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나가는 변호사인 정인(신혜선)은 우연히 텔레비전을 통해 자신의 어머니 화자(배종옥)가 연루된 살인사건의 소식을 듣는다아버지의 장례에 참여했던 동네 주민들이 농약이 들어 있는 막걸리를 마시고 사고를 당한 것집에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뛰쳐나온 정인이었지만모든 것이 수상한 사건에서 어머니의 결백을 밝히기 위해 나선다는 이야기.


     분명 사건은 초기부터 수상한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니고허준호가 연기한얼굴에 욕심이 가득 차 있는 추 시장은 그 의혹의 정점에 서 있다추 시장이 만들어 놓은 엄청난 음모를 정인이 하나씩 깨뜨려 나가며 진실을 밝히고마지막에는 통쾌한 심판을 이뤄낼 것 같다는전형적인 스토리를 따라갈 것이라고 예상했다실제로 영화의 초중반은 그렇게 흘러가는 듯도 했다그런데 감독은 좀 다른 반전을 준비하고 있었다괜찮은 구성.






     이야기의 중심에는 어머니와 딸이 있었다모든 것은 딸을 품게 된 어머니로부터 시작되었고사실을 모르는 딸은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녀를 떠났다마침내 모든 전모를 알게 된 딸이 느끼는 혼란과 슬픔그리고 극복의 이야기가 영화의 중심에 놓여 있다.


     영화 속어머니와 딸을 둘러싼 인물들(남성들)은 하나같이 변변찮다뭔가 음흉해 보이는 추 시장을 비롯해동네 주민들은 주인공 모녀를 향해 공격적이기만 하다. (물론 사안이 너무 명확해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여튼 감독은 그들을 막무가내로 몰아가는 이들로 그린다.) 시종일관 명확한 사실을 추적하는 정인과자식을 보호하기 위해 모든 것을 떠안으려는 화자가 모두 여성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여성중심영화라고도 할 만.






     영화 후반에 드러나는 과거 화자의 결정이 참 아프다그녀로 하여금 제정신을 잃게 만들었던 사실을 깨달은 순간 겪었을 충격은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그 시절 그 비슷한 결정을 해야만 했던 여성들이 얼마나 많았을까차마 딸에게도 말할 수 없었던 비밀은또 다른 아픔으로 이어진다.


     (경제적으로사회적으로독립적 삶을 영위할 수 없는 여성의 삶이란 늘 어딘가에또 누군가에 끌려가는 위치일 뿐이다그들은 살기 위해 누군가의 호의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때로 그건 굴욕적인 상황마저 감내하게 만든다수많은 여성들이 가정폭력에도 불구하고 떠나지 못하는 것도직장 내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그만두지 못하는 사람들도 다 비슷한 이유일 것이다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언제까지나 계속될 악순환이다.



     화자는 결백했을까? 또 정인은 법률가로서 옳은 결정을 내린 걸까법에는 감정이 없지만사람이 하는 재판정에서 그녀는 충분히 결백을 인정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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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적한 시골마을의 젊은 교사 부부에게는 비밀이 있었다. 사랑스러운 아내가 밤만 되면 알 수 없는 사람으로 변해버리는 것(빙의 뭐 비슷한 느낌). 사모님의 비밀을 알게 된 마을 사람들은 집에 창살을 만들고, 밤마다 문을 잠그기로 한다. 어느 날 아내만을 따로 둘 수 없었던 남편은 자신도 아내와 함께 창살 안으로 들어가기를 자청했고, 그날 밤 불이 나 모든 것을 태워버렸다.

 

     이 사건을 수사하러 온 형구(조진웅)는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만 좀처럼 실마리가 잡히지 않았다. 어느 이상한 날 밤 독한 술에 취했다 깬 그는 자신의 신분은 물론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음을 깨닫는다. 형사로서의 그는 사라지고, 영화 초반의 교사가 되어 있던 것. 사라진 자신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돌아다니던 형구는, 어느 순간 진짜 자신이 누구인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이다. 이 질문은 비단 형구만이 아니라 영화 초반 교사 아내가 밤마다 모르는 사람이 되는 모습에도 언뜻 드러난다. 둘 다 외모는 그대로이지만 자신에 대한 기억이 전혀 달라지거나(교사 아내), 자신을 보는 다른 사람들의 기억이 완전히 달라지는(형사) 경험을 한다.

 

     ​사실 우리가 누구인지를 결정하는 건 경험과 그에 따른 기억들에 상당부분 의존하는데, 이 기억이라는 건 블록체인과 비슷해서, 나만이 아니라 나와 연관된 이들의 공통 기억에도 크게 의존한다. 꼭 영화 속 형구와 같은 상황이 아니라도, 우리는 아주 여렸을 적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일들을 부모나 주변 사람들을 통해 듣고 우리의 이야기로 받아들이곤 하니까. 문제는 이 두 요소가 서로 딱 맞물리지 않을 경우인데, 영화 속 형구의 혼란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자신의 기억과 주변인들의 기억이 맞물리지 않으면서 커져만 간다.

