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로”란 우리말로 갈림길을 말한다. 몇 개의 길이 교차되어서 선택에 따라 다양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지점이 갈림길이다. 이 책에서 다루는 2세기 기독교의 상황이 꼭 그랬다는 의미일 것이다. 저자는 기독교가 발흥한 1세기와 사실상 로마의 공식종교가 되었던 4세기 사이의 시기에, 그 중에서도 2세기에 집중한다.
저자가 보는 2세기는 기독교가 본격적으로 형성된 시기이다. 아직 기독교가 공인되려면 200년은 더 기다려야 했던 이 시기, 물론 여러 면에 있어서 아직 공고한 체계를 이룬 것은 아니지만, 이후 보이는 교회 내 다양한 요소들이 어느 정도 형성되던 시대라는 것.
책의 첫 두 장에서는 당시 교회 구성원들의 사회적 위치(사회적 하층민들이 많았지만, 일부는 잘 교육받은 상류층이었고, 여성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이질적으로 다가왔을 기독교의 내용(기존 로마의 종교와 전혀 다른, 사회의 안정성을 약화시키는 위험한 운동이라는)을 설명한다.
본격적으로 내용이 흥미로워지는 건 3장부터다. 3장에서는 2세기 당시 교회의 리더십에 관한 내용으로 시작하는데, 저자는 여전히 강한 이교문화(당시 로마는 최전성기였다) 속에서 새로운 종교운동을 지켜낼 수 있었던 데에는 지도자들의 역할이 중요했다고 지적한다. 당시 교회들은 여러 크기와 형태로 가정교회들의 느슨한 연합 형태로 존재했고, 어느 지역의 지도자도 다른 지도자들에 비해 특별히 더 우위에 있었다는 증거는 없지만, 개별교회의 지도자들 사이에는 매우 빈번한 소통이 있었다.(이 점은 오늘날 교회들도 좀 배웠으면 하는 부분이다)
4장과 5장에서는 이단과 정통의 문제를 다룬다. 이단과 정통은 단지 힘겨루기에서 이긴 쪽이 멋대로 규정한 것에 불과하다는 (요새 유행하는 수정주의적) 얄팍한 주장의 부족한 근거를 지적하면서, 이미 이 시기 어느 정도 교회들 사이에 공유되는 핵심적 교리들이 정리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6장과 7장은 당시 교회의 특징 중 하나인 텍스트 중심의 문화 부분을 되짚어 보는 내용이다. 의례 중심이었던 그리스, 로마의 종교와 달리 기독교는 처음부터 (성경을 포함한) 다양한 문서들을 중요하게 여겨왔고, 동시에 새로운 종교적 문서들을 많이 생산해 냈다는 내용.
다분히 학자다운 겸손함으로, 이 책이 개론서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으며 제한적인 주제만을 다루고 있다는 단서를 붙이고 있지만, 책은 2세기 지중해 세계의 기독교인들의 신앙생활에 관해 좋은 그림을 그려주고 있다. 특히나 2세기 중심으로 그 전후의 다양한 1차 사료들을 풍성하게 이용하면서 학문적으로도 주목할 만한 결과물을 보여준다.
특히나 흥미로웠던 부분은 4장과 5장이었다. 역사학계 전반에 수정주의적 견해가 유행하면서, 기독교 역사와 관련해서도 무조건 통설을 뒤집는 신박한 주장을 하는 것이 뭔가 특별한 것처럼 여겨지는 느낌이다. 특히나 일부에서는 반기독교 정서와 연결되어서 오늘날 정통으로 여겨지는 쪽을 깎아내리는 주장으로 전용되기도 한다.
저자는 정통과 이단의 기준 자체가 없었다는 나이브한 주장을 차근차근 반박하면서 당시 실제의 상황을 논리적 정합성을 갖춰 재구성해 낸다. 온통 구성주의에 기초한 파괴적 창의성이 남발하는 이 바닥에서 간만에 편안하게 읽을 수 있었던 책.
이제 차분히 물어야겠지요.
정치 환멸이 퍼질 때 이익을 보는 사람은 누구인가를.
혹 그들이 정치 환멸을 유도하는 것은 아닐까를.
