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은 저항이다
월터 브루그만 지음, 박규태 옮김 / 복있는사람 / 201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요약 。。。。。。。

 

     저자는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안식일 규정이 단순히 하루를 쉬며 기력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안식일은 끊임없는 노동과 그 근본 동기로서의 탐욕,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착취, 그 결과로서의 불안이라는 파괴적인 시스템에 대한 근본적인 저항이자 구원을 가리키는 것이다.

     책의 결론은 당연히 안식일의 회복이다. 물론 이건 모 유사기독교단에서 주장하는 것 같은 식의 율법주의적 안식일 준수와는 질적으로 다른 이야기. 성경 전반에 걸쳐 등장하는 안식의 참된 의미를,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전 분야에 확산시킴으로써, 앞서 언급했던 무한경쟁 시스템에 적극적으로 저항해 나가야 한다는 것.

 

 

 

2. 감상평 。。。。。。。

     언젠가부터 아무 일을 하지 않고 쉬는 것이 죄가 되어버렸다. 학교를 가지 않는 청소년은 문제아가 되고, 직장에 들어가지 못한 젊은이는 잉여로 전락했다. 회사에서 일찍 퇴직하게 된 중년들은 조롱과 자조의 대상이 되었고, 은퇴한 노인들은 부담으로 여겨지고 있다.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국가경제를 측정하는 통계수치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정치인들의 입에 국민소득 몇 만 달러, 경제성장률 몇 퍼센트 하는 수치들이 자주 언급되더니, 그 수치들이 가리키는 실제 사람들의 삶보다 이런 숫자들이 더 중요해져버린 것 같다. 아무리 국민소득이 3, 4만 달러가 되어도, 물가가 함께 올라가고, 불공평한 분배와 특권층에 대한 특혜가 일상화되면 대다수의 삶의 질은 낮을 수밖에 없다는 지극히 간단한 생각은 이단으로 몰린지 오래다.

     여기엔 낙수효과라는 거짓 교리와 일중독에 대한 찬양이 더해지면 완벽한 하나의 종교가 된다. 물론 성경적인 의미에서 이는 분명한 우상숭배다. 오늘날 교회의 가장 강력한 적은 자본주의라는 이름의 물신숭배다

 

 

     잘 알려진 구약학자인 월터 브루그만은 이 책에서, 이런 현대의 우상숭배를 깨뜨리는 가장 효과적인 무기로 안식일 준수라는 오래된 전통을 꺼내든다. 더 많은 일을 통해서만이 자아를 확인받을 수 있다는 거짓 주장은,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돌보고 그들과 하나라는 정체성을 확인하는 날인 안식일에는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더 많은 성과를 내기 위한 폭력과 착취가 들어설 자리가 이 날에는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의 안식일에 담긴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그리고 사회적인 의미를 매우 상세하게 분석해내고 있다. 우리는 일을 통해 정체성을 확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쉼을 통해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존재인 것 같다. 책은 꽤나 흥미로운 내용으로, 그리 많지 않은 지면에 아주 빽빽하게 저자의 통찰이 담겨 있다

 

 

     다만 이 책에서 분석해 내고 있는 사회, 경제적인 정황이 성경시대의 그것보다는 지나치게 현대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은 남는다. 저자는 명백하게 두 개의 시공간(고대와 현대)을 동시에 바라보면서 서술을 진행하고 있는데, 자칫 시대착오적인 설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현대주의적 성향이 강한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자주 이런 오류에 빠지곤 한다) 이 점은 성경 시대의 삶의 정황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설명으로 보완될 수 있는데, 물론 저자가 저명한 구약학자라 이 부분에서 큰 오류가 있다고 보기엔 어렵지만, 확실히 아쉬운 감도 있다.