 

     ​물론 영화가 이런 질문들을 충분히 잘 풀어냈느냐는 좀 아쉬운 부분. 영화 초반에서 중반으로의 전환(교사 부부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에서 형사의 이야기로 넘어가는 부분)은 많이 갑작스럽고, 영화 종반부 형구와 초희의 대화 중 갑자기 분위기가 달라지는 부분도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게는 만들지만, 그 의미 자체는 불분명하다.

 

 

 

 

​     최근 개인주의와 맞물리면서 내가 누구인지는 오직 나 자신이 결정한다는 유의 가벼운 심리학이 유행하고 있다. 물론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이 마음가짐의 영향을 크게 받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니 다른 사람들 신경 쓰지 않고 내 멋대로 하겠다는 식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그런 태도가 지속적으로 유지되다 보면 결국 나에 대한 나의 인식과 나에 대한 다른 사람의 인식 사이의 괴리가 생기게 될 테니까.

 

     배우로 더 알려진 장진영 감독의 첫 영화. 미숙한 부분도 보이지만, 나름 독특한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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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 무슨 커다란 이야기가 펼쳐지는 건 아니지만, 전형적 일본의 시골 가족을 중심으로 소소하면서 감동적인 스토리가 그려질 거라고 예상했다. 비슷한 느낌의 다른 일본 영화들처럼. 하지만 이 영화는 완전히 그런 기대를 깨버린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게 뭐임?’이라는 생각이 계속 떠올랐으니까.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짝사랑하던 여학생을 떠나보내는 아들 하지메의 이마에서 기차가 조금씩 빠져나오고, 그 빈자리가 뻥 뚫려 있는 엽기적인 모습이 등장한다. (여기서 알아봤어야 했다.) 하지메의 어린 여동생인 사치코는 자신의 거대한 이미지 때문에 골치가 아픈 초등학생인데, 영화 중간중간 정말로 엄청나게 큰 사치코의 얼굴이 사치코를 바라보는 모습이 묘사된다. 설정상 그 모양은 오직 사치코 자신에게만 보는 것 같은데, 무엇 때문에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지는 알 수가 없다.

 

     여기에 약간 치매기가 있어 보이는 할아버지는 무슨 마임을 하는 것 같긴 한데, 어떤 캐릭터인지 알 수가 없고, 엄마 요시코나 외삼촌 아야노도 별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내지는 못하고 있다. 이 영화.... 어떻게 보라는 거지.

 

     일단 재미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이야기에 논리가 있어야 뭐라고 평을 할 텐데.... 영화 속 캐릭터들은 뿔뿔이 흩어져 있어서, 가족이라는 이름을 가지고는 있지만 서로 특별한 교류가 이어지지 않는다. 매우 적은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각자의 고립된 생활을 이어나가는 식. 코미디를 표방하고 있지만, 기껏 사용하는 게 진지한 분위기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똥이나 슬랩스틱이라면 그닥 공감이 되지 않는 것이 당연할지도..

 

 

 

 

     영화보다 네이버의 영화 한줄평이 더 재미있다. ‘이런 영화를 만드는 건 분명 재주인 것 같다는 반어적 표현도 재미있지만, ‘산뜻하고 평화로운 어느 시골에서 자란 대마를 핀 것 같다, 작정하고 비꼬는 평도 재미있다. 정말 소위 약 빨고만든 영화 같으니까. 메시지도, 감동도, 비주얼도 볼 것이 별로 없었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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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하트 2020-06-27 21: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영화를 보고 너무 좋아서 감독의 다른 영화를 찾아보았지만 다른 작품들은 공감이 잘 안되더군요. ‘산뜻하고...대마를 핀 것 같다‘는 표현은 아마 최고의 상찬이 아닐까 싶습니다.^^

노란가방 2020-06-27 21:36   좋아요 0 | URL
오.. 그러셨군요. 감상은 충분히 다를 수 있지요.
사실 인물 하나하나가 당면하고 있는 일들은 나름 공감이 되는 면들도 있었지만.. 여전히 큰 틀에선 너무 헐겁다는 느낌이 드네요.
댓글 감사합니다.
 

