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이 말하는 ‘평신도교회’란 사실 새로운 건 아니다. 회중교회/조합교회처럼 교회에 목회자를 따로 두지 않고, 교회 구성원들이 자체적으로 예배(당연히 설교도 포함된다)와 교회운영을 하는 형태는 이미 많이 있어 왔다. 다만 이런 형태의 교회가 제법 큰 교세를 이룬 미국과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드문 형태라 생소하게 느낄 수 있다.
물론 약간의 차이도 있어 보이는데,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는 ‘평신도교회’는 여기에 가정교회의 모델까지 융합시키는 이미지를 그리는 듯하다. 한두 가정, 많아야 예닐곱 가정 정도의 작은 모임을 이상적으로 보고 있다.
기성교회에 출석하며 신앙생활을 하던 저자가 이런 새로운 모델의 교회를 시작한 건, 역시나 어떤 불만 때문이었을 것이다 책에는 이 부분이 굳이 자세하게 언급되지는 않는데, 문맥 상 교회 재정 사용의 방향성이라든지, 조직 운영의 한계, 그리고 목회자의 자질 문제도 어느 정도 있지 않았나 짐작된다.
책에서 저자는 평신도교회 모델이 이른바 ‘초대교회의 정신’을 좀 더 잘 구현할 수 있다고 보는 듯하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기독교 초기 역사의 몇몇 장면들을 언급하기도 하고,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한 강조도 보인다.
다만 저자의 이런 주장들은 명백한 한계가 보인다. 우선 목회자가 없다고 해서, 저자가 불만을 느끼는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되지는 않는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목사가 되기 위해서 받은 훈련과 교육은 간단히 대체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다. 또, 평신도들 가운데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대학 시절 우연히 그리스도의 교회 계통의 모임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상대는 내가 신학생이라는 걸 모르고서 초대를 한 것 같은데, 가보니 한 대학교의 빈 강의실에서 몇몇 대학생들이 모여 예배를 진행하고 있었고, 그 예배의 진행은 선배로 보이는 조금 더 나이를 먹은 남학생이 이끌고 있었다. 흥미가 생겨서 몇 가지 질문을 했는데, 그게 조금 날카로웠던지 그 학생은 약간 흥분한 듯 했고, 그대로 인연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그 때 내가 물었던 질문 중 하나는 이랬다. 신학을 따로 공부하지 않은 분이 설교를 하신다고 했는데, 그러면 그분이 신학적을 일탈하게 되면 누가, 어떻게 교정할 수 있는가. 모든 걸 좋은 쪽으로 생각하려는 건 그 자체로 나쁜 일은 아니지만, 우리가 아는 수많은 이단들도 다 그런 식으로 시작되었다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이 책의 저자가 그 중 한 명이 될 거라는 말은 아니지만, 처음엔 좋게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중간에 어떻게 길을 잃을 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또, 이런 식의 환원주의 비슷한 논지를 주장하는 분들은 교회의 역사가 마치 처음 1세기 정도 제대로 진행되다가 수백 년(또는 천 년 이상) 길을 잘못 들었고, 이제야 (본인에 이르러서) 다시 제 길을 찾은 것처럼, 지나치게 단순화된 역사 모델을 지니고 있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 같은 사건을 언급하면서, 뭔가 교회에 본질적인 문제가 일어났던 것처럼 설명하기도 하고.
이런 몰역사적 관점은 하나님께서 지난 2천 년 동안 교회를 통해서 이루신 일들을 너무 쉽게 무시하는 오류다. 교회의 조직은 나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의 신앙 선배들이 고민하고 도출해 낸 결과물의 집합이기도 하다. 물론 이런 형식은 현실에 맞춰서 끊임없이 개선되고 변해야 한다. 하지만 그 또한 역사적인 적층물 위에 서는 것이지, 우리가 당장 사도행전의 시대에서 이어지는 게 아니다.
