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을 추모하고 기리는 책과 영화가 제법 많이 나왔다. 아마 역대 대통령들 중 가장 많지 않을까 싶을 정도. 내가 본 것만 해도 책으로는 유시민이 대표로 정리한 노무현 김정일의 246, 사후 자서전 격인 운명이다, 추모 에세이집인 그가 그립다, 노 전 대통령의 초기 활동을 다룬 노무현의 시작이 있고, 영화 쪽으로는 역시 가장 유명한 송강호 주연의 변호인, 술 한 잔 하면서 그에 관한 기억을 털어놓는 듯한 분위기의 무현, 두 도시 이야기, 그리고 노무현의 가장 찬란했던 순간을 기록한 노무현입니다까지 제법 여러 편이다.

     또 한 편의 노무현 전 대통령에 관한 이 영화는 어떤 차별점을 가지고 있을까. 내용상으로는 국회의원으로서의 초기 유명한 일화들과 민주당 대선 경선 승리의 과정까지를 다뤘던 영화 노무현입니다와 비슷한 궤를 타고 진행되지만, 승리의 과정에서 바로 죽음으로 뛰어넘어갔던 노무현입니다와는 달리 이 작품은 대통령직에 오른 후부터 집요하게 이어져 온 조롱과 공격 부분을 피해가지 않는다.

 

 

 

     고졸 출신으로 사시에 합격해 변호사로, 국회의원으로, 대통령에까지 이른 노 전 대통령의 이력은 확실히 이례적이다. 그는 고등학교, 대학교를 중심으로 서로 밀고 끌어주는 학맥에서 벗어나 있었고, 그의 행보는 소위 주류 정치인들과도 조금 달랐다. 이건 소수의 엘리트(여기서 이 말은 우월이라는 개념과는 상관이 없고, 그저 배타적인 특권층이라는 의미다)지배를 바라던 이들의 비위를 거스르게 했다. “자신은 노무현을 대통령이라고 생각해 본적이 없다며 노골적인 무시와 폭언을 쏟아내던 김무성이나, 사상 초유의 현직 대통령을 조롱하는 연극 환생경제을 공연했던 나경원, 이혜훈, 주성영, 심재철, 송영선, 정두언 등등, 그리고 노 전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되는 순간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던 박근혜 같은 이들이 대표적.

     애초부터 권력층 편향이 짙었던 부족한 자질의 자칭보수언론들은 물론, 이상주의에 빠져, 혹은 이틈에 자신들의 존재감을 뽐내려고 했던 진보언론들도 대통령을 물어뜯기 바빴다. 대통령이 추진하려는 거의 모든 정책은 비난을 받았다. 그 정책의 내용이 정확히 뭔지 아는 사람은 물론 모르는 사람들에게까지. 당시 대학에 다니고 있었는데, 아는 교수님과 식사를 하던 중 종부세 이야기가 나오자 언론이 만들어 놓은 세금 폭탄프레임을 언급하며 반감을 보이셨던 기억이 있다. 잘 해야 연간 10만원 정도 세금을 더 내야 하는 게 전부였을 텐데도.

 

 

 

 

     그런데 영화에서는 이런 문제가 단지 언론과 반대파 정치인들에게만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심지어 그를 열렬히 지지해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던 팬클럽 노사모에게도 있었다고 말한다. 인터뷰로 구성된 영화의 출연자 대부분이 노사모 회원들이었는데, 일부는 이제 할 일을 다 했다고 여기고 실제로 탈퇴까지 했다고 한다. 결국 사방에서 공격받는 대통령의 편에 서 줄 사람이 하나도 없었던 것. 인터뷰이들은 그 때 자신들의 선택을 떠올리며 하나같이 후회의 눈물을 흘린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누가 최고통치자로 선출되는냐가 전부가 아니라, 시민들 개개인의 정치의식과 참여 수준에 따라 결과가 나온다는 걸 그 땐 정확히 몰랐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이 영화는 단순히 한 사람을 추모하는 영화가 아니라, 일종의 정치교육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지켜내지 못했다는 후회를 곱씹는 데 머물지 않고, 허황된 프레임이나, 노골적인 비난공세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가르쳐 주는 기능도 하고 있으니까.

