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 서거 50주기 기념판) - 마틴 루터 킹 자서전
클레이본 카슨 엮음, 이순희 옮김 / 바다출판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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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 동화책을 읽던 시기를 제외하고, 20년이 조금 넘는 내 독서 인생에서 가장 큰 영향을 준 두 사람은 C. S. 루이스와 마틴 루터 킹이다. 기본적으로 학자였던 루이스의 경우는 많은 책들을 써서 모으는 재미와 함께 다양한 즐거움을 주지만, 목회자이자 대중운동가였던 킹의 경우는 많은 책을 남기지 않았다. 때문에 단편적인 글의 모음 정도만 겨우 읽어왔던 차에 킹의 자서전이라니 이런 게 있었나 하는 반가움에 구입을 했다.

 

     하지만 킹은 실제로 자서전을 쓴 적이 없었다. 자서전이라면 보통 자신의 삶을 돌이켜 볼 수 있는 인생의 후반부에나 쓰기 시작하는 종류의 책이지만, 겨우 30대 후반의 나이에 암살을 당한 그로서는 제대로 준비조차 하지 않았을 테니까. 이 책은 킹의 글들을 모아 책으로 엮어온 클레이본 카슨이 킹의 생애와 그가 남긴 글들을 시간 순서대로 늘어놓아 엮은 사후 자서전이다. 물론 일부 편집자의 역할이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킹의 말과 글을 바탕으로 했기에 충분히 마틴 루터 킹을 접하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을 만한 책이다.

 

 

     마틴 루터 킹이라면 역시 비폭력저항의 대부로 알려져 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그가 비폭력 무저항을 주장했다고 생각하는 건데, 킹은 비폭력주의과 무저항주의를 분명히 구분한다. 생전에도 그를 향해 일종의 정적주의(Quietism)를 선포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오히려 킹의 비폭력주의는 저항을 하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봐야 한다. 폭력을 행하는 상대에게 저항을 하되 비폭력이라는 수단으로 한다는 것이다. 이쪽이 도덕적 우월성과 정당성을 드러낼 수 있는 좀 더 강력한 방식이니까.

 

     실제로 그의 생각은 옳았던 것 같다. 흑인들의 지위 향상을 위한 그의 비폭력 투쟁은 비록 자신은 암살로 생을 마감하긴 했으나, 결국 여러 실제적 결과들을 얻어냈으니까. 물론 여전히 미국 사회에서 인종차별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긴 하지만.

 

     ​또 한 가지 책을 읽으며 새롭게 깨달았던 것은, 그가 모든 영역에서의 비폭력을 주장했던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킹은 베트남 전쟁에서 반전주의의 편에 섰고, 이 때문에 수많은 정적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개인 차원에서 자신이나 가족들을 공격하는 적에 대해 자기방어를 포기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를 당연한 것으로 여겼고, 심지어 총도 사용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 같다. 다만 흑인인권운동의 차원에서는 비폭력이 훨씬 더 효과적이고 정당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킹은 열정적인 행동가였다. 북미 대륙 이곳저곳을 쉬지 않고 오고가며 그의 힘이 필요한 곳에 있기 위해 애를 썼다. 심지어 오전에 자신이 담임하고 있는 교회에서 사역을 하고, 비행기를 타고 투쟁의 현장에 갔다가, 다시 저녁 예배의 성례식을 위해 돌아오기도 했을 정도니까.

 

     하지만 그는 행동파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킹에게서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그의 상상력이었다. 흑인은 백인과 함께 앉아 식사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차별정책을 자랑스럽게 유지하겠다고 말하는 권력자 앞에서, 사나운 개와 물대포를 앞세우고 위협하는 경찰청장들을 마주하고 있으면서도 킹은 노예주인과 노예의 후손들이 손을 잡고 함께 나아갈 날을 보고 있었다

 

     어쩌면 이런 상상력이 그로 하여금 불가능해 보이는 행동을 꿋꿋하게 해 낼 수 있도록 만드는 원동력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연설을 듣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그게 보고 있는 것을 보게 되고, 그와 함께 앞으로 나아가고 싶어진다. 탁월한 연설가였다.