 

     또, 번역 부분에는 아쉬움이 좀 생긴다. 사실 이 가벼운(내용이 아니라 분량이) 책을 읽는 내내 뭔가 불편함을 느꼈는데, 문제는 문장이었다. 원래의 영어문장 자체가 어려웠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번역된 문장 역시 소위 번역투인 경우가 너무 많아 대충 읽어서는 무슨 뜻인지 머리에 안 들어오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물론 번역이란 게 쉬운 일이 아니란 점은 백번 이해하지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이빙 다빈치 - 세속주의 문화의 도전에 대한 기독교 세계관의 답변
낸시 피어시 지음, 홍종락 옮김 / 복있는사람 / 201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요약 。。。。。。。

 

     전작인 완전한 진리에서 사실과 가치를 서로 다른 인식의 층에 각각 가두어 놓으려 했던 현대의 세계관들을 날카롭게 분석해 냈던 저자는, 이번 저작에서는 이 분리가 단지 이론적 차원에만 머물지 않고 어떻게 현실세계에 영향을 미쳤는지에 주목한다. 저자에 따르면 소위 세속주의는 이미 강단을 점령했고, 그곳에서 배운 수많은 사람들을 통해 그 영향력을 날마다 확장시키고 있다.(1~3)

 

     이 책은 그 중에서도 미술과 음악 등 예술 분야에 나타나고 있는 이층적 세계관의 모습을 분석하는 데 집중한다. 덕분에 서양 예술사의 각 시대를 풍미했던 주의들이 왜 등장했으며 어떻게 표현되었는지를 설명해주는 일종의 예술사책의 기능도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지만, 보다 중요한 건 역시 각각의 사조들이 가진 한계와 그 모든 것을 관통하는 근본적인 세계관을 분석해내는 장면이다.(4~9)

 

     현실을 제대로 반영해내지 못하는 이층적 세계관은 인식론적 분열증을 일으킨다. 어쩌면 그 때문에 서양 예술사의 여러 사조들이 끊임없이 앞서의 것들을 부정하며(대개 이들은 연속성보다는 단절성을 강조하곤 한다) 자신의 자리를 찾으려고 애써왔던 것일지도 모른다.

 

     저자는 일련의 작업들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특별히 문화와 예술을 읽는 안목을 길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대로 알지 못하면 끌려다닐 수밖에 없고, 이 과정에서 그 이면에 깔려 있는 세속주의에 넘어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소극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실재를 제대로 반영하는 세계관에 근거한 예술 활동을 통해, 세상을 좀 더 아름다운 곳으로 만들어 나가는 데도 이런 안목은 필수적이다.

 

 

 

2. 감상평 。。。。。。。

 

     낸시 피어시 여사가 다시 한 번 일을 냈다. 이 책은 미학을 다루면서 그 안에 담겨 있는 세계관을 분석함으로써 보통의 분석보다 훨씬 깊은 차원에까지 들어간다. 수많은 컬러 도판들(이 책의 가격이 겨우 3만원 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은 본문의 적절한 예시이면서, 동시에 다양한 시대의 다양한 예술가들의 작품을 보는 미술관의 기능까지 하고 있다. 철학과 예술 사이의 관계를 이토록 튼튼하게 엮어낸 작품은 흔히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모든 것에는 뿌리가 있다. 소위 난해한현대미술 작품들도 마찬가지다. 몇 달 전 한남동의 리움 미술관에 갔던 적이 있었다. 가장 위층부터 차례로 한 층씩 내려오면서 전시된 작품들을 감상하던 중, 2층과 3층 사이에서 아주 극단적인 분위기의 전환이 있다는 게 나 같은 문외한이 보기에도 한 눈에 느껴졌다. 2층부터는 본격적으로 현대의 추상주의적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 키를 훨씬 뛰어 넘는 거대한 화폭에 알 수 없는 무늬와 색채들이 어지럽게 늘어서 있는 모습은, 옆에 적혀 있는 안내문을 봐도 좀처럼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어디 그뿐인가. 왜 삼성에서 비자금을 만들기 위해 85억이나 주고 구입했다던 만화 같은 그림(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이었다)이 왜 그렇게 높은 가격이 책정되었는지도 알 수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사람은 잘 모르는 대상에 대해서는 두려움을 갖게 된다. 아마 나 같은 사람들이 예술이라는 분야에 대해서 갖고 있는 감정은 그 비슷한 무엇일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면 그런 두려움은 날려버릴 수 있게 된다. 쫄 것 없었다. 그들은 그림이나 선율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있을 뿐이고, 말과 글로 그렇게 하는 사람을 볼 때처럼, 그들의 주장을 읽어낼 수 있으면, (그리고 그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반박도, 비판도 할 수 있다. 남들이 좋다고 해서,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은 데도 엉거주춤한 자세로 맞장구를 칠 필요가 없는 거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이 미학을 공부하고 문학과 예술의 언어를 읽는 법을 배우는 이유는, 단지 딱지를 붙이고 빈정거리기 위해서는 아니다. 더 나은 것을, 더 실재를 잘 반영하고, 일상적인 것들의 가치를 더 잘 빛낼 수 있는 문화를 만들기 위해서다. 이런 부분에 주목해 보자면, 나를 비롯한 우리나라의 그리스도인들은 한참 부족한 상황이고.

