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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 - 세월호와 기독교 신앙의 과제
박영식 지음 / 새물결플러스 / 2015년 4월
평점 :
1. 요약
。。。。。。。
책은 고통과 악의 이유에 관한 신학적 질문으로 시작한다. 저자는
이에 대한 고전적인 대답들 –
교훈을
위한 것, 죄에
대한 징벌, 선을
낳기 위한 연단의 과정 –을
검토하면서, 그것들이
실제로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납득시킬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하지 못한 설명이라고 지적한다.
저자는 문제의 원인을 하나님에 대한 고전적 이해가 가진 한계에서 찾는다. 전통적
신학에서 하나님은 ‘제일원인’, 혹은
‘전능자’로서의
위치를 차지한다. 하지만
이렇게 될 때는 앞서 제기된 악의 문제에 대한 적절한 대답을 낼 수가 없다. 제일원인자로서의
속성을 지키려면 하나님을 고통과 악의 원인으로 몰거나, 잘해야
인간이 겪는 고통에 무감각한(악을
도구로 선을 이루거나, 치명적인
고통으로 교훈을 주려는) 존재로
상정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선함과 전능함, 그리고
실제적 고통이라는 조화시킬 수 없는 트릴레마(trilemma)라는
것.
저자는 고전적 이해에서 과감하게 탈피해 새로운 신관을 가질 필요가 있음을 주장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물론
그 설명들은 타당한 면도 있고, 성경의
기록들을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적인 측면에서 하나님은 그저 전능자로서 계시기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하자는 것이다. 그분은
저 멀리 계시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에, 인간들
사이에 들어오시는 분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자신의 능력을 기꺼이 스스로 제한하시기도 한다.(케노시스
신학)
하나님은 고통 받는 사람들과 함께 고통을 겪으며, 슬픔을
느끼신다. 나아가
그들이 문제를 극복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의지가 되어 주신다. 하나님은
관찰자가 아니라 인간들과 함께 고난을 겪는 분이라고, 성경의
기록자들도 말하고 있지 않던가. 저자는 하나님을
이렇게 이해할 때 그분을 믿는 사람들의 고통을 대하는 태도와 행동 또한 극적으로 달라진다고 말한다. 이제
그들은 고통을 해석하고 설명하려고(혹은
판단하려고) 애쓰기보다는, (하나님처럼) 고통
받는 사람들과 함께 울고, 나아가
구조적인 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5. 감상평
。。。。。。。
신학의 여러 분과 가운데 조직신학(또는
교의신학)이라는
게 있다. 주로
교리적인 부분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데, 따지고
보면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던 일련의 탐구 중 가장 먼저의 시작된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조직신학 안에는 변증학이라는 분야가 있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일련의 공격으로부터 하나님을 지켜내는 논리와 체계를 연구하는 분야다. 그리고
다시 역사적으로 보면, 변증학은
조직신학의 여타 분야들보다 앞서서 시작된 활동이다.
그런데 이 전통 있는 분과가 요새는 그다지 인기가 없다. 하나님을
대신해 그분을 변호한다는 포지션에 서는 일이 결코 쉽지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악으로 가득 차 있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선함을 변호해 내려는 신정론은 어렵기 그지없다. 이런
상황에서 이 쉽지 않은 작업에 뛰어든 저자에게 우선 감사하는 마음이 든다. 책은
저자의 깊은 고민과 적당히 얼버무리지 않으려는 탐구의 과정이 잘 담겨 있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근본적인 질문인 ‘그
날,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에
대해서 저자는 ‘그
날, 하나님은
죽어가는 아이들과 함께, 슬픔과
고통을 겪고 있는 가족들과 함께 계셨다’라고
대답한다. ‘하나님은
전능하신데 차라리 먼저 그런 일들을 막는 게 낫지 않으셨는가’라고
하는 질문에는 ‘그분은
전능하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하시기 위해, (필연적으로) 스스로를
제한하고 비우실 수밖에 없었다’고
대답하는 듯하다.
확실히 전통적인 설명과는 조금 결이 다른 대답이다. 그리고
사실 아주 만족스러운 대답도 아니다. 하지만
이 대답의 공헌은, 적어도
그분을 믿는다는 사람들의 입에서 도리어 고통 받는 사람들을 괴롭히는(물론
이게 고의가 아닐 가능성이 다분하지만) 말이
툭툭 터져나오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점이다. 저자가
지적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지나치게 말이 많아서, 자신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해석하고 설명해야 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럴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경우가 있으니까.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음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게’ 좀
더 진실한 반응이 아닐까.
한편 저자의 주장은 전능성을 희생시켜서 그분을 책임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려는 것인가 하는 공격을 받을 수도 있다. 그리고
아마 이 두 번째 공격은 첫 번째 질문들을 던진 사람들과는 그 배경이 좀 다른 사람들 (아마도
같은 기독교 공동체 안에 있는 어떤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 그분이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시면서 스스로 자신을 제한하셨다면, 이제
그분은 전능하지 않으신 것인가? 저자
역시 이 부분에 대해 명확하게 대답하지 않는다. 그러나
‘전능’이라는
엄청난 개념이 어디 처음부터 다 이해가 되기는 하는 것이었던가. 차라리
성경이 말하고 있는 데까지만 바라고, 겸손하게
우리의 무지를 인정하는 것 또한 적당한 태도일지도 모른다.
생각했던 것보다 얇았지만, 그리고
문체가 가능하면 편안하게 읽도록 하기 위해 애쓰고 있지만, 담겨
있는 내용은 묵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