 

 

     일단 책 자체도 두툼하고, 이전의 다른 책들에서 봤던 문장들과 글들도 상당수 담겨 있어서, 마틴 루터 킹이라는 인물의 투쟁과 그가 품고 있던 생각을 이해하는 데 좋은 기본 교과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잘 엮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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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시대의 그리스도인 교회탐구포럼 시리즈 8
송인규 외 지음 / IVP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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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섯 명의 저자들이 교회와 페미니즘이라는 두 개 주제를 중심으로 쓴 글을 모은 책이다. 먼저 IVF에서 오랫동안 활동했던 송인규는 영미 복음주의 안의 여성에 관한 네 가지 입장(가부장제와 상보론, 평등론, 페미니즘)을 차분히 정리했다. 각각 순서대로 보수적인 입장부터 진보적 입장으로 스펙트럼이 펼쳐져 있는데, 대체로 상보론과 평등론 중 어딘가에 자신의 입장을 두지 않을까 싶다

 

     개인적으로는 이들 입장들을 구분할 수 있는 좋은 기준을 얻었고, 여기에 상보론과 평등론을 포괄하면서 조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입장들(3의 길)을 최선을 다해 정리해 준 부분도 높이 평가한다. 저자는 이들 중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지만, 읽는 사람들에게 적절한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지 않을까 싶다.

 

 

     내겐 번역가로서의 인상이 강한 양혜원은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 교회 내 여성(특히 사모라고 불리는 이)의 위치에 대한 고민을 풀어낸다. 선뜻 페미니즘적(페미니즘 정치적) 입장에 동의할 수 없으면서도(이는 다분히 복음주의적, 혹은 보수적 신조에 동의하는 그의 신앙관 때문인 듯하다), 온몸으로 겪고 있는 교회 내 여성에 대한 적절치 못한 시선 역시 그대로 넘기기 어려웠던 고민이 생생하게 전해진다.

 

     ​저자는 여기서 제자라는 개념을 다시 도입한다. 교회 내 권위나 지위에 관한 논쟁에서 벗어나, 그리스도 앞에서 동등한 제자로서의 정체성 회복에서 문제 해결의 (개인적인) 실마리를 찾아낸다

 

 

     ​앞서의 글이 깊은 개인적 고뇌가 묻어나오는 진득한 글이었다면, 이에 반해 이화여대의 백소영 교수의 글에는 단호함이 보인다. 그는 페미니스트의 관점에서 성경을 다시 읽어야 한다는 주장을 펴는데, 일견 굉장히 분명해 보이지만 사실 이런 식의 접근이 내포하고 있는 수많은 난제들을 전혀 언급하지 않은 채 성급한 뜀뛰기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이와 관련해서는 앞서의 두 글을 보는 게 도움이 될 듯)

 

     ​물론 씨줄과 날줄(책에서는 경줄과 위줄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의 비유를 통해, 성경의 본질적인 부분을 잡고 상황적 부분을 적당히 해석해 가며 읽어야 한다는 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하고 있는 일들이다. 문제는 여기서 어떤 것이 씨줄인지를 판가름 하는 것이 철저하게 현대적 기준이라는 점인데, 이는 자칫 C. S. 루이스가 경고한 연대기적 속물주의(뭐든지 새로 나온 게 옳다는 사고방식)”빠져들어 갈 수도 있어 보인다.

 

 

     ​정재영과 김애희는 한국인의 남녀관계에 대한 인식설문조사를 바탕으로 그 내용을 분석하고(정재영), 그 자료를 바탕으로 교회 내 성평등을 촉구하는 내용(김애희)을 담고 있다. 이런 설문조사 결과는 학술적으로는 필요한 자료가 될 수 있을 듯싶다.

 

 

     ​마지막에 배치된 정지영의 글은 조금 독특하다. 이 책은 어떤 내용을 구체적으로 주장하기 보다는 1970년대 이래로 우리나라에 소개된 페미니즘 관점, 혹은 페미니즘을 설명하는 수많은 책들을 연대기적으로 차곡차곡 소개하고 있는 책이다. 여기에 소개된 모든 책을 다 직접 봤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런 방대한 서지학적 작업을 해 낸 노력에 박수를 칠 수밖에 없다.