 

     이 책은 이런 상황을 타개하는 데 좋은 시작이 될 것이다. 외국어를 배우듯, 미술과 음악 속 메시지를 읽는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물론 전세는 많이 기운 상황이지만, 아직 낙동강 전선이 유지되고 있다면, 반전의 기회는 남아 있으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존 비비어의 관계 - 자유함과 영적 성장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계획 존 비비어의 관계
존 비비어 지음, 우수명 옮김 / 엔씨디(NCD) / 200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1. 요약 。。。。。。。

 

     깨어진 관계 때문에 생긴 상처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존 비비어의 신앙적인 조언이 가득 담긴 책이다. 저자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상처를 받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것이 우리를 최종적으로 망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자신이 상처받았음을 인정하고, 해결하기 위한 제대로 된 방법을 수행하기만 하면 말이다.

 

     책은 서로 다른 방식의 관계로부터 받은 상처들로부터 회복할 수 있는 성경적 방식을 차분하게 풀어놓는다.(4장과 5) 나아가 상처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신앙적 유익들, 그리고 용서와 사랑이 가치에까지, 관계로 인해 생긴 문제에 관한 거의 모든 조언들이 담긴 백과사전 같은 책.

 

 

2. 감상평 。。。。。。。

 

     언제 봐도 기본 이상은 할 것 같은 존 비비어 목사의 책이다. 이 책에서도 흔히 실족이라고 부르는 깨어진 관계에서 나오는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차분하게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책의 맥락은 상당부분 교회와 관련된 상황들이지만, 일반적인 인간관계에서 겪을 수 있는 문제들에 대처하는 데도 충분히 유용하다.

 

 

     믿는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지만, 그 안에는 늘 다양한 종류의 문제들이 발생한다. 최근 들어서 그런 문제들이 더욱 자주 공개되고 드러나는 것 같기도 하다. 부끄러운 일이다. 내가 아는 교회는 최근에 완전히 둘로 쪼개졌고, 또 나 역시도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받기도 하고 있다. 그런데 요새 나오는 교회 문제를 다루는 책들을 보면, 문제를 지적하고, 비판하고, 공격하는 데 지나치게 열을 올리는 것이 아닌가 싶다. 물론 문제는 교정되어야 하고, 피해는 복구시켜야 한다. 그러나 원망과 보복으로 과연 이런 일들이 가능하기는 한 걸까?

 

     비단 교회문제만이 아니다. 최근들이서 우리나라의 갈등수치가 역사상 최고점 언저리를 지나고 있는 것 같다.(고구려, 백제, 신라 나뉘어 싸우던 시기 정도가 비슷할까) 그리고 우리는 제법 오랜 시간 동안 편 가르고, 보복하고, 상대를 힘으로 누르는 방식으로 문제에 대처하는 정치인들을 보아왔다. 과연 그랬더니 문제가 해결되던가?

 

     상대를 용서하지 못하면 결국 그 문제가 일종의 덫이 되어 우리 자신을 옭아매게 될 것이라는 결론부의 조언은 그래서 더욱 무겁게 와 닿는다. 잘못을 내버려두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나는 언제나 죄가 없고, 무고하고, 결백하다는, 늘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저주하는 그런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우리 하나가 그렇게 한다고 해서, 이 책에 실려 있는 예화들처럼 모든 일들이 잘 풀리지는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마음 속에 독을 품고 사는 건, 언제나 너무 위험한 일이다.

