 건 좋은 일인 듯하다. 저자도 머리말에서 언급하듯이, 사실 논어의 내용은 의외로 상식적인 내용들이 많다. 문제는 상식적인 교훈을 기적으로 여겨지게 만드는 세상이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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