 

     ​이를 통해 저자는 복음주의 내 페미니즘 논의가 어제 오늘에야 시작된 것이 아니며, 미국 등지에 비하면 좀 늦긴 했으나 이미 50여 년 가까운 학술적 연구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개인적으로는 첫 번째와 두 번째 글을 추천한다. 송인규의 글에서 우리는 논리적으로 자신의 입장(혹은 다른 사람의 입장)을 점검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고, 여기에 영향을 준 개념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데 도움이 될 듯하다. , 양혜원의 글을 통해서는 개인적으로 경험했던 일들을 설명하는 좋은 선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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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아의 이름들 - 대림절에 알아보는
월터 브루그만 지음, 이옥용 옮김 / 기독교문서선교회(CLC)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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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력에는 대림절이라는 기간이 있다. 크리스마스 이전의 한 달(4)를 가리키는데, advent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 예수의 출현 또는 오심을 준비하는 기간이다. 교회력을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대부분의 개신교단들에서는 거의 잊히긴 했지만, 일부 교단들에서는 여전히 이 날을 기념한다.

 

     그 이름에서부터 이 기간은 철저히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을 기다리며, 그분을 묵상하는 절기다.(사실 기독교회는 모든 날을 그분과 연결지어 생각해야 하지만) 이 작은 책은 대림절의 4주간 한 주에 하나씩 묵상할 수 있도록, 이사야 96절에 등장하는 그리스도의 네 가지 별명을 분석하고 설명한다.

 

     기묘한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라는 네 가지 칭호는, 각각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하지만 그 각각의 칭호가 어떻게 예수의 사역과 연결되는지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적이 드문 듯하다. 저자는 이 작업을 수행하면서, 우리가 너무 금방 지나쳐버린 그 칭호와 예수의 사역 사이의 연결고리를 깊이 묵상해 볼 수 있도록 돕는다.

 

     개인적으로는 예수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일이 얼마나 (신학적으로) 어색한 일인지, 그리고 평강의 왕이라는 용어 또한 이사야 시대를 살아갔던 사람들의 기대와 얼마나 큰 차이를 보이는지를 지적하는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그 짧은 구절(9:6)이 탁월한 저자의 손에 들리면 얼마나 아름답게 풀려나오는지를 볼 수 있는 책이다.

 

 

     아쉬운 건 그리 분량이 얼마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번역과 편집 과정에서 오타가 몇 개나 나오고 있다는 점.(세 개는 찾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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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여성으로 살아 본 1년
레이첼 헬드 에반스 지음, 임혜진 옮김 / 비아토르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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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인들은 자주 성경적이라는 말을 한다. 하지만 생각보다 이 성경적이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는 불분명하고 쉽게 합의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성경과 오늘 우리의 삶 가운데 놓여 있는 거대한 틈(시간적, 역사적, 지리적, 문화적인 의미에서)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이 단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성경적일까. 우선 성경에 명시적으로 기록된 내용을 성경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 하지만 이 경우 우리가 성경적으로 살아야한다고 말하기가 어려워진다. 우리 중 상당수는 안에 살지 않고, 농사를 짓지도 않으며, 양을 치지도 않는다. 이와 관련된 많은 규정들은 우리에게 별다른 의미가 없고, 문자적 준수도 불가능하다.

 

     안식일을 문자적으로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어느 지역을 기준으로 한 시간을 따라야 할까. 전통적인 규정에 따르면 안식일은 금요일 해가 진 후부터 토요일 해가 지기까지다. 그런데 지구는 둥글고, 이 명령이 처음 적용되었던 지역은 이미 안식일이 되었지만, 다른 지역은 여전히 금요일인 경우도 있다. 우주적 차원에서 누구는 안식일 안에 있고, 누구는 밖에 있는 일이 동시에 벌어지는 것이다. 안식일의 첫 준수자들은 이런 상황을 고려하지 않아도, 아니 예상치 못했겠지만 말이다.

 

     결국 우리는 성경적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어쩔 수 없이 취사선택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 선택의 과정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학이 영향을 끼친다. 그러나 신학은 잠재적인 결론이며, 최종적인 결론이 아니다. 당연히 이에 근거한 성경적규정들의 의미, 혹은 준수의 범위 등도 달라질 수 있다. 이 점을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자기 말만 옳다고 우기는 어린 아이와 다를 바가 없게 된다.