 

 

. 괜한 딴지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책 제목을 붙이는 방식에 좀 불만이 있다. 이런 식으로 제목에 저자의 이름을 떡 하니 박아 넣는 것은 마케팅 쪽에서는 유리할지 모르지만, 과연 기독교적인 세계관에서 나온 판단인지는 확실치 않다. (비교적 일찍 출판된, 같은 저자의 책 순종에서는 이렇지 않았는데, 이후 서너 개 출판사에서 경쟁적으로 내고 있는 비비어의 책은 이런 식으로 저자의 이름을 제목에 큼직하게 써 넣고 있다.) 이런 제목은 책의 내용이 비비어의 조언이라는 뉘앙스를 강하게 드러내지만, 책 자체가 표방하는 것은 관련된 문제에 대한 성경적 해결책이 아니던가. 표지는 책의 얼굴이다. 출판사의 좀 더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고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주일 신앙이 평일로 이어질 때
톰 넬슨 지음, 홍병룡 옮김 / 아바서원 / 2015년 5월
평점 :
절판


1. 요약 。。。。。。。    

 

     신앙과 일상의 직업(여기에서는 교회나 교회병행단체에서 일하는 것 이외의 직업을 가리킨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신학적, 실천적 고민을 담고 있는 책이다. 1장에서 3장까지는 창조, 타락, 구속이라는 기독교 세계관적 관점에서 일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를 설명한 저자는, 4장에서 우리의 현재 일이 앞으로 어떻게 변화될지에 대해 조망한다.

 

    5장은 소위 일상적인 일에 담겨 있는 영적인 의미가 얼마나 큰지를 설명하는 장이고, 이어서 어떻게 하면 일을 통해 그 안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성취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는 내용이 이어진다(6). 저자는 우리의 일이 다른 무엇을 위한 도구적 의미만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신앙적 의미를 가질 수 있음을 강력하게 주장하는데, 일차적으로 그것은 공동선을 성취하는 모습으로 가능하다고 말한다(7).

 

    8장에서는 어떻게 우리에게 맞는 일을 선택할 수 있을지 하는 방법이 실려 있고, 9장은 일을 하는 과정에서 마주칠 수 있는 다양한 유혹들을 피하는 방법에 대해 말한다. 마지막 장은 지역 교회를 통해 이 책에서 살핀 일의 신학을 어떻게 적용하고 발전시켜나갈 수 있을지를, 저자 자신이 몸담고 있는 교회의 사례를 예로 들어 제시한다.

 

 

2. 감상평 。。。。。。。  

 

     중세교회는 거룩함에 대해 과도한 관심을 보인 나머지 성속이원론이라는 치명적인 함정에 빠져버렸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거룩하고 속된 것을 나눴고, 교회와 그 안에서 일하는 성직자들은 근본적으로 거룩하지만 그 밖의 영역은 거룩함에서 삐져나가버렸다. 종교개혁의 중요한 공헌 중 하나는 이 벽을 허물고, 온 세계를 하나님의 것으로 회복시켰다는 점이다. 마틴 루터는 교회 안에서 설교를 하는 성직자와 식당에서 접시를 닦는 사람은 모두 똑같이 거룩한 일을 하고 있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500여 년이 지난 오늘날, 교회는 다시 이전의 이원론적 세계관으로 돌아간 듯하다. 교회는 성전으로 불리고, 목사만이 하나님의 종으로 불리기 일쑤다. 이 과정에서 대부분의 일상적인 직업들은 2등 직업, 혹은 하나님의 일을 섬기기 위한 보조적 도구로 전락하는 일이 발생한다. 그러니 은혜 받으면 신학을 공부해야 하고, “하나님의 부르심 = 교회 전임 사역과 같은 공식 아닌 공식이 통용되기에 이르렀다.