아울러 그 결과까지 종종 되새김질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치에 환멸을 느끼며 멀리할 때
결국 특권과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자신의 삶이 좌우되는 상황을 맞게 되니까요.
정치는 우리의 무시에 반드시 보복하거든요.
'정치 무시의 정치'랄까요.
- 손석춘, 『손석춘 교수의 민주주의 특강』 중에서
기윤실에서 윤리연구소라는 것을 운영하는가 보다. 그리고 연구소니까 정기적으로 연구의 결과물들을 일종의 논집 비슷하게 출간하는 것 같고. 이 책은 그 시리스의 세 번째라고 한다. 앞서의 두 권은 기윤실에서 자체적으로 냈고, 이번 책은 야다북스에서 출간한 모양.
이번 책의 주제는 “환대”다. 여덟 명의 저자들이 한 챕터씩을 맡아 같은 주제 아래 쓴 글을 모았는데, 대부분이 현직 교수들이고, 작가와 목사도 보인다. 교수진의 전공과목들은 철학, 인문학, 스포츠청소년지도학(이분은 청소년에 관한 글을 쓰셨다) 등으로 다양하고, 책의 내용으로 들어가 보면 AI나 청소년정책, 심지어 영화 속 이주여성에 대한 차별이나 동양사상 속 환대의 의미까지 꽤 다양하다. 말 그대로 문집 느낌.
왜 “환대”일까 하는 질문의 대답은 너무나 쉽다. 역설적으로 우리가 대혐오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정체성을 중심으로 자기를 규정하기 시작하면서 사회는 모래알처럼 흩어지고 있다. 잠시 누군가 물을 뿌리면 뭉치는 것 같지만, 그나마 금세 건조한 바람에 날아가고 만다.
거의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정치적 갈등도 많은 문제를 일으키지만, 이즈음(사실은 역사가 꽤 오래되었지만) 교회도 이 문화전쟁에 참여해서 혐오를 확대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조각내는 데 일조를 하고 있다. 세상의 갈등이야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긴 하지만, 교회가 이래도 되는지 우리는 끊임없이 묻고, 개혁해 나가야 하지 않을까.
다만 이 책이 구체적인 제안을 담고 있는 건 아니다. 청소년 정책을 다룬 5장 정도를 제외하면 대체로 이론적이고, 철학적인 내용들이 주가 된다. 레비나스의 이론에서, 동양의 고전인 “대학”에서 환대의 개념을 이끌어 내는 건 우리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어떤 힘을 더해줄까? 사실 각각의 글들 자체에도 실천적인 내용들은 조금 부족해 보인다. 이제까지 읽어왔던 야다북스의 책들과는 조금 다른 결이랄까. 그리고 전체로 놓고 보면 환대라는 주제로 간신히 묶어놨구나 하는 느낌도 준다.
개인적으로 가장 재미있게 봤던 건 영화 “미씽”을 소재로 해서 한국사회의 이주여성들에 대한 시선을 비판적으로 검토한 6장이다. 이 영화는 개인적으로도 추천하는 영화 목록에 넣어둘 정도로 좋은 작품인데(동명의 드라마와는 전혀 다른 내용이다), 2026년에 이 영화의 이야기를 다시 들으니 새삼 반갑다.(영화는 2016년에 개봉했다)
영화 속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는,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해결이 난망한 것 같다. 오히려 최근에는 2, 30대를 중심으로 혐중정서가 더욱 극성인 걸 보면 가까운 미래에도 우린 이 문제의 해결을 보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 보이기도 하고(젊은 세대의 극우화가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조만간 우리 사회의 폭탄으로 작용할 것 같다).
주제 의식도 분명하고, 적절한 예시와, 실천적인 적용과 성경적 연결까지 전반적으로 괜찮았던 글이었는데, 다른 글들도 이 정도였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얼마 전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한 커피 체인에서 멍청한 광고를 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 언제까지 진행될지 모르는 불매운동으로 매출도 꽤 줄어든 것 같고, 보다 심각하게는 경영권에 문제가 생길 지도 모른다는 말이 나오기도 한다. 회장이라는 사람이 워낙에 화려한 전적을 가지고 있었기에 대중은 더욱 의심을 하고 있다.