 

 

     이 책의 저자는 사람들이 말하는 성경적 여성상이 얼마나 임의적이고, 불완전한 조각들로 이루어져있는지, 자신이 직접 최대한 문자적으로 그 규정들을 준수함으로써 반어적 증명을 시도한다. 한 해 동안 매달 특정한 덕목을 주제로 삼고, 그에 따른 실천사항들을 성경에서 최대한 찾아 문자적 준수를 해보기로 한 것이다

 

     예컨대 실험을 시작한 10월은 온유라는 덕목이 주제였고, 이를 위해 온유하고 정숙한 심성을 기르기 위해 그렇지 않은 일을 할 때마다 동전을 저금하는 통(맹세 항아리)을 만든다거나, 관상기도를 훈련하고, 분란을 일으키는 행위를 할 경우 지붕 위에 올라가 속죄하기로 했다. 순종이 키워드인 12월에는 남편을 주인님이라고 부르고(벧전 3:1-6), 일부다처주의자들을 인터뷰하며(30, 21:10), 여성 혐오로 희생된 성경 속 여성들을 기리는 행사를 열었다.(11:37-40)

 

     실험 기간 내내 저자를 쩔쩔매게 했던 것은 요리나 손수 옷을 지어 입는 일 같은 것들이었다. 특히 잠언 31장에 현숙한 여인이 해야 할 일의 긴 리스트를 보는 것만으로도 저절로 기가 질리게 만들었고. 때로는 코믹하게, 때로는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도전이, 또 때로는 전혀 생각해 보지 못했던 면을 조명하는 내용 등이 다양하게 실려 있다. 이 다양한 도전기를 읽는 것 자체도 재미있지만, 소위 성경적 여성으로 살라며 (선별을 거친) 성경구절을 제시하는 것이 얼마나 무리한 일이었는지를 생각해 보게 만든다.

 

 

     책의 결론부에서 저자는 성경적 여성관이란 없다고 선언한다. 특히 성경은 여성’(혹은 남성)에게 이러이러 해야 한다는 식의 임무 리스트를 제공하지 않는다.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과 상호작용하시는, 복잡하고 계속 전개되어 가는 이야기’(398)라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어떤 태도로 성경을 들고 읽느냐이다. 우리가 그 안에서 할 일의 목록을 찾으려고 한다면 (성경이 실제 그런 책인가와는 상관없이) 그런 것들만 찾아내게 될 것이다. 어떤 이들은 노예를 부리는 일의 정당성을 성경에서 찾아내지 않았던가.

 

     그동안의 성경적 여성관논의에서, 사람들은 따라야 할 규정을 찾아내려는 목적을 가지고 그 책을 폈다. 만약 우리가 그 안에서 사랑과 인정을 발견하려고 했다면 지금과는 또 많이 다른 그림을 발견하게 될 수도 있다. 이 말이 사실 성경은 우리가 원하는 내용을 뽑아낼 수 있는 일종의 제비뽑기 책이라는 말이 아니다. 사실 후자 쪽이 예수께서 성경을 읽으시는 기본적인 관점에 좀 더 가까웠으니, 어쩌면 이쪽이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바라보는 좀 더 바람직한 관점일지도 모른다.

 

     여성에 관한 논의로 시작하기는 했지만, 성경 자체를 읽는 좀 더 넓은 관점을 열어주는 좋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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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가 구속한 여성 - 성경적 남녀 관계와 여성 리더십
김세윤 지음 / 두란노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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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창시절 우리나라의 바울신학에 관한 권위자인 김세윤 교수의 책을 두 권 읽었다. 모두 바울 신학에 관한 책들이었는데 두 권 다 두툼하고 가볍지 않은 내용이었던 데 반해, 그것이 담고 있는 주제는 분명하게 보였다. 이후에도 구원에 관한 짧은 책을 한 권 쓰셨는데, 그 책 역시 주제에 관한 분명하고 간결한 언명들이 기억에 남았다. 이 책에도 저자의 그런 글쓰기 특성이 잘 드러난다.

