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타루의 빛
요시노 히로시 감독, 마츠유키 야스코 외 출연 / 에스와이코마드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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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줄거리 。。。。。。。   

 

     직장에서는 싹싹하고, 깔끔하게 자기 일을 처리할 줄 아는 호타루. 하지만 집에만 들어오면 츄리닝으로 갈아입고는 뒹굴거리며 좀처럼 일어날 줄을 모르는 일명 ‘건어물녀’다. 그런 호타루와 같이 살고 있는 타카노는 이탈리아 로마로의 신혼여행을 계획하지만, 툇마루에서 뒹구는 걸 무엇보다 좋아하는 호타루에게 어디 그게 쉬운 일이겠는가.

 

     그러나, 회사 동료로부터 타카노의 일생의 꿈이 로마 여행이라는 소문을 들은 호타루는 전격적으로 로마행을 결심한다. 하지만 가는 비행기 안에서부터 심상치 않았던 신혼여행은, 도착한 민박집에서 만난 또 다른 건어물녀 리오를 만나면서 이상하게 꼬이기 시작한다.

 

 

 

 

2. 감상평 。。。。。。。   

 

     뭘까 이 정신 없는 영화는. 연애세포가 마른 오징어나 북어처럼 말라버린 건어물녀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는데 급급했던 영화는(원래는 동명의 드라마가 먼저라고 한다), 그 공감되지 않는 캐릭터에 모든 걸 걸어버리는 도박을 했고, 그 결과는 참담하다. 영화 전체에 흐름은 전혀 연결되지 않고, 사건들의 전개는 난해하며, 당연히 뭔가 의미를 담아내는 데도 실패하고 말았다.

 

     시종일관 혀 짧은 소리로 ‘부장, 부장’만 남발하는 여주인공의 캐릭터는 점점 짜증을 불러일으키고, 노골적인 B급 코미디를 지향하고 있으면서도 뜬금없이 제멋대로 진지해지는 장면을 집어넣는 식의 진행은 한숨이 나올 지경. 한 마디로, 어설프게 트렌드에 편승해서 그닥 깊은 생각 없이 만든 영화랄까.

 

 

 

 

     소재가 나쁘다거나, 주제에 문제가 있다는 것과는 좀 다른 이야기로, 전반적으로 수준 미달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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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takes a deep commitment to change

and an even deeper commitment to grow.

- Ralph Ellison

 

 


변화를 위해서는 깊은 헌신이 요구되고,

성장을 위해서는 더 깊은 헌신을 요합니다.

- 랄프 엘리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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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줄거리 。。。。。。。   

 

     고등학교 2학년인 호야와 서야는 쌍둥이 남매다. 동생인 서야는 오빠인 호야를 단순히 친오빠 이상의 감정으로 바라보게 되고, 호야는 그런 서야의 마음을 알면서도 어정쩡한 자세로 결정적인 상황을 피하기만 한다. 얼마 후 호야는 학교의 다른 친구인 도미와 사귀기로 하고, 서야는 그런 호야를 보며 충동적으로 권투부 주장 일강과 만나기 시작한다.

 

     불안불안한 상황이 좀 더 지속되지만, 결국 서야는 일강과의 관계를 정리하게 되고 얼마 후 임신을 하게 된 사실을 알게 된다. 낙태를 하고 돌아온 호야와 서야. 호야는 복잡한 문제를 잊어버리기 위해서였는지 체육관에 등록을 해 권투를 배우기 시작하고, 마침내 링에서 일강을 만나게 된다.

 

 

 

2. 감상평 。。。。。。。   

 

     쌍둥이 오빠를 좋아하는 여동생이라는 설정이 주는 충격 때문일까. 영화의 나머지 부분은 이 중심 소재를 장식하기 위한 액세서리에 불과하다는 느낌이 든다. 그만큼 어떤 필연적인 이유 따위는 등장하지 않고 그냥 임의적이다. 뜬금없이 권투를 시작하는 남자 주인공의 선택도 좀 의아하고, 그런 남자주인공을 따라 다니는 예쁘장한 여자친구도 그렇고, 서야를 따라다니던 학교 최고의 인기남 일강의 성격도 불분명하다.