조금 비판적인 리뷰가 되었지만, 사실 개인적으로는 저자가 그리고 실천하는 교회 모델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교회가 반드시 어느 한 가지 표준 모델을 따라야 하는 건 당연히 아니고, 예배의 형식도 마찬가지다. 이미 ‘개신교’로 분류되는 많은 교회들 사이에도, 나라별, 지역별로 예배의 모습에 큰 차이를 보이는 게 사실이니까. 당장 우리의 엄숙한 장로교회의 장로님들은 미국 흑인 침례교회의 경쾌한 예배에 쉽게 어울리지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둘 중 하나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저자가 말하는 평신도교회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해답은 당연히 아니고, 어쩌면 예상치 못했던 또 다른 문제가 생길 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제가 보이는데 그걸 해결하기 위한 시도조차 하지 않는 건, 일종의 직무유기가 될 수도 있다. 우리가 교회의 일원이라면,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고치기 위한 노력을 할 의무도 있는 법이다.
시종일관 정중하면서도, 차분하게 자신이 선택한 길을 설명하는 모습을 보면, 저자의 인격이 짐작된다. 책은 자신이 선택한 길에 대한 일종의 설명/변호적 내용이라 방어적 논리가 좀 보이긴 하지만, 후반에는 실제로 저자의 예배가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 스크립트가 실려 있어서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다양한 고민을 하면서 읽고, 토론해 볼만한 책.
몇 번 시행착오를 겪은 후 나는 부흥사의 말씀에
은혜 받으려는 욕심을 자연스레 포기했다.
자기 흥에 겨워 삼천포로 마구 빠지는 부흥사의 설교를 들으면서
나는 알 수 없는 비애감마저 느껴야했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하나님을 파는 세일즈맨 같은 목사보다,
그렇게도 영양가 없는 설교에서 아낌없이 아멘하고
박수쳐 주고 즐거워하는 기도원 파 신자들의 믿음이
훨씬 윗길임에는 틀림없다!
- 이숙경, 『내가 행복했던 교회로 가주세요』 중에서
제목이 특이했다. 휠체어에서 듣는 음악이라. 이 책은 작가가 감상한 여러 음악 앨범들 중에 좋아했던 것들을 모아 놓은, 일종의 음악 에세이다. 그런데 작가가 세 살 때부터 근육병 진단을 받은 장애인이라는 점이 조금은 다른 점이랄까. 하지만 뭐 음악을 감상하는 데 신체의 장애가 (청각 장애가 아니라면) 뭐 그리 특별히 다를까.
물론 오랜 시간 장애를 안고 살아온다는 건, 자연히 사람의 사고와 심성에도 영향을 주기 마련일 것이다.(당연히 그 영향이라는 것이 사람마다 똑같지는 않을 것이고) 그리고 이런 부분이 특정한 음악을 감상하는 데도 어느 정도 작용하는 걸까?
책에 언급된 노래들은 대부분 밴드의 곡들이다. 헤비메탈도 있고, 락도 있었던 것 같고. 물론 조금은 잔잔한 장르들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그다지 관심이 있는 장르는 아니다(덕분에 소개된 앨범 대부분은 모르는 곡들이었다). 일단 귀를 시끄럽게 만드는 노래들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니까.
대신 노래를 들을 때는 가사에 자주 집중하는데, 또 이 점은 작가와 어느 정도 비슷하기도 하다. 책에 실린 몇몇 노래들에는 관심이 좀 생겨서 유튜브로 찾아보기도 했다. 나중에 한 번 제대로 들어봐야지.
책은 각 앨범마다 대부분 두 페이지가 할당되어 있는데, 왼쪽 페이지에는 그 앨범의 표지가, 오른쪽에는 그에 대한 작가의 설명과 감상이 담겨 있다. 한참을 페이지를 넘기다가, 요새는 앨범 이미지를 다들 이렇게 유화 느낌으로 만드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다가 앞서도 말했던, 유튜브로 찾아본 앨범 사진을 보고 깨달았다. 아, 이거 다들 사진으로 된 원화를 유화 느낌으로 바꾼 거구나. 여기에 뭔가 특별한 의미가 있었을까.
모든 글은 결국 그것을 쓴 사람의 일부를 담고 있기 마련이다. 제목부터 장애인으로서의 자신을 인식하는 이 책에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은 음악과 관련된 내용이지만, 일부 장애인으로서의 자신에 관한 생각도 아울러 묻어난다. 그런 부분들은 조금은 무거운 느낌이다.