 

 

      판 구조론에 따르면, 지구의 육지라는 건 거대한 판 위에 올라가 있어서 그 판이 움직임에 따라 함께 이동한다고 한다. 두 개의 판이 부딪히면 높은 산맥으로 솟아오르거나, 한 쪽 판이 다른 쪽 판 아래로 깔려 내려가는데, 이 때 큰 충격이 일어나 지진이 일어나게 된다. 또 판이 부드럽게 위아래로 흐르는 게 아니라, 엄청난 마찰력으로 인해 지표가 함께 끌려 내려가는 현상도 일어날 수 있다. 이 영화 일본 침몰은 바로 그런 충격 때문에 일본 열도가 가라앉게 된다는 설정을 배경으로 한다. , 충분히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소재라는 것.

 

     주기적으로 일어난다는 후지산의 분화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문도 있고, 가까운 미래에 엄청난 규모의 대지진도 발생할 것이라는 예측도 심심찮게 들린다. 확실히 일본은 이런 종류의 재난에 대한 근본적인 두려움을 갖고 있는 듯하다.

 

 

 

 

     문제는 이 정도 규모의 재난이라면 그런 게 일어날 거라는 걸 미리 안다고 해서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 없다는 것. 영화 속에서는 엄청난 폭발력의 폭탄을 여러 개 동시에 터뜨려서 끌려 내려가는 판의 끝 부분을 분리시킨다는 설정을 보여주지만, 실현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당장 몇 년 전 경주와 포항 등지에서 발생한 지진의 원인이 겨우 지열발전을 위해 땅속으로 물을 집어넣었기 때문이라는데, 판을 끊어낼 정도의 폭발로 인한 뒷감당은 어지간할까.

 

     하지만 뭐 상업영화를 만들려다 보면, 뭔가 좀 허황되더라도 해답을 보여주어야 하고, 여기에 젊은 남녀 주인공들 사이의 연애도 넣어야 하고, 이런 성격의 영화라면 성격 좀 괴팍한 박사 한 명과 그 카운터 파트너가 될 차분한 정부측 인사도 넣고(그 둘이 전 부부라는 설정은 왠지 익숙하고) 해야 하는 거지 뭐

 

     여기 저기 익숙한 클리셰들의 남발에다, 2000년 대 중반에 나온 영화라고 하지만 대규모 재난영화에서 중요한 CG도 약하다. 전반적으로 만듦새가 부족한 건 사실이다. 그나마 최악을 막아 준 건 아역인 후쿠다 마유코가 맡은 미사키라는 캐릭터. 지진으로 부모를 모두 잃고, 동네의 어린들의 손으로 키워지고 있는 소녀인데, 영화 속 재난을 더욱 슬프게 만들어주는 상징과 같은 존재다. 가끔씩만 비춰지지만 나올 때마다 시선을 집중시키는 신 스틸러.

 

 

 

 

     영화 속 일본 총리가 했던 말이 인상적이다. 그는 각계의 전문가들과 함께 당면한 미증유의 위기에 대한 대책을 논의했는데, 그 결론 중 하나로 나온 것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였다. 사실 전 국토가 물속으로 가라앉는 상황에서 인력으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면, 사랑하는 사람들과 마지막 시간을 함께 보내다가 끝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영화와 동일한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어쩌면 2020년을 살아가는 우리도 비슷한 느낌을 받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코로나19라는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고, 죽은 사람만도 수만 명이 넘어가는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도 그저 접촉을 줄인 채 집에 머무는 것뿐이니까

 

     ​바이러스는 결국 극복되겠지만, 이미 이곳저곳에서 인류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재앙들이 일어나고 있다.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지구는 점점 더워지고 있고, 기상 이변은 빈도를 늘려 가 더 이상 이변이라고 부를 수 없어지고 있다. 미세 플라스틱은 이제 태평양 한 가운데 섬을 만드는 것을 넘어 비에 섞여 내리고도 있고, 매일매일 발생하는 엄청난 양의 쓰레기도 쉽게 처리할 수 없는 문제다.

 

     ​우리는 영화 마션 속 대사처럼, 또다시 답을 찾을 수 있을까. 그 영화의 감독은 늘 그래왔다고 말했지만, 어쩌면 우리는 아직 진짜 위기를 마주하지 못했을 뿐인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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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로마에서는 전쟁터에서 큰 공을 세운 병사들에게 을 수여했다. 그 중에서도 전장에 있는 풀을 엮어서 만들었다는 풀잎관은 혼자서 한 군단급 이상의 부대를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한 공을 세운 사람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영예였다. 오늘날에는 머리에 관을 씌워주는 대신 가슴에 훈장을 달아주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영화에서 주요하게 여겨지는 미군 명예훈장은 아마 고대 로마의 풀잎관과 비슷한 영예일 것이다. 영화는 마땅히 명예훈장을 받아야 할 사람이 그렇지 못한 비틀린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그 주인공은 베트남전쟁 당시 미군 공군항공지원대 소속의 의무병 피츠였다. 당시 미군의 한 부대가 적들의 매복에 걸려 악전고투하고 있는 상황에서, 부상자를 수송하기 위한 헬기에 타고 있던 피츠는 의무병이 실려올라오는 것을 보고 자신이 내려가 부상당한 의무병의 임무를 수행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뻔히 죽음이 예상되는 그 상황에서 여러 사람들을 구하고 전사한다.