 

     뭐 일단 근친 간의 사랑이라는 소재를 등장시키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감독이 그걸 어떤 식으로 해석하고 풀어나가는가 인데, 이 영화는 그 역시 불분명하다. 호야에 대한 서야의 감장은 어른이 되기 직전의 소년 소녀들의 불안한 심리 때문인가, 그래서 문제는 그런 열병을 앓고 나면 자연스럽게 사라진다는 말인가, 아니면 진정한 사람에는 과연 국경도, 인종도, 심지어 혈연도 벽이 될 수 없다는 것인가(다만 현실의 벽에 막혀 스스로 포기하는 것인가). 영화를 보는 내내 그런 답답함이 있었고, 이는 배우들의 연기에서도 느껴진다. 그들은 이해가 됐을까?

 

 

 

     인터넷을 돌아다니던 중 이 영화에 관한 감상을 쓰면서 동성애라는 주제와 함께 놓고 보려는 흥미로운 글을 보게 됐다. (→ http://wifu.tistory.com/971) 글쓴이는 동성애의 경우는 단지 ‘성적 취향’일 뿐이고,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일이니 문제시 하면 안 된다고 말하면서도, 이 영화에서 다루고 있는 근친 간의 사랑은 ‘의지에 관한 문제’이므로 경우가 다르다고 말한다.

 

     문제는 이 자의적인 기준이 전혀 일관성도, 타당성도 없다는 점이다. 왜 동성애는 의지의 문제가 아니고 근친 간의 사랑은 의지의 문제라는 말인가? 남자가 남자를, 여자가 여자를 성적으로 사랑하는 것이 문제되지 않는다면, 오빠가 여동생을, 남동생이 누나를 성적인 상대로 보는 것은,(혹 아버지가 딸을, 아들이 어머니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왜 문제인가? 앞서의 글쓴이는 근친간의 사랑은 그것을 금지하더라도 ‘대안’이 많으니 괜찮다는 식으로 말하지만, 사랑이라는 게 언제부터 ‘대안’을 생각하며 하는 것이 되었다는 걸까. ‘난 당신 없으면 안 돼’라는 결연한 의지가 사랑 아니던가?

 

     결국 사랑을 그저 온전히 의지나 선택이라는 이유로든, 결정이라는 이유로든 동성애를 정당화하려는 논리는 근친상간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게 정직한 전개다. 그 논리 안에선 서로 이성적으로 사랑하는 아버지와 딸을 어떻게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

 

 

     영화는 한 없이 헤매고 있다.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았는데 모두가 해결된 척 하고 영화를 마친다. 모든 문제는 그냥 서야가 처음부터 마음만 돌렸으면 해결되는 것이었던가? 서야는 왜 마음을 돌렸고, 도미는 왜 호야를 포기하지 못하며, 사귄지 며칠 됐다고 덜컥 임신까지 해버린 건, 주민등록증이 나오면 기념으로 섹스를 하겠다는 여고생의 당찬(?) 포부는 도대체 어디에서 온 거고, 그냥 가볍게 웃으며 넘어가면 되는 건가.(이 와중에 도미 역으로 나온 엄현경이란 배우는 참 귀엽게 나온다;;;)

 

     소재 말고는 딱히 보여주는 게 없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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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와 쉐퍼의 대화
스콧 버슨, 제리 월즈 지음, 김선일 옮김 / IVP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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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약      

 

     ‘변증’이란, 특별히 기독교 신학용어로서의 변증이란,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기독교 교리의 타당성과 합리성을 변호하고, 그 사실성을 증명해내는 일련의 노력들을 가리킨다. 기독교 공동체는 일찍부터 적극적으로 기독교 교리를 변증해내는 데 관심을 가졌고, 초기 기독교 교리의 정립에 소위 ‘변증가’들이 큰 역할을 감당하기도 했다.