억지로 밝은 척은 아니다. 그냥 밴드 음악을 좋아하는 한 사람이 남긴 지극히 개인적인 에세이에 가깝다. 나처럼 좋아하는 곡이 거의 없을 수도 있고, 또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취향과 비슷한 사람을 만날 수도 있으리라.
오래 전(아마도 중학교 3학년 때였던 걸로 기억한다) 성경을 처음 읽고 있었을 때, 하박국을 읽으면서 피식 웃음이 났었다. 이 사람 뭔데? 하는 느낌이랄까. 처음부터 하나님께 항의를 하더니, 허리에 손을 얹고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는지 지켜보겠다는 꽤나 도발적인 선지자. 성경에는 정말 다양한 성격의 선지자들이 나오지만, 하박국만큼 이색적인 인물도 없었다.(물론 나중에 보니 요나도, 호세아도 특이한 인물이긴 하다)
이 책은 크리스토퍼 라이트가 신학전공자가 아닌 사람들을 대상으로 조금은 쉽고 편안하게 쓴 하박국 해설/강해서다. 상대적으로 지나치게 신학적인 고찰이나 원어 연구 같은 내용은 적고, 대신 현실로의 적용 부분에 집중하는 느낌이다.
하박국은 화가 나 있는 선지자가. 그 주된 이유는 그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이 엉망진창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시대로부터 2000 하고도 몇 백 년이 더 지난 오늘날도 현실은 비슷하다.
초강대국 미국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마음에 들지 않는 나라들을 군대로 때리고 있고, 나머지 나라들은 그런 미국이 두려워 대놓고 반대도 하지 못하고 있다. 진작 윤리적 파탄이 난 대통령이 이끄는 미국은 말 그대로 깡패다. 수많은 나라들 사이에서 혐오와 배제의 논리를 전면에 내세운 정치세력들이 설치고, 심지어 제1당이 되기도 한다. 어중이떠중이들은 그런 파시스트들을 추종하며, 그들에게서 현실의 비참한 자신을 덮어줄 ‘가오’를 찾는다.
하박국은 왜 하나님이 이런 현실을 그냥 두고 보시느냐고 항의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항의를 무시하지 않으시고 대답해 주신다. 세상은 너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훨씬 더 큰 규모로, 한 시도 쉬지 않고 진행 중이다. 눈을 크게 떠라. 우리도 종종 신앙을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온 우주의 하나님이 오직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맞춰주시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하박국의 하나님은 그런 잘못된 기대를 깨뜨리신다.
그러나 또 한 편으로 하나님은 하박국이 고발하고 있는 현실의 악한들을 가만두지 않으신다. 저자는 특별히 제국주의적 권력을 휘두르는 이들과 연결시킨다. 하박국 당시의 바벨론이 그런 제국주의적 폭력의 대명사였지만, 그런 세력은 하박국 시대 이후에도 수없이 등장했고, 여전히 곳곳에 남아있다. 하나님은 반드시 악인들의 행위에 대해 심판을 하실 것이다.
저자는 하박국의 주제가 두려움에서 확신으로의 전환이 아니라고 말한다. 여전히 선지자는 두려움을 안고 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의 성격이 바뀌었다. 저항으로서의 두려움에서 신뢰로서의 두려움으로 변했다는 것. 여전히 선지자의 눈 앞에서 일어나는 현실이 달라진 게 없기 때문에 그에게는 두려움이 남아 있다. 또,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의 방법을 모두 알 수 없기에 그는 불안해한다. 하지만 이제 그는 신뢰로 그런 두려움을 안고 살아간다.
이건 오늘날의 많은 신앙인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믿음을 갖고 있다고 해도 좀처럼 우리를 둘러싼 상황은 개선되지 않는다. 여전히 고민은 넘쳐나고, 걱정거리 역시 사라지지 않는다. 믿음으로 두려움을 이겨내라고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가. 애초에 믿음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기에, 눈에 보이는 문제들은 우리의 마음을 언제나 더 쉽게, 더 빨리 휘젓는다.
믿음은 불안과 두려움을 제거하는 도구가 아니다. 그것들을 품고 살아갈 수 있는 힘이다.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런 것들을 해결해 주시기를 빌고 구하지만, 또한 그렇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앉아서 기다리지만은 않는다. 하박국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 길지 않으면서도, 하박국의 전체적인 내용을 잡아가는 데 훌륭한 도움이 될 만한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