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저자의 이런 주장들은 명백한 한계가 보인다. 우선 목회자가 없다고 해서, 저자가 불만을 느끼는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되지는 않는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목사가 되기 위해서 받은 훈련과 교육은 간단히 대체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다. 또, 평신도들 가운데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대학 시절 우연히 그리스도의 교회 계통의 모임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상대는 내가 신학생이라는 걸 모르고서 초대를 한 것 같은데, 가보니 한 대학교의 빈 강의실에서 몇몇 대학생들이 모여 예배를 진행하고 있었고, 그 예배의 진행은 선배로 보이는 조금 더 나이를 먹은 남학생이 이끌고 있었다. 흥미가 생겨서 몇 가지 질문을 했는데, 그게 조금 날카로웠던지 그 학생은 약간 흥분한 듯 했고, 그대로 인연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그 때 내가 물었던 질문 중 하나는 이랬다. 신학을 따로 공부하지 않은 분이 설교를 하신다고 했는데, 그러면 그분이 신학적을 일탈하게 되면 누가, 어떻게 교정할 수 있는가. 모든 걸 좋은 쪽으로 생각하려는 건 그 자체로 나쁜 일은 아니지만, 우리가 아는 수많은 이단들도 다 그런 식으로 시작되었다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이 책의 저자가 그 중 한 명이 될 거라는 말은 아니지만, 처음엔 좋게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중간에 어떻게 길을 잃을 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또, 이런 식의 환원주의 비슷한 논지를 주장하는 분들은 교회의 역사가 마치 처음 1세기 정도 제대로 진행되다가 수백 년(또는 천 년 이상) 길을 잘못 들었고, 이제야 (본인에 이르러서) 다시 제 길을 찾은 것처럼, 지나치게 단순화된 역사 모델을 지니고 있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 같은 사건을 언급하면서, 뭔가 교회에 본질적인 문제가 일어났던 것처럼 설명하기도 하고.
이런 몰역사적 관점은 하나님께서 지난 2천 년 동안 교회를 통해서 이루신 일들을 너무 쉽게 무시하는 오류다. 교회의 조직은 나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의 신앙 선배들이 고민하고 도출해 낸 결과물의 집합이기도 하다. 물론 이런 형식은 현실에 맞춰서 끊임없이 개선되고 변해야 한다. 하지만 그 또한 역사적인 적층물 위에 서는 것이지, 우리가 당장 사도행전의 시대에서 이어지는 게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