 

 

 

     ​그런데 또 한 편으로는 영화가 종교영화가 되려고 하는 느낌도 드는 게 살짝 우려스럽기도 하다. 노 전 대통령의 비극적인 죽음이 주는 충격이 워낙에 컸기 때문인지, 그 이후 지지층에서 그에 관한 비판적 고찰은 상당히 부족하다. 거의 대속적 죽음이고, 우리의 죄가 그를 죽였다는 식의 느낌이랄까. 시종일관 찬양과 숭배로 나아가려는 충동이 느껴진다. 그에 관한 책들을 보면서, 현실주의자로서의 노무현 전 대통령이라는 인상이 강했는데, 그가 살아있었다면 과연 이런 분위기를 좋아했을까 싶다.

 

     ​그는 순교자가 아니다. 그는 자신을 딛고 사람들이 좀 더 나아가기를 바랐지만, 그를 순교자로 만드는 순간 우리는 그를 밟을 수 없게 되어 버린다. 그는 목표가 아니라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표지판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를 잘 지나서, 그가 가리켰던 방향이 정말로 옳은지를 분별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 이루어졌던 공격들이, 거의 그대로, 이제 문 대통령을 향하고 있다는 점이 묘한 기시감을 준다. 여전히 김무성은 청와대에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려야 한다고 선동질을 하며 대통령을 부정하고 있고(이 사람은 그러고 보면 자기 말고는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자기성애자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언론의 거짓 프레임 공세도 그치지 않는다. 여기에 온갖 목소리로 가득한 인터넷이나 거리에서도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줄 모르는 극단주의자들이 신나게 떠들고 있으니... 우리는 이전 그 자리에 머물지 말고 확실히 앞으로 좀 더 나아가야 한다. 적어도 똑같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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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감상평 。。。。。。。

     타노스의 인피니트 스톤 사용으로 인류의 절반이 사라는 사건이 발생한 지 수년 후, 남은 이들은 극심한 죄책감과 무력감에 빠져 있었다. 여기에서 갑자기 등장한(돌아온) 앤트맨. 과거 단독영화(앤트맨과 와스프) 말미에 살짝 등장했던 양자 얽힘 현상으로 인한 시간여행의 가능성을 들고 나와 문제를 되돌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던진다. (사실 여기까지는 이미 이런저런 경로로 예측되었던 내용이다)

     그 작은 가능성에 모든 것을 걸기로 한 남은 히어로들. 타노스보다 먼저 스톤을 모아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리기 위한 싸움에 나선다

 

 

 

2. 감상평 。。。。 。。。

 

     ​영화의 시작부분은 처참하다. 야구장은 버려졌고, 모든 것이 그 자리에서 멈춘 것 같았다. 그런데 여기서 눈에 띄었던 것은 영화가 사라진 사람들을 기억하는 방식이었다. (사실 인구의 절반이 갑자기 사라진다면 당장 경제적으로 엄청난 후퇴가 일어남에도) 그들은 오랫동안 공을 들여 사라진 사람들의 이름을 새기고 보존하려고 애쓴다.(여기에 또 얼마나 많은 행정력이 들어갔을까)

     어쩌면 그렇게 기억하는 것이 남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사명일지도 모르겠다. 9.11 테러 이후 그라운드 제로가 만들어지고, 건국 후 이스라엘에 홀로코스트 희생자들과 그들을 도운 이들을 기억하기 위해 야드바쉠이 세워졌던 것처럼, 영화 속 생존자들은 공원을 만들고 수백 개의 기념석을 세운다.

 

     ​잊어버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우리는 흔히 큰 사고나 고통, 상처를 치료하면서 상처가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상태를 목표로 달려가려고 한다. 이건 신체적인 상처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충격에도 마찬가지여서, 생존자들에게 끊임없이 잊으라고 강요하기까지 한다. 한 구석의 추모를 위한 작은 공간을 마련하는 것마저 조롱받는 게 현실이다. 과연 그렇게 상처를 덮고, 잊는 것이 공동체를 위한 일일까?

     영화는 기억이라는 주제를 제법 중요하게 다룬다. 타노스는 인류의 절반을 날려버렸지만, 여전히 남은 절반은 사라진 이들을 기억하고 있다. 그들이 기억을 하고 있는 한, 타노스가 원하는 일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망각이 아닌 기억이 죽음으로부터(‘타노스라는 이름과 그가 행한 일은 그리스어로 죽음을 뜻하는 타나토스를 떠올리게 한다) 그들을 지탱시켜준다. 남은 이들은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싸울 수 있었고, 그 기억은 포기의 순간을 넘길 수 있는 힘이 된다.