사안이 사안인지라, 시간이 흘러도 좀처럼 사건이 잠잠해지지 않자, 마침내 일주일도 더 지나서 회장이 공개석상에 나와 사과문을 읽었다.(대체로 사과를 한 것 같지는 않다는 게 중론이다) 시간도 늦었는데, 이번에는 사과문의 내용도 지적을 당한다. 미안하기는 한데, 이 문제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도 있지 않겠느냐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중이 그 사과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우리는 진정성을 중요하게 여긴다. 누군가 진정성을 갖고 있다고 하면, 그에 대한 평판이 좋아지고, 그가 하는 말과 행동을 호의적으로 바라본다. 그런데 과연 이 진정성이라는 것은 어떤 한 사람을 평가할 수 있는 좋은 기준일까? 이 책은 이 질문을 정면으로 던진다.
진정성이라는 무엇일까? 오늘날 이 단어는 각자 “자신의 진실에 따라 살아라” 정도의 의미로 사용되는 것 같다. 그런데 이런 기준이라면 앞서 언급한 회장도 나름의 진실성/진정성을 가지고 대중 앞에 나온 것이다. 최소한 그는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가 평소가 갖고 있던 생각을 그대로 드러냈으니까.
서문에서 저자는 한 작가의 글을 인용하면서, “진정성 이전에는 성실성이 있었다”고 말한다. 남을 속이지 말고, 정직하게 사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말이다. 애초에 진정성이란 그 자신 말고 다른 사람이 다 알 수 없는 영역이다. 그가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누가 알겠는가.
책은 이 진정성이라는 것이 다양한 영역에서 얼마나 오염되고, 제멋대로 생각되고 있는지를 흥미롭게 보여준다. 특히 셀럽 문화의 중심에 있는 다양한 사람들(그놈의 “킴 카다시안”!)과 그들을 바라보는 대중의 기이한 반응들을 읽다 보면 이 진정성이 얼마나 많은 정의를 갖고 있는지, 그래서 사실상 별 의미가 없는 단어가 되어버렸는지를 깨닫게 된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누군가에게 요구하는 “진정성”이란, 결국 그냥 그가 우리의 마음에 드는 방식으로 말하고 행동하기를 바라는 것과 다르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문제는 그 ‘우리의 마음’도 시시각각 변한다는 것. 한 때 진정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지던 다양한 “제품들”(책에는 힙스터들의 아이템이 언급된다)은 시간이 지나면 또 그저 촌스러운 무엇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연예인들을 바라보는 대중의 변덕스러움은 또 다른 증거이고.
물론 이렇게 보면 ‘진정성’이라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식으로 읽힐 지도 모르겠다.(실제로 책에는 그런 뉘앙스가 좀 보이긴 한다). 그러나 이건 앞서 언급했듯, 진정성을 그저 나 자신이 바라는 것이라고 모호하게 정의하는 현대적 견해에 따른 것이지, 진정성을 정직하고 성실한 태도와 행동으로 보는 좀 더 오래된 전통적 견해로 보면 좀 다른 이야기가 된다.
다만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식으로 진정성을 정의하는 일이 계속 이어진다면, 우리는 좀처럼 합의를 이룰 수 없는 갈등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책에는 꽤 흥미로운 예시들이 등장하는데, 이른바 “문화적 도용”, “성 정체성” 같은 것들. 애초에 이민 2, 3세대라면 그들이 주장하는 문화적 유산과의 유대는 이미 빈약해진 상황인데도 누군가 자신들이 전유하는 문화적 양식을 조금 따라한다고 도용 운운하며 비난하는 게 우스운 일이라는 것.
진정성이란, 우리가 서로 만나서 손을 잡을 수 있게 하는 요소가 되어야지, 서로의 차이를 더욱 부각시켜 대립과 싸움만 일으키는 데 사용된다면, 그들이 말하는 진정성은 그저 누군가를 괴롭히기 위한 핑계가 될 뿐이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진정성 논의를 의미 없는 것으로 볼 필요는 없다. 문제는 언제나 도를 넘는 태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