 

     이 책은 현대 기독교 안에서 가장 유명한 두 명의 변증가인 C. S. 루이스와 프랜시스 쉐퍼를 한 테이블에 놓고 비교, 대조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 생전에 단 한 번도 두 사람이 만나 본 일이 없었다는 아쉬움을, 그들의 저작을 통해 간접적으로 가상의 대화를 만들어 낸 것이다. 다만, 물론 조금 후세대인 쉐퍼의 경우 루이스를 몇 번 인용하기도 했지만, 실제 대화만큼의 주고받음이 없다는 건 좀 아쉽다.

 

     공저자들은 몇 가지 항목을 설정하고 이 두 사람의 입장을 이에 맞추어 분석해 나간다. 책은 두 사람의 업적을 찬양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들의 한계와 미흡한 부분까지도 아울러 담아내려고 노력했다.

 

 

2. 감상평    

 

     기독교 세계관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책 좀 읽었다 하는 기독교인이라면 C. S. 루이스나 프랜시스 쉐퍼 같은 이름은 한두 번쯤 들어왔을 거다. 나 역시 C. S. 루이스의 팬이기도 해서, 홍성사를 통해 나온 그의 전집은 거의 모두 구입해서 책장 한 칸은 완전히 그를 위해 준비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니까. 사실 이 책을 구입하게 된 이유도 바로 루이스 때문이었다. 이젠 그의 이름이 들어간 책이면 다 사 보는 지경에 이르렀다!

 

 

     책은 변증가로서의 두 사람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있다. 그들이 쓴 많은 저작들을 두루 살핀 후, 그 안에 담긴 주장들을 하나의 논리로 다시 풀어내고는 두 사람의 주장이 얼마나 일관성이 있고, 체계적인가를 평가해 낸다. 쉽지 않은 작업을 한 저자들의 노고에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바로 그런 작업 방식 때문에 루이스와 쉐퍼의 의도에서 벗어난 결론들을 이끌어내고 그것을 바탕으로 평가했던 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물론 루이스나 쉐퍼의 사상에 어떤 오류나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그들도 각자가 서 있는 신학적 입장이 있고, 그 위에서 자신들의 논리와 상상력(특히 루이스의 경우)을 전개했으니까. 하지만 그들이 쓴 각각의 책들은 그 원고가 가리키는 방향들이 미묘하지만 다른데, 이 책의 저자들은 그 모든 것들을 자신들이 만든 기준 안에 집어넣으려고 하고 있다.

 

     특히 예정과 자유의지라는 주제에 집착한 나머지, 두 사람의 모든 사상과 저술들을 이 카테고리 안으로 억지로 넣으려고 하는 듯한 모습이 보인다. 더구나 이 문제에 관해 저자의 신학적 배경(웨슬리안)을 강하게 드러내면서, 쉐퍼의 정통적인 장로교주의적 해답을 지속적으로 공격하고, 반대로 루이스의 성공회적 평신도의 입장(잠정적인 판단 유보)은 반복적으로 옹호한다. 아마도 그의 입장이 저자들의 신학적 입장과 비교적 부합하는 면이 많았기 때문이리라. 물론 책의 후반에 ‘축적 사례 논증’이라는 개념을 들고 나와서 앞서의 (조금은 편향된) 비판적 시각을 약간 누그러뜨리기도 하지만.. 글쎄 이런 형식은 일관된 건지.

 

 

     책은 오늘날 이 시대에 맞는 변증의 모습을 고민한다. 변증이란 게 어차피 그 시대의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담아내려고 했던 시도니까, 언제까지나 과거의 방식과 대답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는 게 맞다. 그런 의미에서 이전 세대의 탁월한 이들이 남긴 업적들을 창의적으로 계승하고 발전시키려면 우선 이 책처럼 그 내용들을 잘 분석하는 작업이 앞서야 하는 거니까.

 

    여느 책도 그렇겠지만, 차분히 따져가며 읽어보면 유익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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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가 하나님을 너무 사랑함으로 보고 싶어

육체가 병들 수도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들에게

성경이 보이면 얼마나 보이겠는가?’

 

- 존 오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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