 

 

 

     모든 것을 지우려는 이와 기억하려는 이들 사이의 싸움은 결국 기억하는 이들의 승리로 끝난다. 그 과정에서 또 다른 희생도 있었지만(이 역시 매우 중요한 전통적 주제다), 그들 역시 남은 자들에 의해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물론 이 과정이 강요되어서는 안 된다. 예컨대 대를 위해 소가 희생해야 한다는 식의.)

 

     ​사실 뭔가를 완전히 잊어버리는 일은 그걸 기억하는 사람들이 모두 없어지지 않는 한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이 일이 일어나려면, 타노스의 한탄처럼, 정말 모든 사람들이 사라져야 할 것이고. 망각을 강요하는 이들은 결국 자기 자신의 존재마저 지워버려야 하는 딜레마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억지로 지우려 하기 보다는, 잘 기억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 아닐까.

     영화 자체는 살짝 지루한 감도 없지 않았지만(전편에서 벌여놓은 판이 썩 자연스럽게 수습되지 못한 느낌이다), 시리즈 자체로도 한 세대의 은퇴를 기억하는 괜찮은 의미가 있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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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줄거리 。。。。。。。

     시인인 주인공 진아(강진아)는 시집 출간을 앞두고 좀처럼 쓰이지 않는 시 때문에 깊은 고민에 빠진다. 시간강사로 학생들에게 시를 가르치고, 출판사 관계자와 자주 진척상황에 관해 의논하고, 지인들과 만나 시간을 보내고 하는 일상적인 일들 사이에, 그녀의 마음을 무겁게 가라앉히는 과거의 일이 교차적으로 삽입된다. 오랫동안 함께했지만 불의의 사고로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는 남자친구 길우(강길우)와의 추억들.

      시간이 지나면 점점 잊힐 것이라고들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았던 그 일은 진아의 삶을 무겁게 누른다

 

 

 

 

 

2. 감상평 。。。。 。。。

     영화는 주인공에게 카메라를 집중시키면서 진행된다. 그런데 애초에 저예산영화라는 한계도 있어서 잡음이 생각보다 크게 들린다. 현장감을 살리는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이라고 하더라도 대사가 잘 들리지 않거나 인물의 감정에 몰입하는데 지장을 줄 정도라면 좀 더 작업이 필요하지 않았나 싶다.

 

      영화는 시종일관 잔잔하게 흘러간다. 주인공 진아의 주된 직업이 시인이라는 점도 이런 성격을 강화시키는 듯하다. 왠지 시끄러운 시인같은 건 잘 떠오르지 않으니까. 하지만 크게 떠들지 않는다고 해서 그 안에 담긴 슬픔의 크기도 작은 건 아니다. 오히려 진아는 시인답게, 자신 안에서 그 상처를 차곡차곡 담고 정리하고 있었다.(어쩜 이 과정은 자기 자신도 모르는 새 진행되고 있었다) 그녀는 쉼 없이 길우와 함께 했던 날들에 대한 꿈을 꾼다.

      길우와 진아의 추억은 상당부분 한강을 끼고 만들어진다. 서울 한복판을 유유히 흘러가는 한강이니 사람들이 쉽게 마주하게 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일 테지만, 바로 그 때문에 아픈 기억을 잊는 게 좀 더 힘들어지는 것 같다. (눈만 뜨면 보이는 게 한강이니...) 사실 문제는 회피를 통해서가 아니라 직면을 통해서 해결되기 시작하곤 하니까. (다툴 때 자리를 뜨는 건 그래서 그리 좋은 해결책이 아니다)

 

 

 

 

 

      사람들을 만나기 어려운 이유가, 쉼 없이 괜찮냐고 묻는 이들에게 괜찮지 않으면서도 괜찮다고 대답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대사가 인상적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 사회는 슬픔과 괴로움에 빠져 있는 것은 비정상이고 서둘러 유쾌하고 괜찮은 상태로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태도가 널리 퍼져있는 것 같다. 세월호 5주기인 오늘도 왜 아직까지 잊지 않느냐며 아침부터 유족들을 비난하던 정신 나간 정치인들이 여론의 뭇매를 맞았지만, 어쩌면 그들이 특별히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일상 속에서 우리도 사람들에게 서둘러 정상으로 돌아오라고 재촉하곤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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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줄거리 。。。。。。。

 

     허름한 차림의 한 남자가 귀국편 비행기에 타고 있다. 어딘가 어두운 표정으로, 누군가 알려준 주소의 집을 찾아가지만, 안에 있는 여자는 숨죽인 채 벨소리를 무시한다. 사실 두 사람은 부부였고, 세월호 사건을 전후해 관계가 완전히 망가져버린 상태였다.