 

     ​책은 한국의 교회 내 여성의 지위에 관한 문제를 다룬다. 워낙 오랫동안 쌓여온 문제인지라 간단하게 결론내리기 어려운 부분이지지만, 저자의 성격상, 또 한국을 떠나 있는 상황상(미국 풀러신학대학원 교수로 계신다) 조금은 과감하게 문제에 접근하고 제안한다.

 

 

     저자는 우선 구약도 여성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며, 흔히 말하는 창세기 2장의 돕는 베필은 열등성을 말하는 것이 전혀 아니라고 단언한다.(같은 히브리어 단어는 하나님을 설명할 때도 자주 사용된다.) 신약으로 넘어가면, 우선 예수는 여성에 대한 차별적인 메시지를 하지 않으셨고, 도리어 여성들을 복음(부활)의 첫 증언자로 세우셨다. 물론 그분 역시 문화적 적용을 완전히 도외시하지는 않으셨다.(예컨대 열두 제자 중 여성이 포함되지 않았던 점)

 

     ​저자의 전문영역인 바울서신들에 관한 내용에서는 보다 진일보한 주장을 이어간다. 바울은 예수의 가르침을 기본적으로 전제하면서 그가 마주한 현실에 적용한다. 특별히 저자는 교회생활 안에서 여성의 지위 부분에 초점을 맞추는데, 바울의 신학 안에서 여성은 공예배 가운데 기도하고 설교(예언)까지 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흔히 교회 내 여성의 지위에 대한 제한구절들로 여기는 것들은, 실은 여성의 교회 사역을 원활하게 보장하기 위한 주의를 담고 있는 내용이었다는 주장이다.

 

     결론부에서 저자는 교회 내 여성 지위가 낮은 것은 성경적인 이유라기보다는 관행, 혹은 인습적인 부분이 더 강하다고 말한다. 이런 상황은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인 가정에로도 옮겨가면서 전반적인 분위기를 형성해버린다. 저자는 우리가 교회 내 여성의 리더십을 좀 더 계발해야 한다는 말로 책을 맺는다.

 

 

     교회 내 여성의 지위에 관한 대표적인 문제로 여성 목사 안수건이 떠오른다. 내가 속한 교단은 여전히 이 문제에 보수적으로 접근하고 있지만, 그래도 최근 총회들에서는 조금은 더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려는 듯하다. 사실 애초에 이 문제를 성별로 구분 지으려고 했던 것 자체가 무리한 일이었으니까. 개인적으로는 시기의 문제이지 점차 열려 가리라고 생각한다. 하나의 성별이 또 다른 성별을 차별할 수 있는 권한과 근거, 권위는 적어도 성경에 의해서는 지지받을 수 없으니까.

 

     짧은 책이고, 워낙에 명료한 문장들이라 금세 읽힌다. 그리고 책 속에 실려 있는 내용들은, 적어도 내게는 크게 무리하거나 위협적인 내용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물론 이런 주장이 급진적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르지만, 당연한 소리가 이상하게 들리게 되면 이제 그 사람이 문제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영화 노예 12속에는 자신이 부리는 노예들 앞에서 복음서를 읽어주며 그 불합리한 체제를 성경적인 것으로 설명하는 (조금은 인자한) 주인이 등장한다. 아무 것에나 성경적이라는 딱지를 붙여 누군가를 억압하는 못된 버릇은 쉽게 고쳐지지 않는 것인지 조금은 답답하기도 하다.

 

     ​교단과 교리는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들은 계단을 올라가기 위한 안전장치(난간)에 불과하다는 C. S. 루이스의 주장도 곱씹어 볼 만하다. 우리는 난간을 얼마나 튼튼하게 만들지를 고민하는 대신, 저 계단이 어디로 이어지는지를 살펴야 하지 않을까.

 

     물론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교회의 리더십과 관련된 일을 남성이 더 잘할 것이라는 말은 분명 틀리다. 그러나 그 반대로, 여성이 더 잘할 수 있다는 말 역시 틀리다. ‘어떤남성은 어떤여성보다 그 일을 잘 할 수 있고, 마찬가지로 어떤여성은 어떤남성보다 그 일에 더 잘 어울릴 수 있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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