 

     ​수많은 부대원들이 피츠로 인해 용기와 영감을 얻고, 무엇보다 생명을 구했지만, 왜인지 피츠에게는 최고훈장인 명예훈장이 아닌 낮은 등급의 훈장만이 수여되었다. 생각해 보면 대규모 아군이 큰 피해를 입은 전투는 분명 작전상의 실수나 오판이 개입되어 있을 게 분명했고, 사건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는 쪽을 원하는 사람도 있었을 게다. 훈장의 누락은 이 과정에서 매우 고의적으로 벌어진 일이었다는 것.

 

 

 

 

     안타깝지만 세상엔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한 것 같다. 정치적인 이유로 공은 가려지고, 과는 부풀려지기도 한다. 손톱만한 잘못으로 충분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이들이 정치적인 공격으로 낙마하기도 하는 모습을 우리는 봐오지 않았던가.

 

     장교로 군 생활을 하면서 몇 번인가 표창장을 받은 경험이 있다. 그런데 이 표창장이라는 게 무슨 큰 훈련을 끝내거나, 아니면 그저 정기적으로 주는 식이어서, 내가 받았던 것들은 같은 병과에서 돌아가며 받는 식이었다. 진급에 아주 작은 점수가 더해지긴 하지만, 단기복무 후 전역할 예정이었던 나는 딱히 받을 필요가 없으니 다른 사람을 주라고 해도, 어차피 한 해에 같은 걸 몇 개를 받든 가점은 더 되지 않는다며 극구 받으라고 해서 받긴 했었다

 

     줄 이유가 없다면 안 주면 그만일 텐데, 무슨 이유 때문인지 그건 또 안 된단다. 상이 남발되면 적절한 공적평가가 이루어질 수 없고, 그러면 정말로 중요한 자리에 올라야 할 인재들이 묻히는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물론 겨우 표창장 몇 개를 가지고 진급이 결정되지는 않겠지만, 이런 경향들, 말하지 않고 묻어가는 분위기들은 결코 좋은 영향을 주지는 못할 것 같다.

 

     30년이 지나는 동안에도 당시 부대원들은 피츠에게 명예훈장이 추서되도록 많은 노력을 해왔다. 생각해 보면, 상을 받아야 할 사람에게 주기 위해 노력하는 건, 그만한 공을 세우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일일 것이다. 명예와 인간의 도리라는 측면뿐만 아니라, 한 공동체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이를 위해 헌신과 희생을 한 이들을 마땅히 칭송하는 게 유리할 테니까.

 

 

 

 

    한편으로 영화 속에는 전쟁으로 인한 다양한 부수적 영향들에 관한 이야기도 보인다. 최악의 전투에 참여한 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는 다양한 부대원들의 모습은 전쟁이 남긴 상처가 얼마나 큰지를 잘 보여준다. 전쟁을 일으킨 것은 이들이 아니지만, 군인의 의무에 따라 명령을 수행한 이들이 가장 큰 피해를 감당해야 한다는 건, 애초에 전쟁이라는 것 자체가 얼마나 모순적인 일인지를 보여준다.

 

     이와 관련해서 흥미로운 장면 중 하나는 반전운동이 한창이었던 60년대 미국에서, 베트남전에 참가했다가 돌아온 사람들을 향해 보여주던 냉소적인 반응 부분이다. 참전용사 중 한 명의 트라우마는 한 술집에서 그가 겪었던 적대적인 반응에 기인하고 있었다.

 

     물론 베트남전은 미국의 정략적 목적을 위해 비열한 속임수로 시작된 전쟁이었다(하지만 뭐 모든 전쟁이 대개 정략적 목적을 위한 이기적 판단이지 않던가). 하지만 그 전쟁에 참가해 군인으로서의 용기와 이타심, 또 맡은 임무를 수행하고자 했던 이들의 그 행동 자체는 비난받을 만한 것이 아니었는데도 사람들은 이 둘을 혼동하고 있었다. 실은 그들이 조롱하던 그런 자질들로 인해 그들의 삶이 지켜지고 있음에도 말이다.

 

    명예를 받아 합당한 일들에 제대로 된 대우가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는 스스로 무너질 것이다. 모든 제복이 경의를 받아야할 것은 아니지만, ‘해야 할 일을 충실히 하는 제복은 지금보다는 더 큰 영예를 얻는 게 맞는 것 같다. 우리 사회는 이 일을 제대로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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