 

     사고 당시 베트남의 사건에 말려들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아버지와 모든 고통과 슬픔을 혼자 감당하며 스스로 고립되어버린 어머니. 안 그래도 둘 사이의 벽이 높이 세워져 있었는데, 곧 돌아오는 죽은 아들의 생일을 어떻게 보낼지를 두고 다시 의견이 대립된다.

     너무나도 슬프고, 그래서 너무나도 지친 가족들을 위로하고자 하는 사람들과 함께 보내는 생일.

 

 

 

2. 감상평 。。。。 。。。

 

     수백 명의 승객이 탈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나게 큰 배가 조금씩 가라앉는 장면을 전 국민이 텔레비전 중계로 보고 있는데도, 무지하게 먼 바다에서 일어난 사건이라 가는 데만 며칠이 걸리는 게 아니었는데도, 현장에 도착한 사람들은 별다른 손도 쓰지 못하고 매시간 기울어지며 침몰하는 배 주변을 바쁘게 오고갈 뿐이었다. 엄청난 비극이고, 끔찍한 사고다. 수백 명의 고등학생들(과 일반인들)이 그렇게 세상을 떠난 건.

 

     그런데 이 문제가 정치인들이 얽히면서 묘하게 엇나가기 시작했다. 당시 정부와 여당은 책임과 사과를 요구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자신들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였다. 국가적 차원의 재난에 대처할 수 있는 경험도 능력도 없었던 이들은, 도움을 호소하는 이들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말만을 반복할 뿐이었고, 상대가 말을 듣지 않자 이내 화를 내기 시작했다.

 

 

 

     사실 유가족들이 터트린 말과 보여준 행동이 늘 100% 옳았던 것은 아니었을지 모른다. 누군가는 감정에 기초한 호소나 요구를 했을지도 모르고, 충동적인 행동들이 나오지 않은 것도 아니다. 원래 그들은 우리 모두와 같이 평범한 시민들이 아니었던가. 사고를 겪고 평범한 시민이 갑자기 영웅적인 존재로 변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적어도 확실한 건, 그들의 미숙함은 우리에게서 발견될 수 있는 수준 이상의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사회 일각에서는 그들에게 초인과 같은 대응과 태도를 요구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이 문제는 어떤 프로세스에 의해 처리될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무엇을 해 주면 그들이 만족할까라고 생각하는 순간 길을 잘못 들기 시작했던 거다. 영화 속 유가족 모임의 대표의 첫 등장을 볼 때 들었던 생각도 정확히 그런 방식이었던 것 같다. ‘저게 도움이 될까싶은. 유가족과 지인들이 함께 모여 죽은 아이의 생일을 보내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감독의 대답은 그 자체가 의미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기억할 수 있는 자리, 마음 놓고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채, 함께 울 수 있는 자리가 필요했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일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었던 거다. 물론 이게 너무 느리고 답답한 해결책이라고 느껴질지도 모른다. 적어도 외적으로는, 전후의 변화가 보이지 않으니까. 하지만 영화 속 전도연이 맡은 엄마 캐릭터는 바로 그 자리에서 처음으로 미소를 보인다. 그리고 설경구가 연기한 아빠는 그 자리에서 처음으로 크게 운다. 이게 변화가 아닐까.

