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부적 재능이나 사회적 지위에 의해 혜택을 받은 자는
그렇지 못한 자의 처지를 향상시킨다는 조건 아래서만
자신의 행운으로부터 이익을 얻을 수 있다.
아무도 자신의 우수한 천부적 능력을 당연시할 수도 없고
사회적으로 유리한 출발 지점에 서는 등의 덕을 보아서는 안 된다.
이것이 정의에 대한 롤스의 확고한 판단이다.
- 황경식, 『존 롤스 정의론』 중에서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빈번히 목격할 수 있는 광경 가운데 하나가
세상 냄새 나는 지혜로 가득하여
거룩한 어린이다움은 물론
천진난만한 인간미마저 사라져 버린 마음을 가진
아이들의 얼굴입니다.
어린이다움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 조지 맥도널드, 『전하지 않은 설교』 중에서
유명한 신학자 몰트만의 마지막 책이라는 홍보문구가 눈에 먼저 들어왔던 책. 지난 2016년 아내가 세상을 떠나면서 노령의 신학자는 죽음이라는 주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던 듯하다. 물론 그가 이전에 부활이라든지, 영생 같은 주제들에 대해 사유해 본 적이 없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아무래도 평생을 함께 해 온 배우자의 죽음이란 조금은 다르게 와 닿지 않았을까.
때문에 책 초반의 논지는 죽음과 사랑에 관한 내용이 중심을 이룬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보이지 않는 세계 안에 죽은 이들이 두 번째 존재해 있다면 남은 이들도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문장에서는 본인 자신을 향해 쓴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두 번째 삶”으로 이어지는 생명은 다른 말로 "영원한 생명"이기도 하다. 그것은 단순히 생명이 유지되는 기간을 늘리는 것과는 다르다. 영원한 생명은 영원한 생동성으로 가득한 강렬한 체험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이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해 이미 시작되었다. 그분은 정말로 죽음을 멸하셨다! 이제 그분을 믿는 이들 또한 그분이 시작한 부활의 행렬을 따라가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서 저자는 이 부활의 시작 시점에 관한 독특한 의견을 제시한다. 우리는 죽음의 순간에 부활한다는 것. 정확한 문장은 "우리는 우리의 무덤에서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순간에 부활한다"이다. 이는 통상 죽음 이후 일정한 기간이 흐른 후 혼 세상의 마지막 날이 이르렀을 때에 비로소 부활한다는 기독교 내 인식과 차이가 있다. 몰트만은 어떤 유예기간이 없이 죽음과 동시에 부활이 일어난다고 주장한다(물론 이런 주장이 몰트만이 처음은 아니다).
우리가 죽음과 부활을 이런 식으로 인식할 때, 죽음은 더 이상 두려워할 것도 슬퍼하고 괴로워할 일이기만 한 것이 아니게 된다. 저자는 여기에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는 누가복음 20장 38절에 실려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한다. 영원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이 보실 때 우리는 죽지 않았다.
논문이라기보다는 신학 에세이적 성격이 강한 글이지만, 저자는 자신의 논지를 전개하며 다양한 성경구절로부터 지지를 구한다. 물론 이 주제와 관련해서 저자의 주장과는 다른 방식의 부활과 영생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들도 또한 읽을 수 있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저자와 비슷한 견해를 갖고 있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인정한 사형수에게 "오늘" 네가 낙원에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시기도 하셨다.
이런 부활신앙은 단지 우리의 미래에만 관련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시작되었고, 또 온 우주적 완성을 기다리는 일이긴 하지만, 또한 미래로부터 오늘 우리에게로 침투해 들어오는 무엇이다. 내가 좋아하는 로마서의 한 구절에 따르면,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다. 이미 우리의 오늘 또한 주님에게 속해 있다는 말이다.
조금은 갑작스럽게 끝나는 이 책의 마지막 문장에서, 저자는 이사야와 바울을 아름답게 조화시키며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어둠 가운데 있는 "빛의 자녀들"이며, 따라서 우리가 완전히 빛 속에 서 있을 때까지 창조 세계에서 어둠을 마침내 몰아내는 빛의 도래를 희망 속에서 증언하는 자들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오늘 어둠 속에서 부활과 영생의 빛을 증언하는 모습이어야 한다. 어쩌면 오늘날의 교회가 보이는 윤리적 실패는 이런 영생에 대한 믿음 없음의 결과는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