 

     이 책은 그런 잘못된 성속 이원론을 교정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쓰였다. 구체적으로 저자는 우리의 일상적인 일들이 얼마나 거룩한 방식으로 수행될 수 있는지에 대해 심도 있게 설명한다. 설명들 사이에는 적절한 사례들이 더해져 있어서 이해를 돕는다.

 

 

    결국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건, 교회 안이 아니라 사무실에서, 학교에서, 거리와 가정에서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신앙생활은 예배당 안이 아니라 밖에서 하는 거니까. 이 부분이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채 교회생활이 곧 신앙생활의 전부가 되어버린 결과가 오늘날 기독교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

 

    물론 문제는 단지 이것 하나뿐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문제가 복잡하다고 지레 겁먹고 포기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시작을 기독교인들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장소에서부터 한다면 생각했던 것보다 빠른 시기에 결과가 나올지도 모른다.(물론 섣부른 예단이나 기대부터 하는 건 금물이다)

 

 

     상당히 짜임새 있게 잘 쓰인 책이다. 창조, 타락, 구속의 원리에 따라 차분하게 정리된 일의 신학 위에, 실제로 어떻게 일을 통해 소명을 실천할 수 있을지를 제시하고, 이 과정에 필요한 실제적인 지침들까지 잘 담아내고 있다. 그리 가벼운 내용은 아니지만, 딱딱한 이론서도 아니고, 300페이지가 채 되지 않는 적절한 분량이라 주변에 추천해주기도 알맞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예수와 그 목격자들 - 목격자들의 증언인 복음서
리처드 보컴 지음, 박규태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요약 。。。。。。。

 

    70여 페이지에 달하는 미주를 제외하고 본문만 약 800페이지가 되는 이 책(논문)을 읽기 위해서는 먼저 양식비평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겠다.

 

     양식비평이란 복음서를 이해하는 하나의 시도로, 복음서의 기록자들이 그 안에 기록된 사건들을 직접 경험하거나 목격한 사람들과 꽤 긴 시차를 두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시차로 인해 복음서에는 원래 일어나지 않았던 여러 이야기들이 담겨 있으며, 여기에는 그 책을 기록했던 사람(혹은 사람들)이 속해 있는 공동체의 사상과 배경이 들어있다는 것.

 

     여기에서 중요한 키워드는 시차공동체’, 그리고 기록자를 둘러싼 정황의 삽입이다. 복음서가 실제 사건이 일어난 후 오랜 시간이 지나고서 기록되었고, 그 기록에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했으며, 그 과정에서 여러 후대의 관점들이 삽입되었다면, 그 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지나치게 순진한 행동이 되어버린다. 양식비평은 이 순진한 종교적 행동을 교정하기 위해, 복음서에 끼어 있는 후대의 녹을 제거하기 위한 행동에 나선다. 소위 역사적 예수 연구예수 세미나’, ‘신학이 배제된 실제의 예수 찾기같은 용어나 움직임들은 이런 일환이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 리처드 보컴은 이런 기존의 주류 해석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저자는 파피아스의 증언을 통해, 복음전승이 애초에 전승의 기원이 되었던 목격자들과 계속해서 생생히 결합되어 있었다(65)는 견해를 내세우면서, 복음서에 등장하는 다양한 종류의 이름들에 주목을 한다. 복음서에 실명으로 등장하는 사람들은 각각의 에피소드를 교회 공동체에 전달해 준 증인들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왜 복음서에 굳이 비중이 상당히 작은 인물들의 이름이 실려 있는지를 설명해준다. (동시에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면서도 실명이 등장하지 않는 이유도 설명해준다.)

 

     저자에 따르면, 세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복음)가 열두 제자의 명단을 세심하게 보존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공관복음서가 의존하고 있는 전승 모음을 형성한 공식적인 목격자 집단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저자의 독특한 주장은 이들 증인들과 복음서의 저자들 사이에 비교적 짧은 간격(아마도 직접 전해 듣거나, 한 사람 정도의 중개자를 통해)만 있었다는 부분이다.