 

 

     개인적으로 영화 말미 설경구가 오열하는 모습이 가장 인상적이다. 영화의 시작부터 어두운 표정으로 모든 일을 묵묵히 감당해 내는 그의 모습은, 평범한 가정의 아버지의 모습을 꼭 닮았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사건에 말려들어 아들의 마지막 길을 지켜보지 못했으면서도, 그는 그 일로 인한 순남(전도연)의 모든 비난을 그냥 받아낼 뿐이었다. 그가 영웅적인 성격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대부분의 부모들은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그들의 모든 요구와 주장이 100% 옳은 건 아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문제에 대한 해법이 그렇듯이, 어느 정도는 옳고, 또 어느 정도는 무리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게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일을 만날 때 그 자리에 멈춰서 꼼짝할 수 없듯이, 그들도 그렇게 얼어있을 뿐이다. 심한 동상은 뜨거운 불이 아니라 미지근한 물로 녹여갈 수밖에 없다. 우리의 눈물이 딱 그 적당한 미지근함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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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줄거리 。。。。。。。

     가족들과 함께 해변으로 휴가를 온 애들레이드(루피타 뇽). 하지만 그녀의 표정이 시종일관 영 밝지 못하다. 이는 약 30여 년 전 바로 그곳에서 있었던 어떤 사건 때문이었고, 이것은 애들레이드의 인생에 엄청난 변화를 일으켰다. (근데 이 정도로 부인이 싫어했는데도 굳이 거기에 별장을 마련하고 휴가계획을 세운 남편이 문제)

 

     그날 밤, 에들레이드의 가족과 꼭 닮은 네 명의 수상한 사람들이 별장 앞에 나타났고, 이들과 한밤의 추격전을 벌이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건 훨씬 더 큰 엄청난 사건의 전초전이었을 뿐...

 

 

 

 

 

2. 감상평 。。。。 。。。

     최근 꽤나 이슈가 되고 있는 영화다. 작품 속 다양한 상징들이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흥미를 끄는 듯하다. 영화 초반 등장한 인간띠 운동('핸즈 어크로스 아메리카')이나 도플갱어들의 복장, 소도구, 거울의 방 뒤편의 세계 등등 해석의 여지가 풍성한 내용들로 가득하다. 마치 멋진 옷을 좋아하는 사람이 백화점 옷 매장을 돌아다니거나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도서관 서가 사이를 돌아다닐 때처럼, 관련 내용에 대한 흥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푹 빠질 수 있을 듯한 영화.

     재미로 다양한 해석을 하는 것 자체가 영화를 즐기는 방식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꼭 영화 안에서 모든 것을 설명하고 이야기할 게 아니라, 관객과 함께 다양한 재미를 만들어내는 방식이라고도 할 수 있으니까. 다만 이런 해석들이 썩 일관성 있게 맞아떨어지지 않는 점이 있다는 게 어떤 사람에게는 좀 불편할 수도...(꼭 내가 불편까지 하다는 말은 아니다)

 

 

 

     ​예컨대 이 영화는 정말 흑인차별에 대한 반대 메시지를 가지고 있을까? 영화 후반에 밝혀지듯 이 거대한 사건은 인간복제라는 강렬한 소재에 기원을 두고 있다.(그토록 대규모로 인간복제 실험을 한 이유가 분명히 밝혀지지는 않는다는 게 살짝 빈 구멍) 그리고 이 실험은 흑인들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백인들도 포함되어 있다. 말하자면 그토록 오랫동안 햇볕과 하늘을 보지 못하고 살았던 건 지하의 흑인들만이 아니라 (복제된) 백인들도 마찬가지였다는 것. 지상에 올라와 주인공 부부의 친구 가족을 해친 것은 전원 백인이었다.

 

     ​물론 인종차별 이슈가 아주 없다고 하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영화의 논리적 맥락에서 그 부분이 딱히 드러나지는 않는다.(우선 주인공 부부와 친구 부부는 인종이 다르지만 그게 어울리는 데 별로 문제되지 않고 있다.) 그거 주인공이 흑인이기 때문에 그렇게 보려는 건, 영화 주인공이 남자면 남성중심적 영화, 여자면 여성중심적 영화라고 구분하는 것처럼 단순해 보인다.

 

 

 

     그래도 다양한 상징 때문에 말할 거리가 많은 영화라는 점은 분명하다. 사람은 뭔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 존재이기에, 이런 영화는 그 좋은 재료가 될 수 있다. 그건 상업오락영화로서 이 영화가 갖는 분명한 장점 중 하나. 다만 그 모든 날줄과 씨줄이 잘 짜여 좋은 옷감까지 만들어내지는 못한 듯하다. 영화 스토리 자체는 거의 슬래셔나 고어 영화로 치달을 수 있었는데, 감독은 웬만한 장면은 카메라 워크를 통해 거의 다 쳐내서 시각적인 불편함은 좀 줄였다.

 

     ​취향을 좀 탈 것 같은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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