 

     물론 이 과정은 대개 구술전승으로 이어져 왔을 터. 하지만 저자는 실제 현대에 남아 있는 구술전승에 관한 연구를 인용하면서, 사람들이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는 전승의 경우 그 내용이 실제적으로 유의미한 변화를 가져오지 않은 채 수백 년 동안도 이어져 내려올 수 있다는 사실을 덧붙인다.

 

 

     저자의 논지를 종합하면 이렇다. 복음서는 목격자의 증언이 직접, 혹은 짧은 시간을 두고 신뢰할 만한 전달자를 통해 기록된 책이다. 즉 복음서는 후대의 사람들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재구성한 내용이 아니라, 원 증인들의 목소리가 담긴 책이라는 것. 이 모든 과정은 광범위한 고대 문헌연구를 통해 뒷받침 되고 있다.

 

     물론 저자의 말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 증언이 진실인가 하는 질문은 여전히 남을 수 있다. 이에 대해 결론부에서 저자는 복음서에 기록된 일들과 같이 다시 반복되지 않는 사건들은 증언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역사기록으로서의 성격을 획득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과도한 역사실증주의는 일종의 지적 자살이며, 애초의 증언이 사실이 아니라는 증거가 나오기 전에는 기본적으로 신뢰할 만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

 

 

2. 감상평 。。。。。。。

 

     중간에 이런저런 행사와 일들이 끼어 있긴 했지만, 꽤나 오래 손에 들고 있었던 책이다. 두께도 두꺼운 데다가, 책 자체가 논문의 형식이라(종종 한 페이지 전체를 차지해버리는 각주들과 그냥 지나가는 것 하나 없이 일일이 논증을 해야 하는 그 철저함 등등) 그냥 술술 읽어나갈 수 있는 책은 아니었다.

 

     다만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 의미와 파장은 그리 어렵지 않게 포착할 수 있다. 관련된 논의에 대해 언뜻이라도 들어봤던 사람이라면, 저자가 말하는 내용을 그냥 지나칠 수 없으리라.(‘이게 뭔 소리야하면서 심술이 섞인 불평이나 비판을 하거나, ‘그래, 이거야하면서 열심히 귀담아 듣거나)

 

 

     앞서 설명한 양식비평의 논의가 시작된 이후, 복음서에 관한 연구는 말 그대로 그 책을 면도칼로 난도질 한 후, 핀셋으로 자신이 원하는 문장들만 끄집어 내 새로운 문장들을 만드는 식으로 진행되어 왔다. 그 시작은 예수의 실제 모습을 찾아내겠다는 야심찬 의도였을지 모르지만, 결국 이 과정을 거친 후 남은 것은 지극히 현대적인 모습의 예수, 연구자에 따라 제멋대로 만들어 낸 또 하나의 가상의 인물이었을 뿐이라는 점이 아이러니였다. 그런데도 복음서에서 시작된 이런 식의 태도는 성경의 나머지 부분을 연구하는 데에도 별다른 고민 없이 그대로 적용되곤 했다.

 

     하지만 이 책이 나온 이후, 이제 더 이상 그런 식의 시도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결코 학술적인 태도가 아니라는 분위기가 생기지는 않을까 싶기도 하다. 물론 이 책이 양식비평을 비판하기 위한 책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양식비평에서 주장하고 있는 대전제들을 모두 부정하는 논거를 상당히 설득력 있게 진행시키고 있으니까.

 

 

     물론 오래된 문헌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모든 연구가 그렇듯, 이 책의 핵심 주장이나 논의들 역시 해석의 문제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 책의 내용이 아무리 마음에 들어도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럴 가능성이 높다까지가 한계라는 것. 하지만 저자가 책의 마지막 장에서도 말했듯이, 이 책의 주장을 부정하는 증거가 나오기 전에는, 또 문헌에 대한 이 책의 해석이 잘못임을 보여줄 수 있는 상당한 수준의 주장이 등장하기 전에는, 이 정도라면 신뢰해도 좋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아무에게나 읽어보라고 추천하기에는 어려운 책이지만, 복음서의 기록과정이나 역사성에 관해 진지하게 물음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읽어 볼 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